신자를 부동산 빚쟁이로 몰아간 목사는 적그리스도이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건축헌금을 요구한 적이 있는가. 새로운 예배당을 지으라고 했는가. 더 큰 성전을 만들기 위해 대출을 받으라고 했는가. 성도들에게 건축헌금을 작정하게 하고 부족하면 신용대출이라도 받아 하나님의 집을 완성하라고 가르쳤는가.
그렇지 않다.
복음서 어디에서도 그런 예수의 모습을 찾을 수 없다. 예수에게는 거대한 예배당 건축 계획도 없었고, 성도들에게 건축헌금을 작정시키는 프로그램도 없었다. 그는 사람을 찾아다녔고, 병든 사람을 고쳤으며,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셨다. 자신의 사역을 위해 거대한 건물을 소유하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교회가 성장하면 건물을 짓고, 건물을 지으려면 헌금을 모으고, 헌금이 부족하면 대출을 받고, 대출을 받으면 이자를 갚기 위해 다시 헌금을 독려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성도들에게 ‘건축헌금’이라는 이름으로 장기간 헌금을 작정하게 한다.
더 놀라운 것은 그것이 단순한 자발적 헌금에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어떤 경우에는 성도들이 자신의 이름으로 대출을 받거나 마이너스 통장을 만들어 건축헌금에 참여하기도 한다. 자기 집 한 채 마련하지 못한 사람이 교회의 건물을 위해 빚을 지는 것이다.
이것은 과연 정상적인 신앙의 모습인가.
더 근본적으로 묻고 싶다.
이런 방식의 건축헌금 문화가 정말 기독교의 보편적인 전통인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이것은 한국 개신교가 만들어낸 매우 특수한 종교문화라고 보아야 한다.
세계의 기독교 역사 전체를 놓고 보더라도 교회 건물을 짓는 일 자체는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한국 개신교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목회자가 교회의 비전을 내세워 성도들에게 장기간 건축헌금을 작정하게 하고, 교회의 대규모 부동산을 확보하기 위해 거액의 대출을 일으키며, 그것을 하나님의 뜻과 성도의 헌신이라는 언어로 정당화하는 현상은 결코 기독교의 보편적 본질이라고 할 수 없다.
유럽의 오래된 교회들을 보라. 역사적으로 교회와 성당이 거대한 건축물로 남아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중세의 교회와 국가, 군주제, 도시공동체가 결합했던 특수한 역사적 조건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그것을 오늘날 한국 교회의 부동산 확장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
오늘날 세계의 많은 기독교 공동체에서 예배는 거대한 성전 건축보다 공동체의 유지와 선교, 교육, 구제와 슬롯적 봉사에 더 큰 의미를 둔다. 특히 개신교의 역사에서 교회는 건물 자체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 교회에서는 어느 순간부터 교회 건물이 교회의 성장을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상징이 되어버렸다.
교회가 커지면 더 큰 예배당을 지어야 한다.
더 좋은 위치로 이전해야 한다.
더 많은 성도를 수용할 수 있는 건물이 필요하다.
주차장이 필요하고 교육관이 필요하고 선교관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위해 돈이 필요하다.
결국 교회의 성장이 사람의 변화가 아니라 부동산의 확장으로 측정되는 기묘한 현상이 나타난다.
여기서 한국 교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가 시작된다.
교회가 사람을 위해 건물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건물을 유지하기 위해 사람이 희생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성도는 전세대출 이자를 걱정하고 월세를 걱정하는데 교회는 수십억, 수백억 원의 건축 대출을 걱정한다. 청년은 자신의 집을 마련하지 못해 결혼을 미루는데 교회는 더 큰 예배당을 짓기 위해 헌금을 요구한다. 자영업자는 매출이 떨어져 하루하루를 걱정하는데 교회는 건축헌금 작정을 독려한다.
그리고 그 희생을 ‘믿음’이라고 부른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한국 교회의 건축헌금 문화를 매우 심각하게 바라보게 된다.
성도들에게 희생을 요구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희생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물어야 한다.
가난한 사람을 돕기 위한 것인가.
고통받는 사람을 살리기 위한 것인가.
선교를 위한 것인가.
교육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결국 교회가 소유할 부동산을 위한 것인가.
