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코를 납작하게 해 주마

by바담풍

《일진소녀, 세상과 맞짱 뜨다》는 제가 오랫동안 학생들을 가르치며 보고 듣고 겪었던 일들을 바탕으로 쓴 청소년 성장소설입니다. 실제 있었던 일과 인물에서 출발했지만, 이야기의 재미를 위해 사건을 각색하고 때로는 과장하기도 했습니다. 등장인물과 사건에는 사실과 허구가 함께 섞여 있습니다.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던 중학생 배구부 에이스 선미. 싸움도 잘하고 운동신경도 뛰어나지만, 정작 말로 따지기 시작하면 얼굴부터 빨개지고 머릿속은 하얘진다. 그런 선미 앞에 서울에서 온 ‘말빨 최강’ 전학생 소영이 나타난다. 소영의 코를 납작하게 해 주겠다는 오기로 시작한 디베이트. 토론대회, 보이스피싱 사건, 주니어 디베이트 코치 자격과 초등 디베이트 자원봉사를 거치며 선미는 조금씩 달라진다.




찬반 양측의 입안문 발표가 끝나자 강사가 다시 앞으로 나섰다.


“자, 이제 교차질의 시간입니다. 상대편의 주장을 듣고 궁금한 점이나 논리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을 질문하는 거예요. 오늘은 누구나 질문할 수 있습니다.”


먼저 반대편에서 손이 올라갔다.


“찬성 편은 전쟁을 피해야 한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강대국이 계속 무리한 요구를 하면 어떻게 할 건데요?”


소영이 대답했다.


“무조건 들어주자는 건 아니에요. 싸우기 전에 협상부터 해봐야죠.”

“협상도 안 하겠다고 하면요?”


잠깐 침묵이 흘렀다. 그때 앞줄에 앉아 있던 남학생이 손을 번쩍 들었다.


“그냥 두 나라 왕을 한 방에 가둬놓으면 안 돼요? 합의할 때까지 못 나오게.”


아이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졌다.


“그럼 안에서 싸우면 어떡해?”


누군가 묻자 남학생이 어깨를 으쓱하며 했다.


“둘이 싸우는 거죠. 적어도 전쟁은 안 나잖아요.”


이번에는 소영까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그런데 아테네가 훨씬 강하잖아요. 왜 자기보다 약한 나라 왕이랑 갇혀 있으려고 하겠어요?”

“그럼 강제로 가두면 되죠.”

“누가요? 아테네보다 힘센 나라가 있어야 가능하잖아요.”


남학생이 머리를 긁적였다.


“아…… 그러네.”


아이들이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딱 중학생다운 발상이었다. 복잡한 국제정치니 힘의 균형이니 하는 문제는 제쳐놓고, 싸움을 벌이려는 두 나라의 지도자를 한 방에 가둬버리자는 것이다. 황당하고 엉뚱했지만, 생각해 보면 수많은 사람이 죽는 전쟁보다 그 편이 훨씬 나을 것 같기도 했다.

강사는 웃음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좋아요. 당시 아테네에는 왕이 없었지만, 두 나라 지도자를 만나게 해서 전쟁을 막자는 생각이죠. 그런데 방금 질문을 주고받으면서 중요한 문제를 발견했네요. 힘의 차이가 너무 크면 협상장에 앉히는 것부터 어려울 수 있다는 거예요.”

“방금 여러분이 한 게 바로 교차질의입니다. 처음에는 그럴듯해 보였던 생각도 질문을 주고받다 보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가 드러나죠.”


선미는 킥킥 웃다가 소영을 흘끗 바라봤다. 또 저 재수탱이의 질문 한 방에 남학생이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웃기기만 한 게 아니었다. 자기도 처음에는 두 왕을 가둬놓으면 되겠다고 생각했으니까.


이렇게 입안 교차질의가 끝나고 양 팀의 반박과 반박 교차질의까지 한 후 토론이 끝났다.


“좋아요. 오늘 토론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강의실에 박수가 터졌다. 뒤쪽에서 지켜보던 학부모들도 제법 흥미로운 표정이었다. 어떤 부모는 자기 아이가 발표할 때보다 더 열심히 박수를 쳤다.

강사가 학부모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어떠세요? 우리 아이들, 생각보다 말 잘하죠?”


여기저기서 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런데 방금 아이들이 특별히 국제정치를 공부해서 저런 말들을 한 걸까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아닙니다. 상황을 하나 주고, 선택하게 하고, 왜 그런지 물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여러 사람의 생각을 모아 발표하도록 했죠. 아이들은 생각이 없는 게 아닙니다. 생각을 꺼내 볼 기회가 별로 없는 거죠.”


강사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는 아이들한테 답은 참 많이 물어봅니다. 그런데 ‘너는 왜 그렇게 생각해?’는 의외로 많이 묻지 않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우리 수업에서는 정답을 가르치기보다 스스로 생각하고, 그 생각을 말로 표현하는 연습을 하려고 합니다.”


옆에 있던 할머니가 갑자기 박수를 쳤다. 짝짝짝. 선미가 흘겨봤다.


“뭐가 그렇게 좋아?”

“좋은 말 하잖아.”


선미는 입을 삐죽였다. ‘좋기는 뭐가 좋아.’ 그런데 이상하게도 조금 전 강사가 했던 그 질문 하나는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너는 왜 그렇게 생각해?’


강사는 마지막 슬라이드를 띄웠다.


