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진소녀, 세상과 맞짱 뜨다》는 제가 오랫동안 학생들을 가르치며 보고 듣고 겪었던 일들을 바탕으로 쓴 청소년 성장소설입니다. 실제 있었던 일과 인물에서 출발했지만, 이야기의 재미를 위해 사건을 각색하고 때로는 과장하기도 했습니다. 등장인물과 사건에는 사실과 허구가 함께 섞여 있습니다.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던 중학생 배구부 에이스 선미. 싸움도 잘하고 운동신경도 뛰어나지만, 정작 말로 따지기 시작하면 얼굴부터 빨개지고 머릿속은 하얘진다. 그런 선미 앞에 서울에서 온 ‘말빨 최강’ 전학생 소영이 나타난다. 소영의 코를 납작하게 해 주겠다는 오기로 시작한 디베이트. 토론대회, 보이스피싱 사건, 주니어 디베이트 코치 자격과 초등 디베이트 자원봉사를 거치며 선미는 조금씩 달라진다.
[고대 그리스에서 배우는 오늘의 국제정세]
뒤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다.
“저걸 중학생들이 한다고?”
누군가 작게 말했다. 선미도 화면을 올려다봤다. ‘고대 그리스?’ 벌써부터 머리가 아팠다. 강사는 그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웃었다.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상황은 간단합니다.”
화면에 작은 섬 하나와 거대한 함대 그림이 나타났다.
“기원전 5세기, 고대 그리스에 큰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라고,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맞붙은 전쟁이죠. 그때 강대국 아테네가 작은 섬 멜로스에 찾아가 자기편에 서라고 요구합니다. 멜로스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밀로의 비너스’라고 하는 그 멜로스입니다. 멜로스는 아테네의 요구를 거절합니다. 그러자 아테네는 이렇게 말합니다. 힘의 차이가 이렇게 큰데 끝까지 버티는 게 과연 현명하냐고.”
강사는 화면에 떠 있는 지도를 가리켰다.
“2천 년도 더 된 이야기인데, 이상하게 낯설지가 않습니다.”
화면이 바뀌었다. 이번에는 동아시아 지도가 나타났다.
“지금 우리도 비슷한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미국과 중국이라는 두 강대국의 경쟁이 갈수록 거세지고 있죠. 그 사이에서 대한민국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물론 지금의 대한민국과 고대 멜로스의 처지가 같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경제력도, 군사력도, 외교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방법도 훨씬 많죠. 하지만 강대국의 압박 앞에서 무엇을 지키고 어디까지 양보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중요합니다.”
강사는 아이들을 한번 둘러보았다.
“힘센 나라의 요구를 따르는 것이 현실적인 선택일까요? 아니면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우리의 원칙과 판단을 지켜야 할까요?”
잠시 뜸을 들인 뒤 화면에 논제를 띄웠다.
[약소국은 강대국의 요구에 따라야 한다]
“멜로스 사람들에게만 던지는 질문이 아닙니다. 바로 지금 우리에게도 던져야 할 질문입니다.”
뒤쪽에서 다시 웅성거림이 일었다. 좀 전까지 ‘중학생한테 너무 어려운 거 아니야?’ 하던 부모들도 이번에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고 옆 사람과 속닥이며 바라보았다.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도 많았다.
선미도 마찬가지였다. 고대 그리스니 펠로 뭐니 할 때까지만 해도 먼 나라 옛날이야기인 줄 알았다. 그런데 미국과 중국 이야기가 나오자 조금 달라졌다. 뉴스에서 귀가 닳도록 듣던 이름들이었다.
강사가 아이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아이들은 서로 눈치만 살필 뿐 누구도 선뜻 입을 열지 않았다. 뒤에 앉아 있던 어른들도 마찬가지였다. 괜히 자신에게 질문이 돌아올까 봐 슬그머니 고개를 숙이는 사람도 있었다.
