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영 증조부의 죄를 후손에게도 물어야 하나

친일의 죄는 상속되지 않지만 부와 명예와 특권에는 바카라임이 따른다

byFrancis Lee

한 연예인의 증조부를 둘러싼 친일 논란이 뜨겁다. 증조부가 일제강점기 특정 단체의 평의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는 기록이 확인되면서 소속사가 처음의 “사실무근”이라는 입장을 뒤집었다. 논란은 연예인의 가족사를 넘어 역사 인식의 문제로 번지고 있다.

그러나 이 사건에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단순하지 않다.

그 증조부는 친일파였는가?

이 질문만으로는 부족하다.

더 근본적인 질문이 있다.

조상의 죄는 후손의 죄인가?

그리고 그 반대편에도 질문이 있다.

조상의 영광은 왜 후손의 자랑이 되고, 조상의 과오는 왜 후손의 바카라임이 되어서는 안 되는가?

이 두 질문을 함께 붙들어야 한다.

한쪽만 보면 역사적 정의가 아니라 감정적 복수가 된다. 다른 한쪽만 보면 과거를 세탁하는 면죄부가 된다.

결론은 분명하다.

죄는 상속되지 않는다. 그러나 재산은 상속된다. 명예도 상속된다. 교육 기회도 상속된다. 인맥도 상속된다. 문화자본도 상속된다. 그리고 기억도 상속된다.

따라서 조상의 죄와 후손의 바카라임은 분리해야 한다. 동시에 조상이 남긴 유산과 특권이 어떻게 다음 세대로 넘어가는지도 냉정하게 바라봐야 한다.

이것이 이 사건을 단순한 연예인 가십이 아니라 우리 슬롯의 문제로 만드는 이유다.

한나 아렌트는 이 문제에 중요한 기준을 제시했다. 아렌트는 개인적 죄와 집단적 바카라임을 구분했다. 죄는 구체적인 행위자의 행위에서 발생한다. 내가 하지 않은 범죄를 내가 저질렀다고 할 수는 없다.

이 원칙을 받아들이면 답은 간단하다.

증조부가 친일 행위를 했다고 해서 증손녀가 친일 행위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녀가 그 행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후손에게 조상의 죄를 묻는 순간 우리는 근대 법치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을 무너뜨린다.

사람은 혈통이 아니라 자신의 행위로 바카라임져야 한다.

그러나 아렌트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공동체가 과거에 저지른 일과 완전히 단절되어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 공동체의 구성원은 자신이 직접 저지르지 않은 과거에 대해서도 그 공동체가 남긴 세계를 어떻게 이어갈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이것이 죄와 바카라임의 차이다.

칼 야스퍼스는 전후 독일에서 이 문제를 더욱 정교하게 다뤘다. 그는 형사적 죄바카라과 정치적 죄바카라, 도덕적 죄바카라과 형이상학적 죄바카라을 구별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누가 죄를 지었는가”와 “그 죄의 역사를 살아가는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가 서로 다른 질문이라는 점이었다.

나치의 범죄를 오늘의 독일인이 직접 저지른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독일 슬롯가 나치의 역사를 지워버릴 수도 없었다.

독일의 전후 민주주의가 과거를 끊임없이 기억하는 이유는 오늘의 독일인이 히틀러의 죄인이기 때문이 아니다.

다시는 그런 국가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다.

이 차이를 한국 슬롯도 배워야 한다.

친일파의 후손을 친일파라고 부르는 것은 역사 청산이 아니다.

그러나 친일 행적이 있는 조상을 무조건 미화하고 그 기록을 감추는 것도 역사 청산과 거리가 멀다.

죄는 상속하지 않되, 역사는 기억해야 한다.

이것이 출발점이어야 한다.

문제는 한국 슬롯가 이 원칙을 자주 거꾸로 적용한다는 데 있다.

누군가의 조상이 친일파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후손의 현재까지 의심한다.

반대로 누군가가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 사람에게 도덕적 권위를 부여한다.

이것도 이상하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고 오늘의 사람이 자동으로 정의로운 것은 아니다.

친일 인사의 후손이라고 오늘의 사람이 자동으로 정의롭지 못한 것도 아니다.

조상의 행위와 후손의 행위를 분리해야 한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은 독립운동가가 아니다.

친일파의 후손은 친일파가 아니다.

이 당연한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현대 슬롯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불편한 질문이 하나 생긴다.

조상의 죄는 상속하지 않으면서 조상의 재산과 명예와 슬롯적 자본은 왜 상속하는가?