“다음 주부터 매주 수요일, 저녁 여섯 시부터 여덟 시까지 정규 수업을 진행합니다. 그전에 이 교실에서 꼭 지켜야 할 세 가지 약속이 있습니다.”


화면에 세 줄이 나타났다.

첫째, 수업은 꼭 참여한다.

둘째, 사람이 아니라 주장을 비판한다.

셋째, 욕설과 비하 표현 금지.

강사가 첫 번째 문장을 가리켰다.


“수업에는 빠지지 말고 참석해 주세요. 숙제도 있습니다. 토론은 실제로 말하는 시간보다 준비하는 과정에서 더 많은 걸 배우기도 하거든요.”


‘숙제까지 있다고?’ 선미가 입술을 삐죽였다.


“둘째, 사람을 공격하지 않고 주장에 반박합니다. 누가 말했느냐가 아니라 무슨 말을 했느냐가 중요해요.”


“셋째, 욕설과 비하 표현은 절대 사용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욕을 잘해야 세 보이고, 만만하게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친구도 있을 거예요. 욕을 먹고도 가만히 있으면 지는 것 같고요. 사춘기 아이들의 특성이죠.”


“그런데 욕을 한다고 상대를 이기는 건 아니에요. 오히려 반박할 말이 없다는 걸 스스로 드러낼 수도 있죠. 토론에서는 욕을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근거를 들어 설명하는 사람이 강한 사람입니다.”


몇몇 아이들이 피식 웃었다. 강사가 마지막 문장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그러니까 이 강의실에서는 욕설도, 상대를 깎아내리는 말도 금지입니다. 아무리 화가 나도 말로 해결하는 연습을 해봅시다.”


선미가 슬쩍 앞을 봤다. 마침 소영도 뒤를 돌아보고 있어 눈이 마주쳤다. 소영의 입가에 아주 옅은 웃음이 번졌다. 선미는 그 표정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

‘뭘 봐.’ 입 모양으로 쏘아붙이자 소영이 화면을 한번 가리켰다.

욕설·비하 표현 금지.

선미가 다시 입술을 움직였다.

‘닥쳐.’

이번에는 소영이 손가락 두 개를 슬쩍 폈다. 비하와 욕설 수칙에 두 번 걸렸다는 뜻 같았다. 선미가 눈을 부라리자 소영은 얼른 앞을 봤다. 그런데 어깨가 아주 조금 들썩였다. 웃음을 참고 있는 게 분명했다.

‘저 재수탱이가 진짜.’


“그럼 오늘 오리엔테이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다음 주 수요일에 만나요.”


강사의 말이 끝나자 의자 끄는 소리가 한꺼번에 났다. 선미도 가방을 집어 들었다. 다음 주 수요일, 저녁 여섯 시.

선미는 소영의 뒤통수를 다시 봤다. 배울 거 빨리 배우고, 저 재수 없는 서울 것부터 한번 제대로 눌러줄 생각이었다.


“선미야,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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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엔테이션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는 해가 제법 기울어 있었다. 할머니는 외출복을 갈아입으려다 옷장 안에서 장바구니 하나를 떨어뜨렸다. 오래 써 손잡이가 해지고 군데군데 색이 바랜 천가방이었다. 선미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할머니, 이거 아직도 안 버렸어?”


할머니가 장바구니를 주워 들었다.


“이 멀쩡한 걸 왜 버려.”

“그때 그 돈 넣었던 거잖아.”


할머니의 손이 잠깐 멈췄다. 작년 이맘때였다. 학교에서 돌아온 선미가 현관문을 열었을 때, 할머니는 거실 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있었다. 처음에는 무슨 일이 난 줄도 몰랐다. 떡볶이를 사 먹고 들어오던 길이라 입에서는 아직 매운 냄새까지 났다.

그날 할머니가 잃은 돈은 삼천만 원이었다. 십 년 넘게 남의 집 청소도 하고 온갖 궂은일을 하며 악착같이 모은 돈이었다. 시작은 전화 한 통이었다. 내가 울면서 말했다고 했다.


“할머니, 나 좀 살려줘.”


영락없는 선미의 목소리였다. 뒤이어 어떤 남자가 전화를 넘겨받아 선미가 옆 동네 애들과 큰 싸움을 벌여 사람을 다치게 했다고 했다. 당장 돈을 주지 않으면 경찰에 넘기고 인생을 끝장내겠다고 겁을 줬다. 할머니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평소 선미가 남자애들과 툭하면 치고받고 다녔으니, 그날만큼은 정말 큰 사고를 쳤다고 생각한 것이다.

할머니는 나중에 그렇게 말했다.


“그때는 네가 또 사고 쳤구나, 그 생각밖에 안 들더라.”


선미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억울하면서도 차마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내가 사람 잡을 정도는 아니거든?”

“그걸 내가 그때 어떻게 아냐.”


할머니는 장바구니를 접다가 문득 피식 웃었다.


“나도 아까 그 토론인지 뭔지 좀 배웠으면 그놈들한테 안 당했을지도 모르겠다.”

“할머니가 토론을?”

“왜. 전화받자마자 벌벌 떨지만 말고 ‘니가 누군데?’, ‘증거가 뭐냐?’ ‘선미 아직 어린애야, 촉법소년이라고’ 하고 하나씩 물어봤으면 되었잖아.”


“오, 할머니. 좀 배웠는데.”

“오늘 두 시간 앉아 있었잖냐.”


할머니가 코웃음을 쳤다.


“삼천만 원 내고 배운 것보단 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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