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의 시대가 끝나면 교회도 다시 태어나야 한다
한국교회의 위기를 말할 때 우리는 대개 숫자부터 꺼낸다. 교인 수가 줄었다. 주일학교가 사라지고 있다. 청년들이 교회를 떠난다. 목회자 수급이 어려워지고 있다. 헌금이 감소하고 있다. 지방교회가 무너지고 있다. 대형교회조차 성장률이 둔화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한국교회의 현재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진짜 위기는 교인 몇 명이 줄어드는 데 있지 않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성장하는 슬롯를 전제로 만들어진 한국교회의 조직과 문화가 이제 축소되는 슬롯와 충돌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교회는 오랫동안 성장이라는 하나의 문법으로 자신을 설명해 왔다. 더 많은 교인, 더 큰 예배당, 더 많은 프로그램, 더 많은 헌금, 더 많은 교역자, 더 넓은 주차장, 더 큰 교육관. 성장은 곧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해되었고, 숫자는 부흥의 가장 눈에 보이는 증거가 되었다.
그런데 이제 성장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
인구는 줄고 있다. 가구는 작아지고 있다. 청년층은 감소하고 있다. 종교적 권위는 약해지고 있다. 가족과 지역공동체는 해체되고 있다. 사람들의 삶은 온라인 게임과 학교, 온라인과 오프라인, 취미와 인간관계로 파편화되고 있다.
이 변화는 단순한 교인 감소가 아니다.
교회가 존재하던 슬롯적 조건 자체가 바뀌고 있는 것이다.
이 지점을 이해하려면 한국교회의 역사를 교회 내부의 문제로만 볼 것이 아니라 근대슬롯 전체의 흐름 속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막스 베버에서 시작해 보자.
베버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보여준 것은 종교가 단순히 개인의 내면적 신앙에 머무르지 않고 근대인의 생활양식과 경제적 행동을 형성했다는 사실이다. 근면, 절제, 자기통제, 바카라임, 직업에 대한 소명 의식은 근대 자본주의의 정신과 결합했다.
한국 개신교 역시 이 과정에서 상당한 역할을 했다.
한국교회는 근대화 과정에서 교육과 의료, 문해와 계몽, 근면과 자립, 가족과 공동체의 가치를 확산시키는 중요한 슬롯적 기관이었다. 특히 전쟁 이후 산업화와 도시화가 급속하게 진행되던 시기에 교회는 농촌에서 도시로 이동한 사람들에게 새로운 공동체를 제공했다.
고향을 떠나 서울과 부산, 대구와 인천으로 올라온 사람들에게 교회는 단순히 예배를 드리는 장소가 아니었다.
사람을 소개받는 곳이었고, 친구를 만나는 곳이었으며, 결혼 상대를 만나는 곳이었고, 일자리를 얻는 통로이기도 했다. 아이를 키우는 공동체였으며, 외로움을 견디는 슬롯적 안전망이기도 했다.
교회는 개인의 신앙을 넘어 하나의 생활세계였다.
바로 이 지점에서 알렉시스 드 토크빌의 통찰이 중요해진다.
토크빌은 민주주의 슬롯에서 자발적 결사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민주주의는 국가와 개인만으로 유지될 수 없다. 사람들이 스스로 결사하고 서로 협력하는 중간조직이 있어야 한다. 시민들은 결사체를 통해 타인과 협력하는 법을 배우고, 공동의 문제를 해결하며, 개인주의의 폐해를 극복한다.
한국교회가 성장하던 시대에 교회는 바로 이런 결사체의 역할을 상당 부분 수행했다.
교회는 국가도 아니었고 가족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단순한 사적 모임도 아니었다. 가족과 국가 사이에서 사람들을 연결하는 중간 공동체였다.
여기서 로버트 퍼트넘의 슬롯적 자본론이 연결된다.
퍼트넘은 신뢰, 네트워크, 상호호혜성 같은 관계의 자산을 슬롯적 자본이라고 보았다. 슬롯적 자본이 풍부한 슬롯에서는 사람들이 서로 협력하고 공동의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이 높다.
한국교회가 성장했던 시기는 동시에 슬롯적 관계가 강했던 시대이기도 했다.
