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답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너무 많은 말을 듣는다

사로트, 뒤라스, 베르네임이 보여주는 말하지 않은 것들의 잔인함

대화는 언어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말에는 속도가 있고, 높낮이가 있고, 무엇보다 말과 말 사이의 공백과 침묵이 있다.


'그래'라는 대답도 너무 빨리 돌아오면 성의 없이 떼어낸 것 같고, 너무 늦게 오면 한참을 망설이다 마지못해 내놓은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글자는 똑같은데, 그 중간의 침묵이 전혀 다른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이 대화이다.


우리는 단어로 의미를 전달한다고 믿지만, 사실은 그 단어 사이에 놓인 공백을 더 신경 써서 읽고 있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 빈 시간에는 믿을 만한 사전은 없다는 것이다.


끊긴 답장도, 평소보다 길어진 침묵도, 무슨 뜻인지 정확히 일러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매번 공백의 의미를 해석해 낸다. 아이러니하게도 의미를 유추할 수 있는 정보가 적을수록 더 많은 것을 해석해 내게 된다.


*


"좋네…, 그거."


오랜 세월 가까웠던 두 친구가 멀어진 이유는 이 한마디였다. 더 정확히 말하면, '좋네'에 얹힌 강세와 '그거'라는 단어 앞에 한 박자 늘어진 침묵이 있었다.


나탈리 사로트의 희곡 『아무것도 아닌 일로』는 한동안 연락이 뜸했던 친구를 찾아오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친구A는 오랜만에 친구B를 찾아와 요즘 왜 자신에게서 멀어졌느냐고 물었다. 내가 뭘 잘못했느냐고, 우리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그 질문을 듣고 있던 친구B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실제로 아무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말할 수 있을 만큼 분명한 사건이 아니었다. 싸운 것도 아니고, 배신을 당한 것도 아니고, 노골적인 모욕을 들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친구A가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좋네…, 그거'라고 대답했을 뿐이었다.


"내가 뭐라고 했는데? 그냥 좋다고 했잖아."


대답을 들은 친구A는 어이가 없었다. 그게 무슨 문제냐는 식의 반응이었다.


친구B는 '좋네'라는 단어의 문제가 아니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그는 그때의 억양을 다시 재현하려 했다. 억양을 말로 옮기는 순간 우스워졌다. 그가 진지하게 설명할수록 오히려 그만 유독 예민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대화의 모양을 기억하고 있었다. '좋네'가 조금 길게 늘어졌고, '그거' 앞에는 이상한 쉼이 있었다. 그리고 그 짧은 공백에서 친구B는 친구A의 '네가 이룬 게 고작 그거냐'는 듯한 비아냥과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시선, 차갑고 미세한 거리감을 읽어냈다.


친구B는 관계를 끊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절교의 이유가 고작 그 정도 일처럼 보일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아닌 일로


결국 친구B는 이상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상처를 받은 사람이었지만, 설명하는 순간 오히려 이상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모욕을 당했다고 느꼈지만, 증거를 내놓으면 '그게 모욕이야?'라는 말을 듣게 되는 상황. 관계를 끊고 싶지만, 그 이유가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버리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이야기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두 사람은 그 말을 해명하려고 할수록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갔다.


처음에는 단지 억양 하나의 문제처럼 보였던 것이, 어느 순간 서로가 서로의 삶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지의 문제로까지 이어졌다. 친구B는 친구A의 말투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선을 느꼈고, 친구A는 친구B의 예민함 속에서 자신의 세계를 거부하는 태도를 읽어냈다.


그래서 작품의 마지막은 단순한 말다툼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더 이상 같은 언어 안에 머물 수 없는 두 사람의 장면처럼 그려졌다.


한 사람은 '예'라고 말하고, 다른 한 사람은 '아니요'라고 대답했다. 같은 질문 앞에서도 두 사람은 더 이상 같은 쪽에 설 수 없었다.


그리고 작품은 결국, 두 사람이 단 두 단어를 두고 갈라서는 장면으로 끝난다.


*


그러나 침묵은 언제나 혼자 듣는 것만은 아니다. 어떤 침묵은 두 사람이 함께 만들고, 함께 모른 척하면서, 더 위험한 장소가 된다.


