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끝내 놓지 못한 건 '나' 아니었을까?

에르노의 『여자아이 기억』, 지나간 관계에서 자기 자신을 다시 읽는 방법

오래된 대화창을 발견했다.


지운 줄 알았는데, 그 사람과 나누었던 대화가 거기 그대로 있었다.


대화창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무슨 대화를 했었는지 확인하고 싶어졌다.


'그 사람이 내게 어떻게 말했더라? 그리고 그때 내가 뭐라고 대답했었지?


스크롤을 천천히 내리면서 유독 차갑게 느껴졌던 문장을 다시 찾기 시작했다.


순간 손이 멈추는 곳은 그 사람의 말이 아니었다. 거기에 답하고 있는 내 문장들에 시선이 멈춰 섰다.


왜 이렇게 경솔했을까?

이런 말은 왜 했을까?

그리고 왜 말하지 않았을까?


작은 화면 속의 나는 내가 기억하는 나보다 더 빨리 기대하고, 더 쉽게 무너지고, 더 자주 자신을 지우고 있었다.


지나간 대화를 읽으면서 익숙했던 그 사람의 말은 옆에, 낯설게 느껴지는 나를 발견했다. 마치 다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대신 적어 넣은 것 같았다.


*


우리는 보통 이런 걸 미련이라고 부른다. 아직 잊지 못해서, 가끔은 아무 이유 없이, 문득 궁금해서 자꾸 들여다보게 된다.


이미 끝난 관계를 다시 들여다보는 동안 생각이 멈추는 곳은 상대방이 아니라 그 옆에 있던 자신일 때가 많다. 그리고 결국 질문의 주어가 어느 순간 그(녀)에서 나로 넘어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지나간 과거가 오래 남는 이유는, 누군가에게 미련이 남아서가 아니다. 그 사람 곁에 있던 나를 아직 해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해석은 며칠로 끝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그 옆에 있던 자신을 읽어내는 데 평생을 쓴다.


지로의 남편은 1999년 6월 22일, 처남이 차고에 맡겨둔 바이크를 타고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했다. 위험하다는 이유로 일본에서는 시판되지 않았던 기종이었다. 바이크는 유럽으로 수출되었고, 결국 한 남자의 마지막 이동 수단이 되었다.


스무 해가 지나고, 남편과 함께 살았던 집을 팔고 떠나야 하는 때가 되어서야 그녀는 그 하루를 처음부터 다시 되짚어 보기 시작했다.


만약 그 아파트를 팔지 않았더라면

만약 그 집을 사겠다고 고집부리지 않았더라면

만약 어머니에게 우리 집에 차고가 있다고 말하지 않았더라면

만약 그날 저녁 친구의 연애담을 듣는 대신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더라면


그녀는 그 하루를 만약이라는 단어들로 한 칸씩 거슬러 올라갔다.


지로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 모든 '만약'은 이미 지나간 하루를 되살리려는 시도였다. 그리고 동시에 그녀의 남은 삶을 '그때 그러지 않았더라면'이라는 문장 속에 가두는 일이었다.


직설법으로 사는 사람은 매일 소모되고 닳는다. 오늘 실망하고 오늘 괜찮아진다. 그러나 이미 끝난 일이 가정법이라는 테두리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영원한 루프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무수히 닫히지 않는 문장들 틈에서, 그 만약의 주어를 보아야 한다. 만약의 주인공은 대부분 '나'다.


지로가 남긴 기록들을 살펴보면 대부분 과거 남편의 바이크 사고의 원인을 찾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오토바이, 차고 열쇠, 일본의 엔지니어, 빨간 신호등까지, 그날을 수 없는 가정으로 묶어 놓는다.


그러나 그녀가 한 칸씩 되감으며 실제로 심문하는 것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그때의 자신이다. 왜 그토록 집에 매달렸는지, 왜 전화를 하지 않았는지, 왜 아무것도 몰랐는지, 묻고 또 묻는다.


사고는 아직까지 설명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그래서 그녀의 머릿속은 멈출 수 없다. 사고는 1999년에 이미 끝났지만, 그 속에 있던 자신을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


작품의 한 챕터가 거의 끝나갈 무렵에서야 그녀는 그 모든 가정을 스스로 닫아버린다. 만약은 없다. 되돌릴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걸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의 글을 바카라으로 완성했다. 되돌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자신을 마침내 읽어내기 위해서였다.


*


그리고 그 만약이라는 가정은 자기 자신에게 들이대어지기도 한다.


에르노는 1958년 여름, 그녀가 열여덟 살이었던 자신에게 만약이라는 잣대를 들이댄다.


그녀는 단시 노르망디의 한 여름 캠프에 보조교사로 참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 남자와 첫 경험을 했다.


그러나 이것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캠프의 지도교사는 불을 끄고 그녀를 거칠게 끌어당겼고, 다음 날에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굴었다.


곧 그녀에게는 헤픈 여자라는 낙인이 찍혔다.


이후 몇 년간 그녀의 몸과 삶에 남은 것은 수치심이었다.


에르노가 이 일을 강간이라고 분명히 이름 붙이기까지는 60년 가까운 세월이 필요했다. 그 반세기가 넘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녀 안에서 그 남자가 누구였는지는 지워지고 없었다. 사랑은 애초에 없었고, 어떠한 감정조차 사라진 뒤였다.