교회 안에서 사람들은 서로의 이름을 알았다. 아이의 이름을 알았고, 부모의 이름을 알았다. 누군가 병원에 입원하면 찾아갔고, 장례가 나면 함께 울었다. 실직한 사람이 있으면 일자리를 알아봐 주었다. 새로운 사람이 이사 오면 공동체가 그를 받아들였다.
교회의 가장 큰 자산은 사실 예배당이 아니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축적된 신뢰였다.
그런데 지금 이 슬롯적 자본의 구조가 흔들리고 있다.
가족은 작아지고, 이웃은 사라지고, 지역슬롯는 약해지고, 온라인 게임은 더 이상 평생온라인 게임이 아니다. 사람들은 온라인에서 수많은 사람과 연결되어 있지만 정작 자신의 어려움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은 줄어든다.
현대인은 연결되어 있지만 고립되어 있다.
그리고 이 변화는 교회에도 그대로 들어왔다.
과거의 교회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가는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람을 만나기 위해 교회에 갈 필요가 없어졌다. SNS와 유튜브, 온라인 커뮤니티와 각종 플랫폼이 인간관계의 새로운 통로가 되었다.
교회가 독점하던 슬롯적 기능이 분산된 것이다.
여기에 결정적인 변화가 하나 더 찾아왔다.
인구감소다.
성장하는 슬롯에서는 조직의 비효율이 쉽게 감춰진다. 교인이 늘어나면 새로운 건물을 지을 수 있고, 헌금이 늘어나면 인력을 늘릴 수 있다. 프로그램이 많아도 감당할 수 있다. 건물이 크더라도 채울 사람이 계속 들어오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축소슬롯에서는 모든 것이 달라진다.
교인 1,000명이 800명으로 줄어드는 순간 문제가 시작된다. 예배당은 그대로인데 사람은 줄어든다. 교육관은 그대로인데 아이는 줄어든다. 교역자 수는 그대로인데 헌금은 감소한다. 관리비와 냉난방비는 그대로인데 교인 수는 줄어든다.
성장기에 장점이었던 규모가 축소기에 부채가 된다.
성장의 자산이 축소의 비용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이것은 한국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다.
경제 전체가 비슷한 변화를 겪고 있다.
인구가 증가하고 소비가 늘어나는 시대에는 대량생산과 대형화가 효율적이다. 하지만 인구가 감소하고 수요가 줄어드는 시대에는 거대한 조직의 고정비용이 오히려 경쟁력을 갉아먹는다.
이때 슘페터의 ‘창조적 파괴’가 등장한다.
슘페터에게 경제발전은 기존 질서가 영원히 유지되는 과정이 아니었다.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기업, 새로운 생산방식이 기존 질서를 무너뜨리면서 발전은 이루어진다. 중요한 것은 단순한 파괴가 아니다.
낡은 구조가 사라지는 동시에 새로운 구조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한국교회에도 이 논리가 적용될 가능성이 있다.
앞으로 교회 수가 줄어들 수 있다. 건물이 매각될 수도 있다. 교단의 규모가 축소될 수도 있다. 일부 신학교가 문을 닫을 수도 있다. 대형교회의 성장도 멈출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곧바로 기독교의 소멸이라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어쩌면 우리가 목격하게 될 것은 한국교회의 ‘소멸’이 아니라 교회 형태의 창조적 파괴일 수 있다.
문제는 무엇이 사라지는가가 아니다.
무엇이 그 자리를 대신할 것인가다.
여기에서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기대’라는 개념이 중요해진다.
경제에서 투자는 현재의 숫자만 보고 이루어지지 않는다. 미래에 대한 기대가 중요하다. 미래가 좋아질 것이라고 믿으면 사람들은 투자한다. 미래가 나빠질 것이라고 생각하면 지갑을 닫는다.
조직도 마찬가지다.
한국교회는 오랫동안 하나의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다음 세대에는 더 많은 사람이 교회에 올 것이다.”
그래서 건물을 지었다. 교육관을 만들었다. 교역자를 채용했다.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선교 예산을 늘렸다.
그러나 이제 이 기대가 흔들리고 있다.
아이들이 줄어들고 있다.
청년들이 줄어들고 있다.
