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열정』에서 『사랑의 단상』, 『불』까지 이어지는 기다림의 문학
한 사람이 서 있다. 그리고 그 앞에 또 한 사람이 다가온다.
한 사람은 기다렸던 것 같고, 다른 한 사람은 뒤늦게 도착한 듯 보인다.
그 둘이 서로를 바라보며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한 사람은 무언가를 계속 말하고, 다른 한 사람은 침묵한다.
이 중 누군가는 더 오래 남을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먼저 떠나가 버릴 것이다.
프랑스 문학에 매료된 후로 몇 번 그들의 사랑에 대해서 쓰고 싶었지만, 실패했다. 우선 그들에 대해서 잘 몰랐고, 막상 모아 놓으니 진부해 보였다. 과거에야 사랑 얘기가 이야깃거리가 됐지만, 이제는 흔하디 흔한 가십거리로 읽히는 게 요즘 인식이다.
그럼에도 문학, 특히 프랑스 문학에는 너무 많은 사랑이 있다. 순수하고 열정적인 사랑부터, 피할 수 없는 운명 같은 사랑, 막장 드라마 같은 사랑, 서로를 파괴하면서도 끝내 놓지 못하는 사랑, 이미 끝났는데도 오래 남아 있는 사랑까지, 아름답다 표현하기에는 너무 자주 잔인하고, 고통이라고만 말하기에는 또 그들을 가장 생기 있게 만들어주는 이야기들이 널려 있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오래 들여다볼수록, 이상하게도 질문은 둘 사이의 관계에서 나에게로 돌아오게 된다.
누군가와 함께 했던 시간 동안
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이번에도 처음에는 프랑스 문학 속 다양한 사랑에 대해 쓰려고 했다. 아니 에르노의 기다림, 롤랑 바르트의 불안, 콜레트의 이별, 뒤라스의 오래된 고백, 보부아르의 무너지는 결혼, 모디아노의 사라진 사람들, 우엘벡의 닳아버린 관계들처럼, 그들의 작품들을 지나가며 사랑이라는 감정이 프랑스 문학 안에서 어떻게 말해지는지 다뤄보고 싶었다.
하지만 작품을 하나씩 읽을수록 사랑보다 더 오래 남는 것은 다른 감정이었다.
외로움.
답장을 기다리는 시간 속에도 외로움이 묻어 있었고, 함께 있는 사람의 침묵을 해석하는 순간에도 외로움이 있었다. 누군가를 너무 사랑해서 나를 잃어버리는 자리에 나를 대신하는 건 외로움이었다. 가족이라는 가장 가까운 이름 안에도, 계급과 언어와 몸이 어긋나는 사랑 안에도, 아이를 돌보는 집 안에도 혼자가 된 것 같은 외로움은 늘 따라다녔다.
프랑스 작품이 유독 흥미로운 이유는 이 모든 것을 이해하기 쉽게 만들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제는 누군가의 감정을 이해하기 쉽게 그리다는 것도 지나친 비약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곳의 사랑은 자주 초라하고, 불균형하고, 우스꽝스럽고, 때로는 잔인했다. 사랑하는 사람은 품위 있게 기다리지 못했고, 침묵 앞에서 유능한 독자가 되었고, 상대가 남긴 작은 흔적 하나에 오래 잡혀 있었다.
그럼에도 모든 것을 냉소적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사랑이 모든 것이라고 말하지도 않았지만,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 감정이 남기는 기다림, 수치심, 비대칭, 침묵, 집착, 돌봄, 기억 같은 이상한 흔적들을 끝까지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사랑에 대해 쓴다는 것은 결국 상대방 곁에서 내가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를 뒤늦게 읽어내는 일인 듯싶었다.
외로움이라고 말하니까 마치 실패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깨달은 것은
기다릴 수 있었다는 것
흔들릴 수 있었다는 것
누군가의 말투 하나를 오래 생각했다는 것
끝난 뒤에도 그 시간을 다시 읽기로 했다는 것
그 모든 일은 부끄럽지만, 동시에 우리가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가닿고 싶어 했다는 증거라는 사실이다.