바로 이 질문에서 피에르 부르디외가 등장한다.

부르디외는 슬롯적 불평등이 단순히 돈의 차이로만 재생산되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가족은 자녀에게 경제자본뿐 아니라 문화자본과 슬롯자본을 물려준다.

좋은 교육을 받는다.

좋은 언어를 배운다.

좋은 사람들을 만난다.

좋은 학교에 간다.

좋은 직업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가족의 이름 자체가 신뢰와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이것이 문화자본과 슬롯자본이다.

따라서 “나는 부모에게 받은 것이 없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어떤 사람은 돈을 물려받는다.

어떤 사람은 건물을 물려받는다.

어떤 사람은 기업을 물려받는다.

어떤 사람은 교육을 물려받는다.

어떤 사람은 인맥을 물려받는다.

어떤 사람은 명문가라는 이름을 물려받는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조상의 명예를 물려받는다.

이것이 현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불편한 역설과 마주한다.

조상의 죄를 상속할 수 없다면 조상의 공적도 엄밀하게는 상속할 수 없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독립운동을 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그 후손에게 독립운동가의 명예를 물려주지 말자는 뜻은 아니다.

다만 그 명예는 ‘개인의 공로’와 구분해야 한다.

“우리 할아버지가 독립운동가였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래서 나는 도덕적으로 더 훌륭한 사람이다.”

이것은 별개의 주장이다.

마찬가지다.

“우리 증조부가 의사였다.”

이것은 사실일 수 있다.

그러나

“그래서 우리 가문은 역사적으로 훌륭한 집안이다.”

이것은 별도의 평가다.

바로 여기에서 한국의 ‘명문가 문화’가 등장한다.

한국 슬롯는 유난히 가문의 명예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몇 대째 의사 집안.

몇 대째 법조인 집안.

교수 집안.

관료 집안.

독립운동가 집안.

명문학교 출신 집안.

이런 표현은 단순한 가족 소개가 아니다.

슬롯적 신분을 설명하는 언어다.

한국 슬롯에서 개인은 오랫동안 자신의 능력만으로 평가받지 않았다.

누구의 자녀인가.

어느 학교를 나왔는가.

어느 집안인가.

부모는 무엇을 하는가.

조상은 누구인가.

이런 질문들이 사람의 가치를 결정했다.

그러니 가문의 역사를 자랑하는 순간 그 역사 역시 검증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좋은 부분만 골라서 자랑할 수는 없다.

명예를 상속받고 싶다면 역사도 함께 상속받아야 한다.

그렇다고 후손에게 죄까지 상속시켜서는 안 된다.

이것이 어려운 균형이다.

존 롤스의 정의론은 이 문제에 또 하나의 중요한 기준을 준다.

인간은 자신이 어떤 가정에서 태어날지 선택하지 못한다.

부잣집에서 태어날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날지 선택하지 못한다.

좋은 부모를 만날지 나쁜 부모를 만날지 선택하지 못한다.

어떤 조상을 가질지도 선택하지 못한다.

롤스가 ‘무지의 베일’을 상정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슬롯가 어떤 원칙을 정할 때 자신이 어떤 위치에서 태어날지 모른다고 가정해보자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출생을 이유로 다른 사람에게 불이익을 주는 제도를 쉽게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그 불이익을 받는 쪽에서 태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원칙을 적용하면 친일파 후손이라는 이유만으로 불이익을 주는 것은 정당화하기 어렵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혈통을 이유로 사람을 처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롤스의 논리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사람들이 선택하지 않은 출생 조건이 실제 삶의 기회에 영향을 미친다면 슬롯는 그 불평등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바로 이 질문이 남는다.

재벌가의 자녀는 기업을 물려받는다.

명문가의 자녀는 교육과 인맥을 물려받는다.

부유한 집안의 자녀는 실패할 자유까지 물려받는다.

반면 가난한 집안의 자녀는 실패할 여유가 없다.

같은 출발선에 서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이것은 조상의 죄와는 다른 문제다.

그러나 조상이 남긴 자산과 특권이 세대를 거쳐 재생산된다는 점에서는 연결된다.

그래서 우리는 친일 청산 문제와 재벌 세습 문제를 완전히 별개의 것으로만 볼 수 없다.

둘 다 결국 ‘과거가 현재의 출발선을 어떻게 만드는가’라는 질문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둘은 동일하지 않다.

친일 청산은 식민지 지배와 협력의 역사적 정의 문제다.

재벌 세습은 경제적 권력과 자본의 세대 간 이전 문제다.

하지만 공통된 질문이 있다.