“토론 규칙 없이 그냥 자기 생각만 말해보세요.”
몇 초 뒤, 손 하나가 올라갔다. 소영이었다.
“저는 따르는 쪽이요.”
선미의 눈이 슬쩍 소영에게 갔다. 소영은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채 말했다.
“나라가 없어지는 것보다는 일단 살아남는 게 먼저잖아요. 상대가 우리보다 압도적으로 강하면 무조건 맞서는 게 용기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그러면 강한 나라가 부당한 요구를 해도요?”
강사의 물음에 소영이 잠깐 생각하다 말을 이어갔다.
“다 따르라는 건 아니고요. 싸워서 얻는 것보다 잃는 게 훨씬 많다면 일단 물러설 수도 있다는 거죠. 살아 있어야 다음 기회도 있으니까.”
뒤에서 누군가 ‘음…’ 하고 낮게 소리를 냈다. 그때 대각선에 앉아 있던 남학생이 손을 들었다.
“저는 반대요.”
“왜요?”
“한 번 겁먹고 시키는 대로 하면 다음에는 더 많이 요구할 것 같아요.”
소영이 바로 고개를 돌아보며 말했다.
“근데 안 따른다고 공격해 오면요?”
“그래서 다른 나라랑 손잡아야죠.”
“도와준다는 보장이 있어요?”
남학생이 잠깐 말문이 막혔다.
“보장은 없죠. 그래도 처음부터 포기하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
“………..”
토론의 공방이 잠시 멈추자 강사가 입을 열었다.
“좋아요. 두 사람 모두 일리가 있어요. 그런데 한 가지씩만 더 물어볼게요.”
강사는 먼저 소영을 바라봤다.
“강한 나라의 요구를 들어주면 당장은 전쟁을 피할 수 있겠죠. 그런데 그 나라가 계속해서 더 많은 걸 요구하면 어떡하죠? 어디까지 양보해야 할까요?”
“그건…… 어느 정도 선을 정해야죠.”
“반대로 끝까지 저항해야 한다는 학생에게 묻겠습니다. 싸우면 국민 절반이 죽을 수도 있어요. 그래도 싸워야 할까요?”
남학생이 머뭇거렸다.
“절반이 나요? 그럼 좀…… 생각해 봐야겠는데요.”
“그렇죠? 이렇게 질문 하나만 달라져도 생각이 복잡해집니다.”
강사는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두 사람만 열심히 토론했어요. 나머지 학생들은 구경만 했고요. 이 많은 사람이 모였는데 두 사람만 이야기하면 아쉽잖아요?”
아이들 사이에서 웃음이 났다.
“그래서 이번에는 모두 함께 해보겠습니다. 오늘처럼 사람이 많이 모였을 때 할 수 있는 케빈식 집체 디베이트라는 걸 해볼 거예요.”
강사가 화면에 논제를 다시 가리키며 말했다.
[약소국은 강대국의 요구에 따라야 한다]
“지금부터 여러분을 두 편으로 나누겠습니다. 좀 전에 찬성 의견을 낸 왼쪽이 찬성, 반대 의견을 낸 이쪽이 반대입니다.”
“주의할 점이 하나 있습니다. 자기가 원래 찬성했다고 찬성 편으로 옮길 필요는 없어요. 오늘은 자기가 맡은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겁니다. 동의하지 않는 주장이라도 그 주장이 왜 나왔는지 이해하는 연습이죠.”
“그럼 속으로는 반대하면서 찬성하는 척해야 하는 거예요?”
앞줄의 남학생이 물었다.
“척하는 게 아니라 찬성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거예요. 내가 반대하는 주장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을 테니까요.”
강사는 양쪽을 번갈아 가리켰다.