사랑은 자주 우리를 외롭게 만든다. 하지만 그 외로움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된다고 믿는다.
이제 그 외로움의 첫 장면으로 들어가 보려 한다.
방금 내려놓은 핸드폰을, 다시 들춰보는 사람에게서.
방금 내려놓은 핸드폰을 또 들춰본다. 혹시 새로운 알림을 놓쳤을까 봐, 어두운 화면을 다시 깨운다.
핸드폰 알림에 유독 예민해진 모습을 누군가는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혹시 들켜 버린 걸까? 하루 종일 누군가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에 괜히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게 된다.
잠시 관심을 꺼두기로 마음먹어보지만, 그래도 멈출 수 없다. 결국 다시 핸드폰을 들춰보았다.
가끔은 이런 조바심마저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 사람의 한 줄짜리 메시지로 하루의 기분이 결정되는 내가, 그 작은 동작 하나를 멈추지 못하는 내가 한심해진다.
친구에게 털어놓아도 별로 위로가 되지는 않는다. 다 안다고들 말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액정은 여전히 어둡고, 온 신경은 여전히 핸드폰을 향해 있는 듯하다.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때로 한 사람의 삶이 다른 사람의 부재를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때로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동안 사랑의 충만함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이 점점 비워지는 감각을 경험하게 된다.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 속 기다림은 이렇게 등장한다.
"작년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그 사람이 전화를 걸어주거나 내 집에 와주기를 바라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겉으로 보기에 그녀의 일상은 평온했다. 슈퍼마켓에 갔고, 영화관에 갔고, 세탁소에 옷을 맡겼고, 시험지를 채점했다. 하지만 그녀가 느끼기에 모든 것은 자연스럽지 않았다.
그 사람의 나라에 관한 신문 기사를 읽고, 옷과 화장을 고르고, 침대 시트를 갈고 방에 꽃을 준비해 두었다. 그 사람이 다음에 왔을 때 잊지 않고 말해야 할 것들을 메모해 두었고, 그 사람이 좋아하는 위스키를 샀다. 청소기와 헤어드라이어는 쓰지 않았다. 그 소리가 전화벨을 덮어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작품은 한 여성이 유부남인 외국인 남자와의 관계에 완전히 사로잡히는 시간을 기록한 작품이다. 물론 작품 속 여성은 에르노 자기 자신이다.
에르노의 삶은 그 남자가 언제 전화할지,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를 기다리는 일로 채워진다. 일상은 계속되지만, 사실상 모든 시간은 그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그는 부재할 때조차 그녀의 삶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 작품은 사랑의 아름다움보다 기다림, 집착, 수치심, 자기 소멸에 가까운 몰입을 보여준다. 에르노는 그 감정을 낭만적으로 꾸미지 않고, 한 사람이 욕망에 붙들렸을 때 자신의 시간과 자존감, 일상이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차갑고 정확하게 기록했다.
그녀는 작품 곳곳에서 normal이라는 단어를 반복해서 사용한다. 그리고 그 사람만을 기다리는 자신의 모습이 비정상적으로 보일까 봐 끊임없이 감추려 한다. 에르노에게 정상과 비정상은 열정에 빠진 그녀만의 세계를 분류하는 장치였다.
그가 한 시간 뒤에 오겠다는 연락을 받은 어느 날 오후, 그녀는 부엌에 갔다가 시계 앞에서 멈춰 섰다. 한 시간 뒤, 그리고 또다시 한 시간 뒤면 그가 왔다가, 가버린 뒤 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문득 그녀는 어느 시점에 살고 있는지를 떠올렸다.
그의 답장이 도착할 때까지 그녀는 그가 자신을 찾아와 줄 미래의 어느 순간에 살고 있었다. 그녀의 현재는 그저 그와 함께 할 앞으로의 시간을 기다리는 임시 공간이 되어버린 듯했다. 에르노의 말을 빌리자면 그녀는 그녀를 관통해서 지나가는 시간 속에 살고 있을 뿐이었다.