후자라면 그것은 신앙의 우선순위를 다시 검토해야 할 문제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 과정에서 성도들의 인간적인 욕망까지 이용된다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초라하지 않기를 원한다. 자신의 삶이 인정받기를 원하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자랑스럽기를 원한다. 낡은 상가 3층의 작은 교회보다 대리석과 유리로 장식된 거대한 예배당에 들어갈 때 훨씬 큰 자부심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나는 이런 교회에 다닌다.”
“우리 교회는 이렇게 크다.”
“우리 교회는 이렇게 훌륭하다.”
그 순간 교회 건물은 단순한 예배 공간이 아니라 슬롯적 지위를 상징하는 기호가 된다.
장 보드리야르가 말한 기호가치의 논리를 적용해 보면 이것은 상당히 명확해진다. 사람들은 건물을 사용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건물이 가지고 있는 상징을 소비한다. 교회 역시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신앙이 건물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는 방식으로 변하기 시작하면 문제가 달라진다.
교회가 사람의 내면을 변화시키는 곳이 아니라 사람에게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는 외적 자부심을 제공하는 곳이 된다.
그리고 이 욕망을 목회자가 이용하기 시작하면 더욱 위험하다.
“하나님의 성전을 크게 지으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도 크게 하실 것입니다.”
“믿음으로 작정하십시오.”
“이번에 희생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갚아주실 것입니다.”
이런 말이 반복되면 헌금은 신앙이 아니라 거래가 된다.
성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무엇인가를 받기 위해 돈을 내는 사람이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목회자의 비전과 하나님의 뜻이 동일시된다.
이것이 가장 위험하다.
목회자가 건축을 원한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은 아니다.
목회자가 교회를 확장하고 싶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비전은 아니다.
목회자가 더 큰 건물을 원한다고 해서 성도가 자신의 생활을 희생해야 할 의무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에서는 목회자의 ‘비전’이라는 말이 너무 쉽게 성도들의 의무로 바뀐다.
목회자가 꿈꾸는 건물을 성도가 자신의 돈으로 실현해야 한다.
목회자가 세운 계획을 성도가 자신의 삶을 희생해 완성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믿음과 헌신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한다.
나는 이것이 한국 교회가 반드시 반성해야 할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교회가 건축 대출의 이자를 감당하지 못해 교역자의 급여가 몇 달씩 밀리는 상황까지 발생한다면 이것은 더 이상 단순한 건축 문제가 아니다. 교회가 무엇을 우선순위로 두고 있는지에 관한 근본적인 문제다.
건물을 지키기 위해 사람이 희생된다면 그 건물은 이미 목적을 잃은 것이다.
사람이 교회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사람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예배당은 사람을 위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사람이 예배당을 위해 빚을 지고, 교역자가 예배당의 이자를 위해 자신의 임금을 포기하고, 가난한 이웃을 돌볼 돈이 건물의 유지비와 금융비용으로 사라진다면 그 순간 우리는 그 건물의 거룩함을 물어야 한다.
십자가가 건물 꼭대기에 있다고 해서 그 건물이 자동으로 거룩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예수의 이름으로 사람을 희생시키고 있다면 그 십자가는 우리에게 더 무서운 질문을 던져야 한다.
“너희가 정말 나를 따르고 있는가?”
예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 사람에게 더 내놓으라고 한다.
예수는 가난한 사람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우리는 가난한 성도에게 헌금을 요구한다.
예수는 섬기는 자가 되라고 했다.
그런데 우리는 목회자의 건축 비전을 위해 성도의 희생을 요구한다.
이쯤 되면 ‘적그리스도’라는 단어를 단순한 욕설로 치부할 수만은 없다.
적그리스도란 무엇인가.
그리스도를 노골적으로 부정하는 사람만을 의미하는 것인가.
오히려 그리스도의 이름을 내세우면서 그리스도의 정신과 정반대되는 일을 하는 것이 더 무서운 적그리스도의 모습은 아닐까.
예수의 이름으로 탐욕을 정당화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부동산을 축적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성도의 불안을 자극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빚을 권한다면 우리는 적어도 그것이 복음의 정신과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냉정하게 물어야 한다.
나는 그래서 한국 교회의 건축헌금 문화를 단순한 교회 재정의 문제가 아니라 신학의 문제라고 본다.
교회가 무엇인가.
성전이 무엇인가.
헌금이 무엇인가.
목회자의 권위는 어디에서 오는가.
