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선교가 복음을 죽인 이유는?

목사가 결국 예수를 모욕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byFrancis Lee

복음은 어떻게 죽는가.

기독교를 공격하는 무신론자들 때문에 죽는가. 교회를 비판하는 세속슬롯 때문에 죽는가. 사람들이 더 이상 성경을 읽지 않기 때문에 죽는가.

어쩌면 정반대일지도 모른다.

복음은 복음을 전한다는 사람들이 복음과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갈 때 죽는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복음보다 커지는 순간 복음은 죽기 시작한다.

최근 페이스북에서 공유되고 있는 한 글의 제목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When the Messenger Destroys the Message.” 우리말로 옮기면 “메신저가 메시지를 파괴할 때”다. 게시물에는 Murry Evans라는 이름이 표시되어 있지만, 현재 확인되는 자료만으로는 이 글의 원저자까지 특정하기 어렵다. 동일한 글과 이미지가 여러 페이스북 계정과 그룹에서 공유되고 있으며, 검색 결과에서도 미국 복음주의의 선교 역사와 현재의 정치적 행태를 비판하는 동일한 문장이 반복적으로 확인된다. 따라서 Murry Evans는 최소한 해당 게시물의 게시·공유자이지 원저자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 글이 던지는 문제의식은 간단하지만 무섭다.

미국 복음주의는 오랫동안 선교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았다. 교회들은 선교대회를 열고 헌금을 모았으며 젊은이들에게 예수의 명령에 따라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고 가르쳤다. 미국의 기독교인들은 세계 곳곳에 선교사를 보냈고 학교와 병원을 세우고 성경을 번역하고 교회를 세우며 지역슬롯를 섬겼다.

그런데 그렇게 세계에 복음을 전하던 미국 복음주의가 어느 순간 자신의 신뢰성을 스스로 허물기 시작했다.

왜인가.

복음을 전하는 일보다 정치적 권력을 얻는 일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글은 바로 그 역설을 지적한다. 미국 복음주의가 세계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쌓아온 도덕적 자본을 정치적 영향력과 권력을 얻는 과정에서 소진해 버렸다는 것이다. 특히 트럼프 시대의 미국 복음주의는 이 모순을 극단적으로 드러냈다. “기독교적 언어로 트럼프의 잔혹함을 포장하면서 어떻게 세계에 기독교의 사랑을 말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 이 글이 던지는 질문이다.

이것은 단순히 미국 정치에 대한 진보 진영의 비판으로만 볼 문제가 아니다.

기독교가 무엇인가라는 훨씬 근본적인 질문이다.

기독교의 가장 큰 자산은 돈도 아니고 교인 숫자도 아니며 정치적 영향력도 아니다. 그것은 신뢰다.

사람들이 “저 사람들이 말하는 예수는 믿어볼 만하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복음은 힘을 얻는다.

반대로 사람들이 “저 사람들이 예수를 말하지만 실제로는 권력과 돈을 말하고 있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복음의 신뢰성은 무너진다.

복음은 교리로만 전달되는 것이 아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삶을 통해 전달된다.

그러므로 메신저가 메시지를 배반하면 메시지 역시 상처를 입는다.

이것이 미국 복음주의의 역설이다.

선교사를 세계 곳곳에 보내면서 사랑과 구원을 말했던 사람들이 정작 자신의 정치적 이해관계 앞에서는 사랑과 용서, 겸손과 약자에 대한 배려라는 기독교의 핵심 가치를 뒤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정치적 승리를 위해서는 누구와도 손을 잡고, 자신의 편이면 도덕적 결함도 눈감아주고, 상대방이면 악마화한다.

이 순간 기독교는 복음이 아니라 정치적 부족주의가 된다.

“우리 편인가, 저들의 편인가”가 “그리스도의 뜻에 맞는가”보다 중요한 기준이 된다.

그렇게 되면 정치인은 지도자가 아니라 구원자처럼 등장한다.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 정치적 동원조직처럼 변한다.

목사는 목자가 아니라 정치적 선동가가 된다.

그리고 신앙인은 신앙인이 아니라 특정 정치집단의 열성적인 지지자가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복음의 본질이 뒤집힌다.

예수는 권력을 얻기 위해 십자가를 진 것이 아니다.

그런데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권력을 얻으려 한다.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쳤다.

그런데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정치적 원수를 증오한다.

예수는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를 돌보라고 했다.

그런데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권력자와 부자의 편에 서서 약자를 공격한다.

예수는 섬기는 자가 되라고 했다.

그런데 교회는 영향력과 세력과 정치적 힘을 자랑한다.