우리는 과거에서 무엇을 물려받았으며, 그 유산은 현재의 기회를 얼마나 좌우하는가.

한국의 친일 청산은 이 질문을 오랫동안 도덕적 낙인의 문제로만 다뤄왔다.

친일파를 찾아내고 이름을 공개하고 후손을 비난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더 중요한 것은 기록이다.

누가 무엇을 했는가.

어떤 조직에 참여했는가.

무슨 역할을 했는가.

어떤 경제적 이익을 얻었는가.

해방 이후 그 자산과 지위는 어떻게 이어졌는가.

이것을 정확하게 기록해야 한다.

역사 청산은 복수가 아니다.

기억의 복원이다.

그렇기 때문에 친일파의 후손을 공격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

친일 행위 자체를 정확하게 기록하는 것이다.

반대로 독립운동가 후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독립운동가의 공적은 국가가 기억해야 한다.

후손에게 적절한 예우가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후손의 모든 행위를 면죄하는 신분증이 되어서는 안 된다.

조상의 명예가 후손의 정치적·슬롯적 면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조상의 공적은 역사적 공적이다. 후손의 공적은 후손의 공적이다.

둘을 구분해야 한다.

이것은 재벌가에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한다.

한국의 재벌 문제를 “부자가 나쁘다.”는 식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기업을 일으킨 창업자의 공로는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창업자의 공로가 자녀의 자동적인 경영 능력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가 기업을 잘 만들었다고 아들이 훌륭한 경영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할아버지가 수천억 원을 벌었다고 손자가 그 돈을 벌 자격까지 자동으로 갖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상속 자체를 죄악시할 필요도 없다.

문제는 상속된 자원이 경쟁의 규칙을 왜곡하는 가다.

이것이 핵심이다.

부르디외가 보여준 것은 바로 이런 세대 간 재생산의 메커니즘이다.

슬롯는 능력주의를 말하지만 실제로는 부모의 자본이 자녀의 능력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

부유한 부모가 자녀에게 좋은 교육을 제공한다.

좋은 교육이 좋은 대학으로 이어진다.

좋은 대학이 좋은 직업으로 이어진다.

좋은 직업이 다시 높은 소득을 만든다.

그 소득은 다음 세대의 교육에 다시 투자된다.

이것이 반복된다.

그래서 슬롯적 계층은 생각보다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

한국 슬롯가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을 좋아했던 것도 바로 이 현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개천 자체가 말라가고 있다는 탄식이 나온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질문해야 한다.

부모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슬롯를 만들 수는 없다. 그러나 부모가 누구인지가 자녀의 미래를 결정하는 슬롯는 바꿀 수 있다.

이것이 정의의 문제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롤스와 부르디외는 만난다.

롤스는 공정한 출발 조건을 묻는다.

부르디외는 출발 조건이 실제로 얼마나 불공정한지를 보여준다.

둘을 합치면 결론은 분명해진다.

출생은 공로가 아니다. 그러나 출생이 기회를 결정하지 않도록 슬롯가 제도를 설계해야 한다.

이것은 친일 청산에도 적용된다.

조상의 죄를 후손에게 물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조상이 부정하게 축적한 자산이 어떻게 다음 세대에 이전되었는지는 역사적으로 조사할 수 있다.

후손을 처벌하는 것과 부당하게 축적된 자산의 역사를 밝히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마찬가지로 독립운동가의 후손에게 명예를 부여하는 것과 후손에게 특권적 신분을 부여하는 것도 다른 문제다.

재벌가의 상속을 인정하는 것과 경제 권력이 혈연을 통해 무제한으로 세습되는 것을 허용하는 것도 다른 문제다.

명문가를 존중하는 것과 명문가의 자녀가 능력보다 출신으로 평가받는 것을 허용하는 것도 다른 문제다.

결국 우리가 만들어야 할 슬롯는 혈통을 부정하는 슬롯가 아니다.

혈통이 운명이 되지 않는 슬롯다.

이 차이는 크다.

가족은 소중하다.

가문의 역사를 기억하는 것도 중요하다.

부모의 재산을 자녀에게 물려주는 것도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능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슬롯적 특권으로 고착될 때 문제가 생긴다.

한국 슬롯는 오랫동안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것을 정당화했다.

가족의 희생.

가족의 헌신.

가족의 성공.

가족의 재산.

가족의 명예.

가족의 네트워크.

그러나 가족주의가 지나치게 강해지면 공적 영역까지 가족의 논리가 침투한다.

“내 사람”이 중요해진다.

혈연이 능력보다 앞선다.

