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미는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화면에서는 쇼츠 영상이 정신없이 넘어갔다. 강아지가 춤을 추고, 누군가 라면을 먹고, 게임 캐릭터가 폭발했다. 그런데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소영과 있었던 일이 머릿속에서 자꾸만 되감기 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 질문에 대한 답은 뭔가요?”
“욕 말고.”
소영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또렷하게 재생됐다. 선미는 인상을 팍 찌푸리며 화면을 세게 밀어 올렸다.
“아, 진짜.”
다음 영상. 또 다음 영상. 그래도 소용없었다.
욕 말고.
“아~ 씨.”
그 충돌 이후, 선미는 소영이 하는 한마디 한마디가 신경이기 시작했다. 복도에서 스쳐 지나칠 때도 눈길이 갔고, 수업 시간에 발표할 때도, 친구들과 이야기할 때도 자꾸만 시선이 멈췄다. 문제는 소영을 보면 볼수록 더 열받는다는 거였다.
수업 중 선생님이 질문하면 소영은 지체 없이 바로 손을 들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선생님이 재차 물어도 소영은 머뭇거리는 법이 없었다.
“첫째는 이렇고요. 둘째는 이렇습니다.”
말이 막히지도 않았다. ‘어……’, ‘그게……’ 같은 군더더기도 없었다. 질문이 떨어지면 머릿속에서 답이 정리돼 줄줄 나오는 것 같았다. 선미는 삐딱하게 소영을 바라봤다.
‘저년은 말하기 전에 대가리에서 자막이라도 뜨나?’ 딱 선미다운 질투였다. 더 얄미운 건 소영이 먼저 시비를 거는 법도 없다는 거였다. 선미가 툭 던지면 툭 받아치고, 비꼬면 정확히 그만큼만 되돌려줬다. 싸움을 거는 쪽은 늘 선미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깨지는 기분이 드는 쪽도 늘 선미였다.
그날 밤도 선미는 침대에서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학급 단톡방에 올라온 공지 하나가 눈에 걸렸다.
「꿈의 학교 청소년 토론 수업 참가자 모집」
선미가 코웃음을 쳤다.
“토론은 무슨…….”
그냥 지나치려다가 손가락이 멈췄다. 다시 위로 올려 공지창을 눌렀다. 커리큘럼이 떴다.
[주장하는 법 / 근거 찾기 / 교차질의 / 반박 / 실전 디베이트]
선미의 눈이 한 단어에서 딱 멈췄다.
교차질의.
“…….”
며칠 전 자기를 탈탈 털어버린 바로 그거였다. 소영의 무덤덤한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그건 답이 아니잖아.’
선미의 눈썹이 꿈틀 했다.
“그래?”
좀 전까지만 해도 관심 없던 안내문을 이번에는 처음부터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지역 중학생 대상. 매주 수요일. 주장과 근거 만들기. 교차질의와 반박. 마지막 주에는 실전 디베이트 대회까지.
그 아래 굵은 글씨가 하나 더 있었다.
[정원 24명 — 신청 마감]
선미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 뭐야. 벌써 끝났어?”
공지 날짜를 확인했다. 오늘 낮에 올라온 거였다. 선미는 조금 의외라는 듯 화면을 다시 봤다. ‘이런 걸 하는 애들이 이렇게 많아?’ 맨 아래 작은 글씨가 하나 붙어 있었다.
[정원 마감 후 신청자는 대기자로 등록되며, 결원 발생 시 순서대로 참가할 수 있습니다.]
선미의 엄지가 다시 움직였다.
[대기 신청]
버튼을 누르자 지원 이유를 적는 칸이 나타났다.
[이 수업에 참여하고 싶은 이유를 적어주세요.]
선미는 한참 화면을 바라봤다.
말을 잘하고 싶어서.
몇 글자를 쓰다가 지웠다.
‘아우, 구려.’
다시 썼다. 토론을 배우고 싶어서. 이것도 잠깐 바라보다 싹 지웠다.
‘이건 더 구리네.’