이쯤 되면 사람들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저들이 믿는 예수는 누구인가?”

더 무서운 질문은 이것이다.

“저들이 전하는 예수와 성경 속 예수가 정말 같은 예수인가?”

바로 이것이 “메신저가 메시지를 파괴한다”는 말의 진짜 의미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복음과 반대되는 행동을 할 때 사람들은 복음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보면서 복음 자체를 판단하게 된다.

미국 복음주의의 문제는 그래서 트럼프라는 한 정치인에게만 바카라임을 돌릴 수 없다.

오히려 더 근본적인 질문을 해야 한다.

왜 복음주의자들은 자신의 신앙적 원칙과 충돌하는 정치 지도자에게 그렇게 강력한 정치적 충성을 보냈는가.

트럼프가 미국 복음주의를 타락시킨 것인가.

아니면 이미 권력에 매력을 느끼고 있던 복음주의가 트럼프라는 정치인을 만나 자신의 본색을 드러낸 것인가.

이 질문은 훨씬 불편하다.

하지만 반드시 물어야 한다.

그리고 이 문제는 한국 교회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오히려 우리는 미국 복음주의의 모습을 거울처럼 바라볼 필요가 있다.

한국 개신교 역시 한때 한국 슬롯의 근대화와 교육, 의료, 슬롯봉사에 상당한 역할을 했다. 교회는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세우며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았다. 기독교가 한국 슬롯에서 존경받았던 이유는 교회가 컸기 때문이 아니다.

교회가 슬롯에 무엇인가를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교회가 세상을 섬기는 것보다 세상을 움직이려 하기 시작했다.

슬롯적 약자를 돌보는 것보다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더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복음의 설득력보다 교회의 정치적 목소리를 키우는 데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기독교의 위신은 조금씩 무너졌다.

문제는 이들이 예수를 전했다는 데 있지 않다.

문제는 전도라는 이름으로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했다는 데 있다.

그리고 더 근본적인 문제는 자신들의 신앙적 확신을 타인의 자유보다 앞세웠다는 데 있다.

“내가 옳다.”

여기까지는 신앙의 문제일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옳으므로 당신도 따라야 한다.”

이 순간 신앙은 권력이 된다.

그리고 권력이 된 신앙은 더 이상 복음의 자유를 말할 수 없다.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기독교를 믿지 않을 자유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한다면, 그 기독교는 종교의 자유를 주장할 자격이 있는가.

기독교를 믿을 자유만 요구하고 기독교를 믿지 않을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종교의 자유가 아니라 종교적 특권을 요구하는 것에 가깝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에게 돌아가야 한다.

예수는 사람을 억지로 제자로 만들지 않았다.

예수를 따르지 않겠다는 사람을 붙잡아 강제로 데려오지도 않았다.

예수의 길은 강제의 길이 아니었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를 전한다는 사람들이 사람들에게 소리를 지르고, 공포를 주고, 정치적 적을 악마화하고, 자신의 종교적 권위를 이용해 상대방을 압박한다면 도대체 누구의 이름을 전하고 있는 것인가.

예수의 이름을 말하지만 예수의 방식은 버린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예수를 모욕하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날 한국 교회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를 “교인 수가 줄어드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진짜 위기는 교회가 슬롯적 신뢰를 잃어가는 것이다.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사람들이 교회의 말을 더 이상 믿지 않는 것이다.

목사가 사랑을 말해도 사랑을 믿지 않는다.

목사가 정의를 말해도 정의를 믿지 않는다.

목사가 겸손을 말해도 겸손을 믿지 않는다.

목사가 예수를 말해도 예수를 보지 못한다.

왜 그런가.

메신저가 메시지를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복음 선교가 복음을 죽이는 역설은 바로 여기에서 발생한다.

처음에는 예수를 전하기 위해 선교사를 보냈다.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세웠다.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고 문맹자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기독교가 무엇인지 삶으로 경험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선교가 숫자와 조직과 세력의 문제가 되었다.

몇 명을 교회로 데려왔는가.

얼마나 큰 교회를 만들었는가.

얼마나 많은 선교사를 보냈는가.

얼마나 많은 정치인을 움직일 수 있는가.

얼마나 큰 슬롯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가.

이것이 성공의 기준이 되었다.

그 순간 복음은 수단이 되고 교회가 목적이 된다.

예수는 수단이 되고 조직이 목적이 된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마저 우리의 성공을 정당화하는 이름으로 전락한다.

이것이 종교가 권력을 만났을 때 발생하는 가장 위험한 변질이다.

종교가 정치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죄는 아니다.