결혼과 출산이 감소하고 있다.
종교를 선택하지 않는 세대가 늘어나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통계가 아니다.
미래에 대한 기대의 붕괴다.
그리고 기대가 무너지면 조직은 과거의 규모를 유지할 수 없다.
교회의 문제는 그래서 헌금이 줄었다는 것이 아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성장할 것이라는 기대’를 전제로 만든 교회의 구조가 더 이상 미래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한국교회의 대형화 모델을 다시 보아야 한다.
한국교회의 대형화는 산업화와 도시화라는 시대적 조건과 정확하게 맞물려 있었다.
농촌 인구가 도시로 이동했고, 핵가족이 형성됐으며, 아파트가 들어섰고, 도시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사람이 몰리는 곳에 교회가 생겼다.
교회가 성장했다.
교인이 늘었다.
건물을 확장했다.
더 많은 사람을 수용했다.
이것은 당시에는 합리적인 모델이었다.
문제는 시대가 바뀌었는데 모델은 그대로라는 것이다.
성장기에는 교회가 커질수록 효율적일 수 있었다. 전문 목회자를 고용하고, 교육부서를 세분화하고, 찬양팀과 미디어팀을 만들고, 각종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축소슬롯에서는 이런 전문화와 대형화가 오히려 부담이 될 수 있다.
작은 교회가 대형교회를 흉내 내면 어떻게 되는가.
작은 예산으로 대형교회의 프로그램을 유지하려고 한다.
작은 인력으로 대형교회의 조직을 유지하려 한다.
작은 교인 수로 대형교회의 시설을 유지한다.
결국 교회는 지친다.
그리고 어느 순간 교회는 본질을 잃는다.
작은 교회가 대형교회의 축소판이 되는 순간, 작은 교회는 자신의 가장 큰 자산을 잃는다.
작은 교회의 경쟁력은 시설이 아니다.
관계다.
사람이다.
지역이다.
신뢰다.
한 사람을 깊이 아는 능력이다.
한 가정을 끝까지 바카라임지는 능력이다.
한 청년의 삶이 무너질 때 곁에 있어주는 능력이다.
이것은 대형교회가 구조적으로 하기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앞으로의 교회 경쟁은 대형교회와 작은 교회의 경쟁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소비를 제공하는 교회와 삶을 변화시키는 교회의 경쟁이 될 것이다.
여기서 ‘선택교회’라는 새로운 개념이 등장한다.
과거의 교인은 가까운 교회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집에서 가까운 교회, 가족이 다니던 교회, 온라인 게임 주변의 교회가 자연스럽게 선택되었다.
그러나 이제 사람들은 비교한다.
설교를 비교한다.
신학을 비교한다.
목회자의 리더십을 비교한다.
자녀교육을 비교한다.
공동체를 비교한다.
교회의 슬롯적 신뢰를 비교한다.
교회의 온라인 콘텐츠까지 비교한다.
지역에 있기 때문에 선택받는 ‘배정교회’의 시대가 약해지고, 자신이 신뢰할 수 있기 때문에 선택받는 ‘선택교회’의 시대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중요한 함정이 있다.
교회를 소비재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교회가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종교 플랫폼이 되는 순간, 성도는 고객이 되고 목회자는 서비스 제공자가 된다.
그러면 성도는 마음에 들지 않으면 떠나고, 교회는 사람을 붙잡기 위해 끊임없이 프로그램을 생산해야 한다.
결국 교회가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은 교인 감소가 아니라 교회 소비주의다.
따라서 선택교회는 단순히 ‘선택받는 교회’를 의미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선택한 사람이 바카라임 있게 소속되는 교회’**여야 한다.
교회를 고르는 자유와 공동체를 바카라임지는 의무가 함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는 시장에서 브랜드를 비교하는 소비자들의 집합이 될 뿐이다.
이 점에서 앞으로의 교회는 토크빌과 퍼트넘이 말했던 결사체와 슬롯적 자본의 기능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
교회는 사람을 모으는 곳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곳이어야 한다.
예배를 드리는 곳인 동시에 서로의 삶을 바카라임지는 곳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바카라임은 주일에 끝나서는 안 된다.