*
에르노가 섬세하게 그려낸 기다림의 시선이 더 압축된 형태로 기록된 버전도 있다.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에서는 사랑에 빠진 사람의 언어를 사전처럼 단편 지어 해부했다.
그가 말하는 기다림은 단순히 누군가가 늦게 오는 시간을 견디는 일이 아니다. 바르트는 기다림을 하나의 무대처럼 설명한다.
한 사람이 찻집에서 약속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시계를 보았다. 몇 분 늦었는지 머릿속으로 계산하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그저 단순히 조금 늦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기다리는 사람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기다림은 곧바로 다른 장면으로 넘어갔다. 혹시 약속 시간이나 장소를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아니라? 전화를 해보는 게 좋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그 사람이 도착하면 어떡하지?', '요즘 같으면 너무 재촉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들이 지나가고 불안은 분노로 변했다. 왜 연락도 없는지, 적어도 늦는다고 말해줄 수는 없는지,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 분노마저 '혹시 오지 않는 건 아닐까?' 하는 버려졌다는 공포로 바뀌었다.
상대는 단지 늦었을 뿐인데, 기다리는 사람의 마음속에서는 이미 오해와 원망과 이별과 죽음의 장면까지 차례로 상연되었다.
그리고 이런 기다림에는 두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는 권력 관계도 숨어 있다. 바르트에게 사랑하는 사람은 결국 기다리는 사람이다.
'나는 사랑하고 있는 걸까?'
그래, 기다리고 있으니까
사랑한다는 사실은 상대를 얼마나 잘 이해하는지, 얼마나 오래 함께 있었는지로 증명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사람이 오지 않는 시간에도 내가 여전히 그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로 드러난다.
이 기다림은 결코 평등하지 않다. 때로는 기다리지 않는 사람처럼 굴어보기도 한다. 일부러 늦고, 일부러 바쁜 척하고, 상대보다 더 느긋한 사람이 되어보고 싶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무슨 일을 하든 결국 시간이 있고, 약속보다 일찍 도착하하게 되고, 전화가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늘 준비된 사람이 된다. 사랑하는 사람의 자리는 결국 기다리는 사람의 자리가 된다.
이때 기다림은 누군가에게 예속된 듯한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내 시간이 더 이상 온전히 내 것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오지 않음으로써, 말하지 않음으로써, 늦어짐으로써 기다리는 사람의 시간은 사라진다. 부재 앞에서 불안해하고, 화를 내고, 스스로를 낮은 자리로 내려보낸다.
그래서 바르트에게 기다림은 사랑의 증거이면서 동시에 사랑 안에 숨어 있는 권력의 흔적이다.
기다리게 하는 것이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인류의 유희였을까? 챕터의 마지막은 의미 심장하게 끝이 난다.
중국의 선비가 기녀를 사랑했다. 기녀는 선비에게 "만약 선비님께서 저희 집 정원 창문 아래에 있는 의자에 앉아 백일 밤을 기다리며 지새운다면, 저는 선비님 사람이 되겠어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아흔아홉 번째 되던 날 밤 선비는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팔에 끼고 그곳을 떠나갔다.
*
2021년 결혼한 여자와 다른 남자의 불륜, 욕망, 그리고 파국이라는 문학이 이미 수없이 반복해 온 소재의 작품이 공쿠르를 비롯한 프랑스 주요 문학상 후보에 잇달아 올랐던 적이 있다.
마리아 푸르셰의 『불』이라는 작품은 겉으로 보면 오래된 이야기였지만, 푸르셰는 그 진부한 소재를 낭만적으로 되살리지 않았다.
그녀는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을 아름다운 예외로 그리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속한 시대의 피로와 권태와 불평등 속에 던져 놓았다.