선미는 잠시 생각했다. 그러다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이번에는 엄지손가락이 거침없이 움직였다.
[한소영을 이기고 싶어서.]
선미는 자기가 쓴 문장을 빤히 바라봤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거지.”
그대로 [대기 신청]을 눌렀다. 잠시 후 화면이 바뀌었다.
[대기 신청이 완료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 숫자가 하나 떴다.
[현재 대기 순번 : 3번]
“…….”
선미의 눈이 가늘어졌다.
별난 애들이 한둘이 아닌 모양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토론 따위를 왜 하나 싶었던 선미였다. 그런데 하루도 안 지났는데 이미 스물네 명이 먼저 자리를 차지했고, 자기 앞에도 두 명이나 줄을 서 있었다. 괜히 오기가 생겼다.
선미는 휴대폰을 가슴 위에 올려놓고 천장을 바라봤다. 전에 당했던 창피함이 속에서 다시 꿈틀거렸다. 배구 경기에서도 처참하게 진 다음 날이면 늘 그랬다. 왜 졌는지 궁금해지고, 어디가 약한지 알고 싶어졌다. 지는 것도 참기 힘들었지만, 진 채로 끝내는 건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다시 붙고 싶어졌다.
선미가 휴대폰을 다시 들었다. 화면에는 여전히 떠 있었다.
대기 순번 : 3번
“세 명쯤이야 뭐.”
누가 들으면 자기가 대기 순번을 실력으로 제칠 수 있는 줄 알 만한 말이었다. 선미는 코웃음을 치고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두고 봐라, 한소영. 다음엔 내가 턴다.”
며칠 뒤, 문자가 왔다.
[꿈의 학교 디베이트 수업 추가 참가자로 선정되었습니다.]
대기 3번이던 선미 차례까지 결국 돌아온 것이다.
선미는 콧방귀를 뀌었다. 매주 수요일 오후 6시부터 8시까지 진행되는 정규 수업이야 그렇다 치는데, 당장 이번 주 토요일 오리엔테이션에 ‘보호자 동반’이라고 적힌 대목이 영 귀찮았기 때문이다. 선미는 식탁에서 멸치 똥을 따고 있던 할머니의 등 뒤로 다가갔다.
“할머니, 토요일에 나랑 같이 가야 해.”
“내가 왜?”
“거기 안내문에 학부모 오리엔테이션이래.”
“나는 학부모가 아닌데?”
“그럼 학조모인가 보지.”
선미의 능청스러운 말에 할머니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지만, 토요일 아침이 되자 장롱 깊숙이 넣어두었던 외출복을 꺼내 입고 선미의 뒤를 따랐다.
오리엔테이션 장소인 강의실 문을 열었을 때 선미는 놀라 멈춰 섰다. 사람이 생각보다 훨씬 많았다. 아이들과 함께 엄마, 아빠들이 줄줄이 따라와 있었고, 선미처럼 할머니와 함께 온 애도 보였다. 강의실 뒤쪽은 보호자들로 거의 꽉 차 있었다.
선미는 슬쩍 주위를 둘러봤다. ‘뭐야. 토론 배우겠다는 애들이 이렇게 많아?’ 자기는 소영이 코나 한번 납작하게 해 주려고 신청한 건데, 다른 애들은 토요일 아침부터 부모까지 끌고 와 앉아 있었다. 대기자가 생긴 것도 괜히 그런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할머니도 놀랐는지 선미 귀에 대고 작게 말했다.
“요새는 이런 것도 많이 배우나 보다.”
“그러게.”
선미는 건성으로 대답하면서 빈자리를 찾았다. 빈자리를 찾아 눈을 굴리던 선미의 시선이 한 곳에 멈추었다. 그리고 정확히 그 순간, 상대방의 고개도 선미 쪽으로 돌아갔다. 한소영이었다. 소영은 선미를 보고도 별로 놀라지 않았다. 잠깐 눈썹을 올리더니, 마치 예상 밖의 사람을 만났다는 듯 말했다.
“너도 왔네?”