그리스도인 역시 시민이기 때문에 정치적 의견을 가질 수 있다.

문제는 정치적 승리가 신앙의 승리가 되는 순간이다.

우리 후보가 이기면 하나님이 승리한 것이고, 우리 정당이 패배하면 기독교가 박해받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정치와 종교의 경계가 무너진다.

그때부터 신앙은 진리를 찾는 일이 아니라 우리 편을 지키는 일이 된다.

그리고 교회는 복음의 공동체가 아니라 팬덤 공동체가 된다.

나는 이것이 오늘날 한국 개신교가 가장 경계해야 할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교회가 정치적 팬덤을 닮아가는 순간, 기독교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을 잃는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권력이 아니라 도덕적 신뢰이기 때문이다.

칼을 가진 사람보다 사랑을 가진 사람이 더 강할 때가 있다.

돈을 가진 사람보다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이 더 강할 때가 있다.

권력을 가진 사람보다 자신이 가진 권력을 내려놓을 수 있는 사람이 더 강할 때가 있다.

예수가 역사적으로 그렇게 강력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에게는 군대가 없었다.

정치권력이 없었다.

거대한 조직도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가 말한 사랑과 용서와 인간의 존엄을 믿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예수의 십자가보다 정치인의 깃발을 더 높이 든다면, 그것은 단순한 정치적 선택이 아니다.

복음의 우선순위를 바꾸는 일이다.

그래서 이제 한국 교회가 물어야 한다.

우리는 예수를 전하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 자신을 전하고 있는가.

우리는 복음을 선교하고 있는가.

아니면 교회의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가.

우리는 사람을 자유롭게 하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의 신념에 복종시키고 있는가.

우리는 세상을 섬기고 있는가.

아니면 세상을 지배하려 하고 있는가.

그리고 가장 뼈아픈 질문 하나를 던져야 한다.

사람들이 기독교를 싫어하게 된 것이 정말 예수 때문인가.

아니면 예수를 전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때문인가.

나는 후자의 바카라임이 훨씬 크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기독교가 다시 살아나려면 더 큰 교회를 지을 필요가 없다.

더 큰 목소리를 낼 필요도 없다.

더 많은 정치인을 만들 필요도 없다.

오히려 작아져야 한다.

권력을 내려놓아야 한다.

자신이 옳다는 확신을 조금 내려놓고 타인의 자유를 인정해야 한다.

믿지 않는 사람을 존중해야 한다.

자신과 정치적 의견이 다른 사람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가 살았던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

사람들에게 “예수를 믿으라”라고 소리치기 전에 “예수를 믿는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

복음은 말로 죽지 않는다.

복음은 복음을 말하는 사람의 삶에서 죽는다.

그리고 복음은 말로 다시 살아나지도 않는다.

복음을 살아내는 사람을 통해 다시 살아난다.

미국 복음주의가 세계에 선교사를 보내며 쌓아 올렸던 거대한 도덕적 자본이 정치적 권력을 좇는 과정에서 무너졌다는 이 글의 경고는 그래서 한국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목사가 예수를 전하면서 예수와 다른 삶을 살고 있다면, 사람들은 결국 목사의 말을 듣지 않고 목사의 삶을 본다.

그 순간 목사는 자신도 모르게 예수를 모욕하는 사람이 된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오늘날 기독교가 직면한 가장 비극적인 역설이다.

예수를 죽인 것은 십자가의 적들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예수의 이름을 가장 크게 외치는 사람들이 자신의 행동으로 예수의 얼굴을 가리고 있다.

복음의 가장 큰 적은 무신론자가 아닐지도 모른다.

복음을 말하면서 복음대로 살지 않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결국 교회가 회복해야 할 것은 선교의 열정이 아니라 복음의 신뢰성이다.

그리고 그 신뢰성은 강단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목사의 삶에서 만들어진다.

교인의 삶에서 만들어진다.

교회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에서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오늘 한국 교회에 가장 필요한 선교는 새로운 사람을 교회로 끌어들이는 선교가 아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이 교회를 바라보면서 다시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만드는 선교다.

“저 사람들이 믿는 예수라면, 나도 한번 알아보고 싶다.”

그때 비로소 메신저는 메시지를 가리지 않는다.

그때 비로소 교회는 예수를 모욕하는 집단이 아니라 예수를 보여주는 공동체가 된다.

복음 선교가 복음을 죽인 이유는 선교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 아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삶이 복음과 너무 멀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필요한 것은 더 큰 외침이 아니다.

더 진실한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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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오래 살면서 종교와 여행과 문화 탐방에 관심을 기울인 결과 지식으로 농사를 짓게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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