Moderato cantabile,
보통 빠르기로 노래하듯이


한 아이가 피아노 앞에서 입을 다물고 있었다.


모데라토 칸타빌레가 무슨 뜻이냐는 피아노 선생님의 질문에, 아이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선생님은 아이의 대답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선생님은 아이가 자신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기 위해 고집을 부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선생님은 그 뜻을 직접 알려주었다. 모데라토 칸타빌레, 보통 빠르기로 노래하듯이. 피아노 앞의 아이에게 그것은 음악을 연주하는 방식이 아니라, 먼저 복종해야 하는 명령처럼 들렸다.


빠르지 않게. 그러나 노래하듯이.

말하지 않게. 그러나 들리도록.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모데라토 칸타빌레』에서 제목이 된 이 지시어는 그렇게 작품 전체를 감싸는 이상한 문장이 되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거리 아래 카페에서 여자의 비명이 들렸다.


어떤 남자가 한 여자를 살해했고, 죽은 여자 곁에서 사랑한다고 소리치고 있었다. 그는 범행 이후에 도망치지도 않았고, 변명하지도 않았다.


그가 왜 범행을 저질렀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주인공 안 데바레드는 다음 날 다시 카페로 갔다. 아이를 데리고 산바카라하다 카페를 지나가는 길에 목이 말라 와인을 마시러 우연히 들린 것처럼 카페에 들어섰다. 하지만 그녀가 정말 알고 싶은 것은 어제 그 사건이었다.


카페 안에는 어제 사건을 기억하는 남자 쇼뱅이 있었다. 안은 그와 함께 죽은 여자와 남자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비명, 피 묻은 입술, 죽은 여자 곁을 떠나지 못하던 남자, 그리고 끝내 설명되지 않은 이유가 전부였다.


흔적만 남은 사건은 곧 상상의 영역으로 들어왔다. 안이 한 토막을 상상하면, 쇼뱅이 받아서 이어갔다. 쇼뱅이 가능성을 열어두면, 안은 그 안에 또 다른 장면을 그려 넣었다.


그러나 대화가 반복될수록 둘 사이의 기류가 달라졌다. 그들은 여전히 어제의 사건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었지만, 그 말들은 조금씩 자기들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쇼뱅은 안의 집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그는 안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그녀가 공장주의 아내라는 사실, 바닷가 끝의 큰 집에 산다는 사실, 그 집의 문가에 목련이 피어 있다는 것까지 알고 있었다.


죽은 여자와 남자로 시작된 대화는 어느새 안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바다를 바라보는 방, 함께 있으면서도 서로를 갈라놓는 긴 복도, 목련 향이 너무 짙어서 닫아놔야만 했던 창문 쪽으로 이어졌다.


두 사람의 대화는 어느새 전날의 사건을 벗어나고 있었다. 쇼뱅은 죽은 여자의 이야기를 빌려 안의 삶 가까이 다가왔고, 안은 그 이야깃거리를 핑계로 자기 안에서 오래 닫혀 있던 감정을 조금씩 열기 시작했다.


그들은 서로에게 끌리고 있다고 표현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직접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대화는 더 깊숙이 서로의 삶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결국 살해당한 여자와 그녀를 죽인 남자의 이야기는 어느새 두 사람 자신을 비추는 어두운 거울이 되어 있었다.


자신들의 감정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음으로써, 그들은 아직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아직 누구를 배신한 것도 아니었고, 아직 고백한 것도 아니었고, 아직 돌아갈 수 없는 선을 넘은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어제 일어난 살인 사건에 대해 말하는 척하면서, 자기들 사이에서 자라나는 감정을 빠르지 않게, 그러나 노래하듯이 조금씩 유예하고 있었다.



*


이제 침묵은 더 건조하고 현대적인 방식으로 돌아온다. 누군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무 적게 말하기 때문에 시작되는 침묵이다.


에마뉘엘 베르네임의 『그의 여자』에서, 의사 클레르는 토마스라는 남자에게 빠져들었다. 어느 날 토마스는 자신에게는 아내와 두 아이가 있다고 털어놓았다. 가족을 떠날 수 없고, 클레르를 아프게 하고 싶지도 않다고 덧붙였다.