자신의 삶이 욕망이 거세된 노력과 타협의 결과처럼 느끼는 로르와 금융권에서 일하며 높은 빌딩 안에 있지만, 그 역시 삶에 지쳐 있는 클레망에게 서로 존재는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두 번째에 만남에서 입을 맞췄다. 그게 다였다. 하지만 그 두 번의 만남 이후, 로르의 삶은 정확히 에르노의 구조로 옮겨갔다.
밤 11시. 가족들은 모두 잠든 시간이었지만 욕조 가장자리에 속옷 차림으로 앉은 로르의 눈은 핸드폰 화면의 파란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실수한 것 같아."
한 시간 전에 클레망이 메시지 한 줄을 보냈다.
"누구세요?"
너무 작업 멘트 같아서 답하지 않으려 했지만, 한 시간 내내 로르는 적당한 대답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그 한 시간 동안 진짜 하고 있던 것은 클레망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어떻게 그를 유혹할지, 또 어떤 관계로 이어갈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녀의 고민 끝에서 클레망의 존재는 점점 또렷해져 갔다. 그러나 그것은 로르가 실제 클레망을 알아갔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녀는 아직 잘 모르는 남자의 빈칸을 자기 상상으로 채우고 있었다.
그녀가 한 동안 붙잡고 있었던 것은 클레망을 통해 열릴지도 모르는 가능성이었다.
박사 논문을 심사하는 자리에서도 로르는 집중할 수 없었다. 어떤 원초적인 기다림이 들끓고 있는 순간처럼 보였다.
그녀의 눈에 원초적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기다림은 교양이 가르친 것도, 시대가 빚어준 것도, 슬롯가 권장한 것도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아래 층위, 본능에 가까운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가족 여행을 떠나는 날, 비행기에 오르기 직전 로르는 클레망에게서 메시지를 받았다. 비행기가 이륙하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남편과 아이가 있는 좌석에서 벗어나, 비행기 안에서 허락된 가장 좁은 밀실로 들어간 것이다.
그곳에서 그녀는 클레망이 남긴 음성 메시지를 스무 번 넘게 반복해서 들었다. 목소리의 온도, 숨, 망설임, 자신을 향해 남겨진 기척을 듣고 또 들었다. 가족 여행이라는 공동의 시간 속에서 로르는 혼자 다른 시간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클레망은 곁에 없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그 좁은 화장실 안에서 그녀가 붙잡을 수 있는 하나의 몸처럼 남아 있었다.
에르노는 그 남자가 떠난 직후 피렌체로 일주일짜리 여행을 떠났다. 그녀가 그곳에서 한 일이라고는 미술관에 가는 것이 전부였다.
그녀는 어느 작품도 작품으로 보이지 않았다. 다비드상 앞에서 그녀가 본 것은 그 남자의 어깨였고, 다른 누드 조각 앞에서 그녀가 본 것은 그 남자의 배와 허리였다. 그녀는 도시 전체를 한 남자의 몸을 떠올리기 위한 도구로 썼다.
그리고 로르는 피렌체의 미술관 대신 비행기의 좁은 화장실에서 르네상스 조각 대신 한 줄짜리 음성 메시지로 클레망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렇게 자신이 사랑할 수 있는 부분만 음성메시지에서 골라내서 듣고 있었다.
*
프랑스 문학에서는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이런 망상의 노동을 자주 했다. 혹시 내가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저 기다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게는 이런 쓸모없는 기다림도 하나의 사치였다.
과거에는 비싼 옷이나 럭셔리 슈퍼카, 아니면 바닷가가 보이는 언덕에 위치한 저택 따위가 사치의 전부인 줄 알았다. 그리고 조금 지나서는 지성적인 삶을 사는 게 사치라고 믿었다. 그리고 지금은 이유 없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게 가장 큰 사치처럼 보인다.
에르노도 그녀의 기다림을 사치라는 단어로 마무리 지었다. 그녀의 말을 빌리자면, 사치는 모두에게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사로잡힐 대상이 없거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사로잡히는 기능이 닫혀 있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둘 다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 이미지 정보
요린데 포이트의 〈사랑의 단상(Fragments of a Language of Love)〉, 2012년, 영국 리손 갤러시 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