성도의 헌신에는 어떤 한계가 있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가 정말 무엇을 요구했는가.
이 질문을 다시 해야 한다.
예수는 거대한 건물을 요구하지 않았다.
예수는 사람을 요구했다.
예수는 돈으로 자신의 사역을 증명하지 않았다.
예수는 사랑으로 자신의 사역을 증명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부동산을 늘리라고 하지 않았다.
가난한 사람을 돌보고,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사랑하고, 자신을 따르라고 했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왜 예수를 따르는 것보다 예배당을 짓는 데 더 열정적인가.
왜 교회의 성장과 하나님의 축복을 건물의 크기와 연결하는가.
왜 성도의 신앙을 헌금 액수와 건축헌금 작정으로 측정하는가.
왜 자기 집 한 채 마련하지 못한 성도에게 교회의 집을 마련해 달라고 요구하는가.
이제 한국 교회는 이 질문에 답해야 한다.
특히 지금 한국 슬롯에서 주거 문제는 단순한 경제 문제가 아니다. 청년에게 집은 결혼과 출산의 문제이고, 중년에게 집은 노후의 문제이며, 서민에게 집은 생존의 문제다. 그런데 자기 집을 갖지 못한 사람이 교회의 건물을 위해 빚을 진다면, 교회는 그 사람의 삶을 먼저 걱정해야 하지 않겠는가.
“건축헌금을 더 내십시오”라고 말하기 전에 “당신의 가정은 괜찮습니까?”라고 물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나님의 성전을 크게 지읍시다”라고 말하기 전에 “당신의 집은 평안합니까?”라고 물어야 하는 것 아닌가.
나는 이제 한국 교회가 건축 경쟁을 멈출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한국 슬롯에는 이미 교회 건물이 너무 많다.
이제 필요한 것은 더 큰 교회가 아니라 더 깊은 교회다.
더 화려한 예배당이 아니라 더 따뜻한 공동체다.
더 많은 부동산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이 살아나는 공동체다.
상가 3층의 작은 교회라도 좋다.
낡은 의자와 오래된 건물이어도 좋다.
그곳에서 한 사람이 절망에서 일어나고, 한 청년이 다시 희망을 찾고, 한 노인이 외로움에서 벗어나고, 한 가정이 무너지지 않도록 붙들어준다면 그것이야말로 살아 있는 교회다.
교회의 영향력은 건물의 크기에서 나오지 않는다.
사람의 삶을 얼마나 변화시키느냐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나는 한국 교회가 이제 건축헌금이라는 오래된 관행을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야 한다고 본다.
성도들에게 빚을 내서 헌금하라고 요구하는 순간, 교회는 성도의 신앙이 아니라 성도의 불안을 이용하는 조직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그리고 목회자의 건축 욕망 때문에 성도의 가정이 무너지고 교역자의 급여가 밀리고 가난한 이웃을 도울 재원이 사라진다면, 우리는 그 건물을 ‘성전’이라고 부르기 전에 먼저 그 건물이 과연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지 물어야 한다.
예수는 건축헌금을 요구한 적이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만들어 놓은 이 거대한 건축헌금 문화는 과연 누구의 것인가.
예수의 것인가.
아니면 인간의 욕망인가.
그리고 예수의 이름을 빌려 자신의 건축 야망을 성도들에게 떠넘기고, 그들의 삶을 부동산 빚으로 저당 잡는 성직자가 있다면 그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당신이 정말 짓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성전인가.
아니면 당신 자신의 비전과 욕망을 위한 거대한 기념비인가.
한국 교회가 이제 대답해야 할 때다.
교회가 지어야 할 가장 거룩한 건축물은 콘크리트와 대리석으로 만든 예배당이 아니다.
무너진 사람의 삶을 다시 세우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의 존엄을 세우는 것이다.
절망한 청년의 미래를 세우는 것이다.
무너진 가정을 다시 세우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도 자신이 빚더미에 올라앉지 않도록 그들의 삶을 지켜주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가 원했던 교회에 훨씬 가까운 모습일 것이다.
그러니 이제 다시 묻자.
예수가 건축헌금을 요구한 적이 있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예수의 이름으로 성도들을 부동산 빚쟁이로 만들고 있는가.
그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거대한 예배당을 지어도 그 건물은 복음의 증거가 아니라 한국 교회의 탐욕과 과신을 보여주는 거대한 기념비가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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