그의 말은 한계를 미리 고백하는 정직한 말처럼 들렸다. 하지만 한계를 말해두었다고 해서, 그 관계가 덜 잔인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토마스는 클레르의 집에 거의 일상처럼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머무는 시간에는 늘 끝이 정해져 있었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한 시간 십오 분만 머물렀다.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닌 한 시간 십오 분이었다.


그는 클레르의 방 안으로 들어왔지만, 자신의 삶 전체를 함께 들여오지는 않았다. 아내와 아이들, 돌아가야 할 집, 클레르가 들어갈 수 없는 시간은 언제나 문밖에 남아 있었다.


한 시간 십오 분은 클레르에게 사랑이 허락되는 시간이면서, 동시에 자신이 들어갈 수 없는 세계가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토마스에게는 말하지 않아도 지켜지는 규칙이 있었다. 아무도 그 규칙을 설명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매번 정확하게 반복되었다.


어느 날 클레르는 그 규칙을 흔들어보기로 했다.


그녀는 집 안에서 모든 시간을 지웠다. 비디오와 커피메이커의 전원을 뽑았고, 알람시계를 서랍 안에 숨겼고, 자신의 손목시계도 가방 속에 넣어두었다. 시간이 보이지 않으면, 그에게도 떠나야 할 시간이 조금쯤 흐려질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토마스는 여전히 한 시간 십오 분 뒤에 떠났다.


그가 시간을 지킨 것은 특별히 냉정한 성격의 소유자여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함께 있는 동안 토마스는 클레르에게 다정했다. 토마스는 그녀를 만나러 왔고, 그녀를 안았고, 입맞췄고, 그녀와 함께 있는 시간을 원했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클레르에게 끌리고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기 어려웠다.


문제는 그 다정함에도 언제나 끝나는 시간이 정해져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는 클레르의 방 안으로 들어왔지만, 그 방 안에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그녀를 원하면서도 더 머물지 않았고, 가까이 다가오면서도 자신의 삶 전체를 내어주지는 않았다.


클레르가 만질 수 있는 것은 그의 몸과 한정된 시간뿐이었다. 그 너머의 하루는 여전히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토마스는 늘 같은 자리에서 멈춰 섰다. 더 오래 머물지 않았고, 더 많이 설명하지 않았고, 더 멀리 데려가지 않았다.


그래서 한 시간 십오 분 뒤에 떠나는 그의 모습은 더 차갑게 느껴졌다.


다정했던 사람이 정확한 시간이 되면 언제나 돌아가버렸다. 마치 사랑에는 응답하면서도, 그 사랑이 자신의 생활을 건드리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 사람처럼.


이렇게 그들의 관계에는 말하지 않은 규칙이 있었다. 설명하지 않은 경계가 있었다. 그러나 반드시 지켜지는 시간이 있었다.


그 침묵이 클레르에게는 가장 잔인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말해지지 않은 세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설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세계는 클레르의 머릿속에서 더 선명해졌다.


클레르는 토마스가 돌아가는 집을 본 적이 없었다. 그의 아내와 아이들을 만난 적도 없었다. 그러나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는 오히려 더 자세히 상상할 수 있었다. 정원이 딸린 교외의 집, 차고에 나란히 선 토마스의 차와 아내의 차, 벽에 큰 것부터 작은 것까지 줄지어 걸린 자전거 네 대가 있었다.


토마스가 보여준 세계가 아니었다. 그가 끝내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클레르가 혼자 지어 올린 세계였다.


그리고 어느 날 클레르는 카페에서 토마스 아내의 직업을 물었다. 그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건축가라고 짧게 대답했다. 그리고 곧바로 클레르의 손목에 찬 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집에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그가 떠난 뒤, 클레르는 침대에 몸을 던졌다. 그녀의 머릿속은 멈추지 않았다. 아내 이야기는 꺼내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클레르는 토마스가 가족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았을 거라고 후회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침묵이 자신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말을 아낀 것뿐이었다고 해석했다.


그러다 문득 두려움이 밀려왔다.