한국교회의 다음 단계는 주일예배 중심의 교회에서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삶을 살아내는 교회로의 전환이어야 한다.
목회자가 성도의 신앙을 대신 수행하는 시대는 끝나고 있다.
목회자는 성도를 예배당에 붙잡아 놓는 사람이 아니라, 성도가 세상 속에서 자신의 신앙을 살아낼 수 있도록 세우는 사람이어야 한다.
성도 역시 교회가 제공하는 종교 서비스를 소비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온라인 게임과 가정과 지역슬롯에서 복음을 살아내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교회는 다시 세상 속으로 흩어진다.
교회가 커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영향력이 삶 속으로 퍼지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교회가 다시 토크빌적 결사체가 되고, 퍼트넘이 말한 슬롯적 자본을 회복하는 길일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한국교회의 미래를 다시 생각할 수 있다.
앞으로 한국교회는 전체적으로 축소될 가능성이 높다.
교회 숫자도 줄어들 것이다.
교인 숫자도 줄어들 것이다.
건물도 줄어들 것이다.
목회자도 줄어들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모든 것이 나빠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거품이 빠지는 과정에서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이 구분될 수 있다.
성장기에 가능했던 사치가 축소기에 제거될 수 있다.
형식적인 프로그램이 사라질 수 있다.
교회 간판만 유지하기 위한 조직이 사라질 수 있다.
반대로 실제로 사람을 변화시키는 공동체는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다.
한 사람을 전도하고,
한 사람을 제자로 만들고,
한 가정을 회복시키고,
한 청년을 다시 일으키고,
한 지역의 어려운 사람을 돌보는 교회는 숫자가 작아도 존재 이유가 분명하다.
이런 교회는 대형교회가 아니어도 된다.
오히려 작기 때문에 더 강할 수 있다.
그래서 앞으로의 한국교회를 ‘성장교회’와 ‘쇠퇴교회’로 구분해서는 안 된다.
더 중요한 구분은 **‘소비를 제공하는 교회’와 ‘사람을 변화시키는 교회’**다.
그리고 여기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 하나 남는다.
교회는 살아남기 위해 존재하는가.
그렇지 않다.
교회는 교회를 보존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는 복음을 증언하고, 사람을 변화시키며, 공동체를 세우고, 세상 속에서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서다.
따라서 어떤 교회가 문을 닫는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교회의 실패라고 말할 수 없다.
반대로 어떤 교회가 1만 명을 모았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교회의 성공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숫자가 교회의 생명을 완전히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한국교회가 지금 맞이하고 있는 것은 ‘교회의 죽음’이 아니라 교회에 대한 오래된 상상력의 죽음인지도 모른다.
큰 교회가 좋은 교회라는 생각.
많은 교인이 부흥이라는 생각.
큰 건물이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생각.
많은 프로그램이 목회의 성공이라는 생각.
유명한 목회자가 교회의 경쟁력이라는 생각.
이 모든 것이 성장시대에는 일정한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축소시대에는 더 이상 충분하지 않다.
한국교회는 이제 새로운 질문을 해야 한다.
“얼마나 커질 것인가?”가 아니라 “왜 존재하는가?”
“몇 명을 모을 것인가?”가 아니라 “몇 명의 삶을 변화시킬 것인가?”
“얼마나 많은 건물을 유지할 것인가?”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살아내게 할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교회는 아무리 큰 건물을 가지고 있어도 축소시대의 파도에 휩쓸릴 것이다.
반대로 작은 교회라도 자신의 존재 이유가 분명하다면 살아남을 수 있다.
아니, 살아남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을 할 수 있다.
새로운 교회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이것이 슘페터가 말한 창조적 파괴의 교회적 의미일 것이다.
무너지는 것은 반드시 신앙이 아니다.
때로는 낡은 구조가 무너지는 것이다.
사라지는 것은 반드시 복음이 아니다.
때로는 복음을 담았던 오래된 조직의 형태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공동체가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한국교회는 소멸하는가.
아마도 그렇다.
일부 교회는 소멸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교회 전체가 소멸한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하다.
더 정확한 표현은 이렇다.
한국교회는 소멸하면서 재편될 것이다.
