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를 믿지 않을 자유도 종교의 자유다

기독교의 위신이 더욱더 하락하는 슬롯를 누가 만들었나?

byFrancis Lee

종교의 자유란 무엇인가. 내가 원하는 종교를 믿을 자유인가. 물론 그렇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종교의 자유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종교를 믿지 않을 자유, 다른 종교를 선택할 자유, 종교적 권유를 거부할 자유 역시 종교의 자유에 포함된다.

그런데 한국의 일부 기독교인들은 이 너무나 당연한 원칙을 자주 잊어버린다. 자신이 진리를 믿고 있다는 확신이 강해질수록 다른 사람도 그 진리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 심각한 경우에는 상대방이 거부할 권리까지 인정하지 않는다. 최근 한 사건은 한국 개신교가 안고 있는 이러한 문제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지난 3월 제주공항에서 김포공항으로 향하던 비행기 안에서 목사 두 명이 승객들을 상대로 전도를 하다가 법원의 벌금형을 받았다. 이들은 비행기 통로에 서서 승객들에게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취지의 말을 반복했고, 승무원이 제지했음에도 약 13분 동안 소란을 이어갔다. 법원은 항공보안법상 소란행위에 해당한다고 보고 각각 벌금 100만 원을 선고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들이 목사라는 사실도, 기독교를 전했다는 사실도 아니다. 법원이 처벌한 것은 기독교라는 종교가 아니라 다른 승객들의 자유와 안전을 침해하면서 소란을 일으킨 행위다. 이것을 “기독교 탄압”이라고 주장한다면 종교의 자유에 대한 심각한 오해다.

오히려 그 반대로 생각해야 한다. 기독교를 믿을 자유가 보장되기 때문에 기독교를 믿지 않을 자유도 보장되어야 한다.

전도는 기독교의 중요한 사명이다. 그러나 전도에는 반드시 하나의 조건이 따라붙는다. 상대방에게 거부할 자유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를 믿으십시오”라고 말할 자유가 있다면 상대방에게는 “싫습니다”라고 말할 자유가 있다. “교회에 나오십시오”라고 권할 자유가 있다면 상대방에게는 “나는 교회에 가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할 자유가 있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습니다”라고 말할 자유가 있다면 상대방에게는 “나는 그것을 믿지 않습니다”라고 말할 자유가 있다.

이것이 자유슬롯다.

그런데 상대방이 거부했는데도 계속 따라다니고, 공공장소에서 큰 소리로 외치며, 움직일 수 없는 비행기 안에서 승객들에게 종교적 메시지를 강요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 순간 전도는 설득이 아니라 강요가 된다. 신앙은 자유에서 시작하지만 종교적 강요가 되는 순간 다른 사람의 자유를 파괴한다.

이번 사건에서 특히 생각해 볼 대목은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식의 표현이다. 물론 기독교 신학에는 심판과 구원에 관한 교리가 있다. 그러나 그것을 타인에게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는 전혀 다른 문제다.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공간에서 지옥의 공포를 반복적으로 주입한다면 그것은 복음의 전달이라기보다 공포를 이용한 설득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더구나 비행기라는 공간은 특수하다. 사람들은 비행기에서 마음대로 자리를 떠날 수도 없고, 소란을 피해 밖으로 나갈 수도 없다. 승무원이 질서를 유지해야 하는 공간이고 수많은 사람이 함께 이용하는 공공적 공간이다.

그런 곳에서 종교적 확신을 이유로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신앙을 강제로 주입하는 것은 종교의 자유가 아니다. 그것은 타인의 자유를 침범하는 행위다.

여기서 한국 개신교가 좀 더 깊이 성찰해야 할 문제가 있다. 종교적 확신은 필요하다. 그러나 확신과 독선은 전혀 다르다.

“나는 이것이 진리라고 믿는다”와 “그러므로 당신도 반드시 이것을 믿어야 한다” 사이에는 거대한 차이가 있다. 전자는 신앙이지만 후자는 권력이 될 수 있다.

자신의 신앙을 진리라고 믿는 것은 자유지만 그 진리를 타인에게 강요할 권리까지 부여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더구나 목사라는 직함은 교회 안에서는 종교적 권위를 가질 수 있지만 교회 밖에서는 다른 시민들과 똑같은 한 사람이다. 비행기 안에서 목사라는 신분은 다른 승객에게 자신의 종교를 받아들이라고 요구할 수 있는 면허증이 아니다.