혹시 자신이 선을 넘은 것은 아닐까? 그가 다시 오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클레르는 그 두려움을 방금 전까지 이어진 작은 스킨십으로 위로했다. 카페에서 둘은 무릎을 맞대고 않아 있었다. 그녀는 어쩌면 둘의 무릎이 세게 닿아 있어서, 토마스의 피부에 자신의 스타킹 자국이 남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토마스의 피부에 남아 있는 자신의 스타킹 자국이 클레르에게 유일하고도 강력한 사랑의 증거가 되었다.


그녀는 토마스가 정말 자신에게서 멀어지고 싶었다면, 그렇게 가까이 앉아 있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비록 말수는 적었고, 결국 정해진 시간에 맞춰 떠났지만, 그는 분명히 자신을 원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렇게 클레르는 토마스가 다시 올 거라고 믿었다.


또 한 번은 토마스가 그녀에게서 슬며시 몸을 뺀 일이 있었다. 클레르는 그 작은 동작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왜 갑자기 물러났을까? 조금 전까지 자신을 기다리던 사람이, 왜 막상 가까워지자 한 걸음 뒤로 물러났을까?


그녀는 곧 답을 찾아냈다.


향수 때문이었다.


자신의 향이 토마스의 옷이나 피부에 남으면, 집에 돌아갔을 때 그의 아내가 알아차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클레르의 방에 머물지 않고 카페로 가자고 했을 거라고 추측했다. 그래서 조금 전 그녀에게서 살짝 몸을 뺐을 것이라고 믿었다.


토마스는 한 번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클레르 역시 묻지 않았다. 하지만 설명되지 않은 동작 하나는 그녀의 머릿속에서 곧바로 완성된 문장이 되었다.


그가 자신을 카페로 데려간 것은 향수 냄새 때문이었다. 그의 아내가 향수 냄새를 맡을 수 있기 때문에 향수를 뿌리지 말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 결론이 맞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클레르에게 그 설명이 필요했다는 점이다. 말해지지 않은 행동을 그대로 견디는 것보다, 차라리 자신을 아프게 하는 이유라도 갖는 편이 나았다.


기다림이 상대를 만들어내는 일이라면, 침묵은 관계 전체를 혼자 써 내려가는 일이었다.


*


사랑에 빠진 이에게
믿을 만한 사전은 없다


『사랑의 단상』에서 바르트는 사랑에 빠진 이를 기호를 좇는 사람처럼 그린다. 상대가 나를 사랑하는지, 아니면 이제 사랑하지 않는지 알고 싶어, 그는 끊임없이 기호를 뒤지고 있는 사람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사랑에 빠진 이에게 믿을 만한 사전은 없다'는 말처럼 상대방을 해석하는 믿을 만한 코드는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상대가 대답에 인색하거나, 아예 대답하지 않을 때, 사랑에 빠진 이는 더 많은 말을 하게 된다. 다만 그 말은 상대에게 가닿지 않고, 자기 안에서만 끝없이 이어질 뿐이다.


그러니 사랑하는 이는 상대의 말을 듣는 사람이 아니라, 상대의 침묵을 번역하는 사람이라고 봐야 한다.


*


상대방의 침묵은 너무 많은 말을 듣게 만든다. 가끔은 과대해석한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 침묵은 처음부터 비어 있지 않은 표현이다.


그게 반드시 남녀 사이가 아니더라도, 그 어느 것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그리고 더욱 불행한 사실은 그 침묵을 잘못 해석한다는 데 있지 않다. 그 해석이 맞았는지 틀렸는지 끝내 알 수 없다는 데 있다.


'좋네'와 '그거' 사이의 이상한 정적, 늘 같은 시간에 떠나가는 사람, 말하지 못한 욕망을 대신 떠안은 타인의 죽음, 대답하지 않는 상대 앞에서 혼자 이어지는 말들.


그렇게 사랑은 우리를 유능한 독자로 만든다. 그러나 그 유능함이 우리를 덜 외롭게 해주지는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의 말보다 침묵을 더 오래 읽고, 대답보다 공백을 더 오래 붙잡는다. 그리고 끝내 알 수 없는 것을, 알 수 없는 채로 계속 해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