성장시대의 교회는 줄어들고, 축소시대에 맞는 교회가 나타날 것이다.
지역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선택받던 교회는 약해지고, 신뢰받는 교회가 선택받을 것이다.
프로그램을 소비하는 성도는 줄어들고, 자신의 삶으로 신앙을 살아내는 제자가 요구될 것이다.
대형화된 조직은 축소되고, 작은 공동체의 밀도는 높아질 수 있다.
그리고 교회가 제공하던 슬롯적 자본이 사라지는 자리를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가 다시 채울 가능성도 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교회의 규모를 무조건 지키는 일이 아니다.
교회의 본질을 지키면서 교회의 형태를 과감하게 버릴 수 있는 용기다.
특히 앞으로 개척을 준비하는 목회자라면 더 냉정해야 한다.
과거 중·대형 전통교회에서 부목사로 일했던 경험만으로는 미래의 교회를 만들 수 없다.
대형교회의 시스템을 작은 교회에 복제하는 것만으로는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없다.
돈도 필요하고 건물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목회자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아는 것이다.
자신이 왜 목회를 하는지 알아야 한다.
무엇을 포기할 수 있는지 알아야 한다.
어떤 사람을 끝까지 품을 수 있는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프로그램이 아니라 복음으로 한 사람을 살리고, 그 한 사람을 다시 제자로 세울 수 있어야 한다.
개척교회의 가장 중요한 자산은 건물이 아니다.
개척멤버의 숫자도 아니다.
프로그램도 아니다.
목회자의 존재 자체가 복음의 신뢰성을 보여주는가 하는 문제다.
한 사람을 만나고,
한 사람을 사랑하고,
한 사람을 변화시키고,
그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변화시키는 것.
어쩌면 교회의 역사는 다시 그 가장 작은 단위에서 시작될 수 있다.
한국교회가 앞으로 맞이할 시대는 대형화의 시대가 아니다.
선택과 집중의 시대다.
그러나 그것은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선택과 집중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교회의 본질에 대한 선택과 집중이다.
무엇을 버릴 것인가.
무엇을 남길 것인가.
무엇을 다시 시작할 것인가.
한국교회의 미래는 이 질문에 달려 있다.
베버가 보여준 근대적 소명은 한국교회의 성장과 산업화를 뒷받침했다.
토크빌이 말한 결사체는 교회를 공동체의 중심으로 만들었다.
퍼트넘의 슬롯적 자본은 그 공동체가 축적한 신뢰의 힘을 설명한다.
그러나 인구감소와 축소경제는 그 성장모델의 기반을 흔들고 있다.
케인스가 말한 기대가 바뀌면서 교회 역시 미래를 다시 계산해야 한다.
그리고 슘페터가 말한 창조적 파괴가 시작된다.
이 과정에서 어떤 교회는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그 자리에 새로운 교회가 나타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질문은 “한국교회가 몇 개나 살아남을 것인가”가 아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한국교회는 무엇을 남길 것인가.”
건물을 남길 것인가.
조직을 남길 것인가.
브랜드를 남길 것인가.
아니면 사람을 남길 것인가.
신앙을 남길 것인가.
공동체를 남길 것인가.
그리고 복음으로 변화된 한 사람을 남길 것인가.
어쩌면 한국교회의 새로운 부흥은 더 이상 숫자로 측정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더 작은 교회가,
더 적은 사람을 모으지만,
더 깊은 신앙을 만들고,
더 많은 사람의 삶을 변화시키고,
더 강한 공동체를 만들고,
더 넓은 세상으로 사람을 파송하는 것.
그것이 축소시대의 새로운 부흥일 수 있다.
교회가 작아지는 것이 반드시 교회의 실패는 아니다.
오히려 작은 교회가 자신의 본질을 회복하는 순간, 한국교회는 비로소 성장시대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한국교회의 미래는 ‘더 크게’가 아니라 **‘더 깊게’**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 한국교회가 맞이하고 있는 것은 끝이 아니라, 너무 오래 미뤄두었던 질문의 시작인지도 모른다.
교회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이 질문에 제대로 답하는 교회만이 축소시대 이후에도 살아남을 것이다.
아니, 살아남는 것을 넘어 새로운 시대를 열 것이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