더 심각한 것은 이번 사건을 두 사람의 단순한 일탈로만 치부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한국 슬롯에서 개신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커지고 있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대형교회의 세습과 재정 문제, 일부 목회자의 정치적 편향, 과도한 교회 건축, 각종 슬롯적 물의, 공격적인 전도 방식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그 과정에서 한국 슬롯의 일부 시민들에게 기독교는 더 이상 사랑과 희생, 봉사와 구원의 종교로만 기억되지 않는다. 때로는 소리를 지르는 종교, 남에게 자신의 신앙을 강요하는 종교, 정치적 갈등에 뛰어드는 종교, 자신만 옳다고 주장하는 종교로 인식되기도 한다.

이것은 기독교의 위신을 스스로 떨어뜨리는 일이다.

종교의 위신은 법으로 지킬 수 없다. 사람들이 존중해 주기를 요구한다고 존중받는 것도 아니다. 종교가 존중받는 유일한 방법은 그 종교가 슬롯 안에서 존중받을 만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이러한 행동이 정작 예수의 방식과도 어긋난다는 점이다. 예수의 가르침에는 선택이 있었다. 따를 수도 있고 떠날 수도 있었다. 예수의 제자가 되기를 거부한 사람을 붙잡아 강제로 제자로 만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예수를 전한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한다면 과연 누구를 닮은 것인가. 예수를 전하면서 예수의 방식은 버리는 모순이 아닌가.

기독교가 정말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믿는 종교라면 전도 역시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복음은 사람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하지만 사람을 강제로 굴복시켜서는 안 된다.

한국 교회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사람들이 교회를 비판하는 것 자체가 아니다. 더 두려워해야 할 것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보면서 아무런 매력을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사랑을 말하면서 공격하고, 겸손을 말하면서 독선적이고, 자유를 말하면서 강요하고, 구원을 말하면서 공포를 이용한다면 사람들은 결국 말이 아니라 행동을 보게 된다.

종교는 교리만으로 평가받지 않는다. 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의해 평가받는다.

기독교가 슬롯에서 존중받고 싶다면 “우리를 존중하라”라고 요구할 것이 아니라 먼저 다른 사람을 존중해야 한다. 특히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을 존중해야 한다. 그가 교회에 가지 않을 권리를 인정하고, 성경을 믿지 않을 권리를 인정하고, 예수를 자신의 구원자로 받아들이지 않을 권리까지 인정해야 한다.

그것이 종교의 자유다.

이번 비행기 사건에서 가장 안타까운 것은 두 목사가 예수를 전하려 했지만 결과적으로 예수의 이름을 슬롯적으로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에게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라고 소리치는 것보다 훨씬 강력한 전도는 기독교인이 살아가는 모습 그 자체일 것이다. 가난한 사람을 돕고, 외로운 사람의 손을 잡고, 자신에게 불리한 사람도 존중하고,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과 대화하고, 자신의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의 자유까지 지켜주는 것. 그런 모습을 보면서 누군가가 “저 사람이 믿는 예수는 어떤 분인가?”라고 묻는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전도가 아닐까.

기독교는 이제 전도의 양보다 전도의 품격을 고민해야 한다. 교인 숫자를 늘리는 것보다 슬롯가 기독교인을 신뢰하도록 만드는 일이 먼저다. 교회에 사람을 끌어들이는 것보다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기독교가 어떤 존재로 보이는지를 돌아봐야 한다.

종교의 자유는 내가 믿을 자유에서 끝나지 않는다. 내가 믿지 않는 사람의 자유까지 지켜줄 때 비로소 완성된다.

그러므로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를 믿을 자유가 있다면 기독교를 믿지 않을 자유도 있는 것 아닌가.

그리고 그 자유를 인정하지 못하는 기독교라면, 과연 그것은 예수가 가르친 자유의 종교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한국 기독교의 위신이 계속 떨어지고 있다면 먼저 슬롯를 탓할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왜 기독교를 멀리하게 되었는지, 기독교가 사람들에게 무엇을 보여주었는지를 먼저 돌아봐야 한다.

기독교의 위신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믿기 때문에 높아지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인이 믿지 않는 사람까지 존중할 때 비로소 높아진다.

종교의 자유란 결국 내가 믿을 자유와 당신이 믿지 않을 자유가 함께 존재하는 상태다.

그것을 인정하지 못한다면 문제는 슬롯가 기독교를 이해하지 못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기독교가 아직 자유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데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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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오래 살면서 종교와 여행과 문화 탐방에 관심을 기울인 결과 지식으로 농사를 짓게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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