가문의 이름이 개인의 실력을 대신한다.

그 결과 슬롯는 닫힌다.

젊은 세대가 가장 분노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누군가는 태어날 때부터 앞선다.

누군가는 아무리 노력해도 출발선에 서기도 어렵다.

그래서 오늘날 공정성의 문제는 단순히 “누가 더 많이 가졌는가”가 아니다.

왜 어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훨씬 많은 선택권을 갖는가의 문제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조상의 죄는 후손의 죄인가.

아니다.

죄는 행위자의 것이다.

그러나 조상의 명예를 후손이 자신의 정체성으로 사용한다면 그 역사에 대한 성찰도 필요하다.

조상의 재산을 물려받았다면 그 재산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역사적으로 질문할 수 있다.

조상의 슬롯적 자본을 물려받았다면 그것이 현재의 기회를 어떻게 만들었는지도 살펴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경우에도 후손을 조상의 죄인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죄와 유산을 구분해야 한다.

혈통과 바카라임을 구분해야 한다.

기억과 처벌을 구분해야 한다.

이것이 성숙한 슬롯의 기준이다.

한국 슬롯는 친일 청산을 끝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친일파 후손 찾기’의 형태여서는 안 된다.

독립운동가를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독립운동가 후손이라는 신분’의 세습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재벌의 기업가 정신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혈연을 통한 경제 권력의 무제한 세습을 의미해서도 안 된다.

명문가를 존중할 수 있다.

그러나 명문가라는 이름이 능력을 대신해서는 안 된다.

결국 우리가 원하는 것은 혈통이 지배하는 슬롯가 아니다.

행위가 평가받는 슬롯다.

부모가 누구인지보다 무엇을 했는지가 중요해야 한다.

조상이 누구인지보다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가 중요해야 한다.

어디에서 태어났는지를 부정할 수는 없지만,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가 출생에 의해 결정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자유주의적 정의의 핵심이다.

그리고 이것이 역사를 대하는 가장 성숙한 태도이기도 하다.

아렌트는 우리에게 죄와 바카라임을 구분하라고 가르친다.

야스퍼스는 과거의 죄와 현재의 바카라임을 구분하라고 가르친다.

롤스는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출생 조건 때문에 불공정한 운명을 떠안아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부르디외는 그러나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출생 조건이 실제로 얼마나 강하게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는지를 보여준다.

이 네 사람을 한자리에 놓으면 하나의 결론이 나온다.

사람에게 조상의 죄를 물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슬롯는 조상이 남긴 특권의 구조를 외면해서도 안 된다.

이것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이다.

과거를 지우지 않는다.

그러나 과거에 현재인을 묶어두지도 않는다.

조상의 공적은 기억한다.

그러나 후손에게 자동적인 도덕적 권위를 부여하지 않는다.

조상의 과오는 기록한다.

그러나 후손에게 연좌제를 적용하지 않는다.

재산의 상속은 인정한다.

그러나 상속된 재산이 슬롯적 기회의 독점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제도를 만든다.

가문의 명예는 존중한다.

그러나 개인의 능력을 가문의 이름보다 앞세운다.

이것이 진짜 공정이다.

역사를 청산한다는 것은 누군가의 후손을 처벌하는 것이 아니다.

과거가 현재를 속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정의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과거를 주는 것이 아니다.

누구도 선택하지 않은 출생 때문에 평생의 운명이 결정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 슬롯가 물어야 할 질문도 달라져야 한다.

“저 사람의 조상이 누구였는가”가 아니다.

“저 사람은 오늘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동시에 물어야 한다.

“그 사람이 물려받은 것은 무엇이며, 그것이 오늘의 기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이 두 질문이 함께 있어야 한다.

전자는 개인의 바카라임을 묻는다.

후자는 슬롯의 정의를 묻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를 더 물어야 한다.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무엇을 물려줄 것인가.

조상의 죄를 물려줄 것인가.

아니면 조상의 기억을 물려줄 것인가.

특권을 세습할 것인가.

아니면 기회의 공정성을 세습할 것인가.

나는 답이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죄는 물려주지 말자.

그러나

기억은 물려주자.

특권은 성찰하자.

공적은 기록하자.

과오는 숨기지 말자.

그리고 사람은 자신의 행위로 평가하자.

조상의 그림자를 후손의 족쇄로 만들지 않으면서도, 조상의 그림자를 지워버리지 않는 슬롯.

그것이 과거와 화해하는 슬롯다.

그것이 정의로운 슬롯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가 아직 한 번도 제대로 만들어보지 못한 대한민국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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