그 말 한마디가 선미의 심기를 건드렸다. 반가워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싫은 티를 내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네가 이런 데를?’ 하는 뜻이 숨어 있는 것처럼 들렸다.
“왜? 너만 올 수 있는 데야?”
“그런 뜻 아닌데.”
소영은 태연하게 대답하고는 다시 앞을 바라봤다. 그게 더 얄미웠다.
“똥송한 니 얼굴보다 나아.”
소영의 고개가 다시 돌아왔다. 이번에는 정말 무슨 말인가 싶은 표정이었다.
“갑자기 내 얼굴이 왜 나와?”
“몰라. 그냥 재수 없어서.”
치익, 삐이익.
“자, 거기 뒤에 서 있는 두 학생. 기싸움은 잠시 뒤로 미뤄두고요.”
마이크를 잡은 강사가 웃음기 어린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강의실 여기저기서 킥킥거리는 소리가 터졌다. 선미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소영은 잠깐 선미를 바라보다가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그게 또 선미의 속을 긁었다.
‘두고 봐.’ 선미는 소영의 뒤통수를 노려봤다. 앞으로 매주 수요일 저녁, 이 교실에서 조용히 수업만 듣고 끝나기는 글렀다.
“자, 다들 자리에 앉아주세요.”
강사가 마이크를 고쳐 잡았다. 웅성거리던 강의실이 조금씩 조용해졌다. 뒤쪽에 앉은 부모들 중 몇몇은 수첩을 꺼내 들었다.
“제가 먼저 질문 하나 드릴게요. 요즘 아이들이 예전보다 아는 게 적을까요, 많을까요?”
부모들 사이에서 작은 웃음이 났다.
“아마 더 많을 겁니다. 궁금한 게 있으면 바로 검색하죠. 이제는 AI한테 물어보면 요약까지 해서 알려줍니다.”
턱을 괴고 있던 선미가 눈을 살짝 들었다. ‘거봐. 공부 안 해도 되잖아.’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나오는 정보가 다 맞는 건 아니죠. 서로 정반대 이야기를 하는 경우도 많고요. 그때 뭘 믿을 건지, 왜 그걸 믿는지,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강사가 말을 이었다. 선미는 다시 턱을 괴었다. 화면 슬라이드를 넘기자 대형 스크린에 한 글자만 떠 있었다.
왜?
“앞으로 아이들은 이 질문을 많이 받게 될 겁니다. 학교에서도 그렇고, 입시에서도 그렇고, 나중에 슬롯에 나가서도 그렇습니다.”
이번에는 부모들 몇 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는 답을 아는 게 중요했다면, 이제는 왜 그런 답을 했는지까지 보여줘야 하는 일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근거가 뭔지, 반대쪽에서는 어떻게 볼 수 있는지, 내 생각에 빠진 건 없는지까지요.”
강사는 잠깐 멈췄다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이 수업은 말만 번지르르하게 잘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스스로 생각한 걸 말하고, 상대방 말을 경청하고, 필요하면 자기 생각도 고쳐보는 연습을 할 겁니다.”
선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뭐야. 말 잘하는 거 배우는 데 아니었어?’ 선미의 표정이 더 시큰둥해졌다. 자기는 그런 거 하러 온 게 아니었다. 소영이 몇 줄 앞에 앉아 있었다. 선미는 그 뒤통수를 한번 노려봤다. 말을 듣고 생각을 고치기는 무슨. 저 재수 없는 애부터 말로 한번 제대로 눌러놓는 게 먼저였다.
“토론은 상대를 꺾는 싸움이 아닙니다. 자신의 생각을 세밀히 들여다보는 행위죠.”
강사가 이어 말했다. 선미는 속으로 대꾸했다. ‘선생님은 그렇게 하세요. 난 쟤 코부터 납작하게 만들 거니까.’ 그리고는 소영의 뒤통수를 다시 노려봤다.
“자, 백문이 불여일견이죠. 우리 한 번 해볼까요.”
강사가 리모컨을 누르자 화면이 바뀌었다.
[고대 그리스에서 배우는 오늘의 국제정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