“자, 각자 옆 사람들과 의논해서 자기편을 뒷받침할 이유를 찾아보세요. 정답은 없습니다.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하세요. 대신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강사는 학생들을 찬성과 반대, 두 편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각자 자기편의 주장을 뒷받침할 이유를 찾아보라고 했다. 잠시 후 강의실이 시끌벅적해졌다. 학생들은 옆 사람과 머리를 맞대고 의견을 주고받았다.
강사는 먼저 찬성편의 의견을 모았다. 전쟁을 피해야 국민의 생명을 지킬 수 있다는 주장부터 시간을 벌어 국력을 키우거나 강대국과 협력해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의견까지 나왔다. 강사는 학생들의 말을 칠판에 적고 비슷한 내용끼리 묶어 세 가지 논거로 정리했다.
“자, 이제 여러분이 낸 의견으로 입안문을 만들어 볼게요. 잘 들어보세요.”
강사는 칠판에서 한 걸음 물러나더니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리고 찬성 측의 입장을 밝히는 것으로 발표를 시작했다. 첫째, 둘째, 셋째. 조금 전 학생들이 제각각 내놓았던 의견이 차례로 이어졌다. 여기에 구체적인 설명이 붙고, 마지막에는 결론까지 깔끔하게 정리됐다. 막힘없이 이어지는 발표는 제법 설득력이 있었다.
강사가 발표를 마치자 강의실 여기저기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우와아~!”
“대박! 말 진짜 잘한다.”
“근데 저거 다 우리가 말한 거잖아?”
아이들이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웅성거렸다. 조금 전까지는 별것 아닌 것처럼 들리던 자기들의 말이 그럴듯한 연설로 바뀐 것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강사가 웃으며 물었다.
“어때요? 제가 여러분이 모르는 새로운 이야기를 했나요?”
“아니요!”
“맞아요. 여러분이 한 말을 정리해서 발표했을 뿐이에요. 생각을 어떤 순서로,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전달력이 달라지는 거죠.”
선미도 조금 놀랐다. 강사가 한 말 중에 특별히 어려운 내용은 없었다. 자신도 알아들을 수 있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어쩌면 저렇게 막힘없이 말할 수 있을까. 말을 잘한다는 게 단순히 말이 빠르거나 아는 게 많은 것과는 좀 다른 모양이었다.
이번에는 반대편 차례였다. 강사는 반대편 학생들의 의견도 세 가지 논거로 정리했다. 한 번 굴복하면 요구가 계속 커질 수 있다는 것, 국가의 자주권을 지켜야 한다는 것, 동맹과 외교를 통해 다른 해결바카라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선미가 툭 내뱉은 ‘처음부터 쫄아서 시키는 대로 하면 완전 호구잖아요.’라는 말도 제법 그럴듯한 논거로 바뀌었다.
‘어? 내가 그렇게 말했나?’
선미는 칠판을 멍하니 바라봤다.
강사는 이번에는 직접 발표하지 않고 학생 한 명을 앞으로 불러냈다. 아까 소영과 논쟁했던 남학생이었다. 남학생은 강사가 시범을 보인 대로 반대편의 세 가지 논거를 차례로 발표했다. 중간에 잠깐 말이 막히기도 했지만 무사히 발표를 마치자 박수가 터져 나왔다.
선미는 그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봤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소영에게 말리던 녀석이었다. 그런데 칠판에 정리된 논거를 순서대로 말했을 뿐인데도 제법 설득력이 있었다.
‘뭐야. 저 정도면 나도 할 수 있겠는데?’
강사가 학생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어때요? 처음에는 제각각 떠오르는 생각을 말했지만, 이렇게 모아서 정리하니까 훌륭한 입안문이 됐죠? 오늘 여러분이 직접 만든 겁니다.”
선미는 다시 칠판을 바라봤다. 자기가 한 말도 저렇게 정리할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말 잘하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머릿속에 멋진 문장이 줄줄 들어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흥, 그럼 나도 좀 배워볼 만하겠네.’
선미는 앞에 앉은 소영의 뒤통수를 흘끗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