상대는 기억조차 할 수 없지만 그 옆에 있던 자기 사진을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경험의 잔해 속에서 끝내 남은 것은 오직 그때의 그 소녀뿐이었다.


에르노는 그 소녀를 '나'라고 부르지 못했다. 1958년의 자신을 '그 소녀', 'S의 소녀', '58년의 소녀'라고 불렀다.


그리고 한때 자기 자신이었던 사람을, 이제는 쉽게 들여다볼 수 없는 타인처럼 다뤘다.


사진 속 소녀는
내게 자신의 기억을 물려준
이방인


실제로 에르노는 사진 속 그 소녀를 두고, 자신에게 기억을 물려준 이방인이라고 불렀다. 한때 자신이었던 사람이 이방인이 되어버리는 상태, 이것이 사랑이라는 이름조차 붙일 수 없었던 경험이 한 사람 안에 남기는 가장 정확한 모습이었다.


너무 가까워서 볼 수 없었던 자신에게 도달하기 위해 최소한의 거리였다.


에르노가 지금 글을 쓰는 사람은 '나'이고, 1958년 여름 S에 있었던 소녀는 '그녀'라고 부르는 이유는 한때의 자신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과거가 아니라, 바라보아야 할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문 뒤에서 누군가가 나에 대해 '그녀'라고 말하는 것을 듣는 순간처럼, 살아 있는 내가 잠시 내 삶의 바깥으로 밀려나는 느낌, 이것이 에르노에게 3인칭은 그런 잔인한 거리였다.


하지만 그 잔인함이 필요했다. 1958년의 자신을 곧바로 '나'라고 부르면, 너무 쉽게 자신의 실수를 이해한 척하게 될지도 몰랐다. 반대로 완전히 남처럼 밀어내면, 그것 역시 거짓이었다.


그 소녀는 곧바로 '나'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히 남이라고 밀어낼 수 있는 존재도 아니었다. 너무 가까이 두면 견딜 수 없고, 너무 멀리 두면 사라져 버리는 사람이었다.


그런 존재를 다시 불러내는 일은 단순한 회상이나 과거에 대한 후회, 미련과는 달랐다. 에르노가 두려워한 것은 과거가 사라지는 일이 아니었다.


과거는 이미 사라져 있었다. 1958년의 여름도, S의 식당과 복도도, 그곳에 있던 사람들의 목소리도 오래전에 흩어졌다. 함께 있었던 사람들조차 아마 그 소녀를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에르노에게는 아직 사라지지 않은 것이 하나 남아 있었다. 그때의 자신이 겪은 일을 끝내 쓰지 못한 채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시간이 줄어들고 있다는 공포에 휩싸였다. 자신이 오래전부터 '58년의 소녀'라고 불러온 존재에 대해 끝내 쓰지 못한 채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게 되고, 그 소녀가 겪은 일은 설명되지 않은 채 남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살아졌지만 이해되지 않은 일, 겪었지만 아무 의미도 얻지 못한 순간은 견딜 수 없었다.


다양한 의미로 한 사람이 평생을 안고 사는 두려움 치고는 낯설다. 에르노가 두려워한 것은 그때의 자신을 끝내 이해하지 못한 채로 남겨두는 일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소녀가 겪은 일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방치하는 일이었다.


*


그리고 앞서 다룬 뒤라스의 『연인』은 결국 한 단어 앞에 멈춰 섰다.


수십 년이 흐른 뒤, 인도차이나의 그 남자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아내와 함께 파리에 와 있었고, 그저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여전히 그녀를 사랑한다고, 죽을 때까지 사랑할 것이라고 고백했다.


그러나 그 장면을 다시 펼쳐보면, 오래 남아 있는 것은 남자의 사랑만이 아니었다.


전화를 받고 있는 그녀 역시 그 고백의 바깥에 있지 않았다. 그의 떨리는 목소리를 알아듣는 순간, 그녀 안에서도 오래전 그 목소리를 들었던 소녀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가 예전처럼 두려워했고, 목소리가 갑자기 떨렸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 떨림 속에서, 그의 목소리는 다시 중국의 억양을 되찾았다는 것도 함께.


그러니까 작품은 단순히 '그가 아직도 그녀를 사랑했다'는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더 오래 남는 것은 남자의 고백이 아니라, 그 고백이 불러내는 그 시절의 자기 자신인 것이다.


사랑이라는 말은 뒤늦게 도착했지만, 그 말이 건드린 것은 이미 오래전에 지나간 몸과 목소리, 수치심과 욕망,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겪고도 끝내 사라지지 않은 소녀였다.


*


이 복잡한 감정을 우리는 미련이라는 두 글자로 간단하게 정리하고, 오래된 대화창을 닫는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놓지 못하는 것은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 곁에서만 가능했던 나이기도 하다. 그렇게 빨리 기대하고, 그렇게 쉽게 무너지고, 그렇게 자신을 비우던 한 사람이다.


그때의 내가 아직 여전히 남아 있을까?


끝난 관계를 오래도록 떠올리는 일은 내가 한때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뒤늦게 읽어내려는, 더디고 서툰 작업이다. 그 사람과의 관계는 끝났지만, 그 안에 있던 내가 누구였는지에 대한 해석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결국 사랑하는 사람보다 사랑했던 사람이 더 많아지는 쪽으로 흘러간다.


※ 이번 글에서 다룬 작품들

브리지트 지로의 『빨리 흘러간 삶(Vivre vite)』

아니 에르노의 『여자아이 기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