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화 뛰지 못한 코트

by바담풍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던 중학생 배구부 에이스 선미. 싸움도 잘하고 운동신경도 뛰어나지만, 정작 말로 따지기 시작하면 얼굴부터 빨개지고 머릿속은 하얘진다. 그런 선미 앞에 서울에서 온 ‘말빨 최강’ 전학생 소영이 나타난다. 소영의 코를 납작하게 해 주겠다는 오기로 시작한 디베이트. 토론대회, 보이스피싱 사건, 주니어 디베이트 코치 자격과 초등 디베이트 자원봉사를 거치며 선미는 조금씩 달라진다.















코트 위의 시간이 그대로 멈춰 섰다. 선미의 공격으로 전광판의 숫자는 1점 올라갔지만, 누구도 환호하지 못했다. 선미는 차가운 마룻바닥에 몸을 웅크린 채 무릎을 움켜쥐었다. 손목도 아팠고 발목도 욱신거렸지만, 그런 건 제대로 느껴지지도 않았다. 오른쪽 무릎 안쪽에서 뭔가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먼저 들었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눈앞이 붉었다 노랬다를 반복했다.


“선미야! 강선미!”


감독이 코트 안으로 뛰어들었다. 뒤이어 의무대원들이 들것을 들고 달려왔다.


“나 괜찮아요.”


선미는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


“가만있어!”


“괜찮다니까요.”


오른쪽 무릎 안에서 뭔가가 ‘툭’ 하고 끊어지는 느낌이었다. 아픈 것도 아픈 거였지만, 그보다 먼저 ‘이거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바닥에 손을 짚고 몸을 반쯤 일으켰다. 그리고 오른발에 힘을 주었다. 순간 무릎이 푹 꺾였다.


“윽! 왜 이래……?”


감독이 선미의 어깨를 붙잡았다.


“움직이지 마. 제발.”


의무대원들이 선미를 들것에 눕혔다.


“감독님, 저 조금만 쉬었다 다시 들어갈게요.”


감독은 대답하지 않았다.


“진짜예요. 붕대 더 세게 감으면 돼요.”


이번에도 아무 대답이 없었다.


선미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5점만 더 하면 되잖아요.”


들것이 천천히 들렸다. 그제야 선미는 코트에 남아 있는 아이들을 보았다. 민지는 두 손으로 입을 막고 있었고, 지현이는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주아는 울음을 참느라 눈가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야.”


선미가 주아를 불렀다. 주아가 고개를 들었다. 선미는 뭐라도 멋있는 말을 하고 싶었다. 걱정하지 말라고 하든지, 반드시 이기라고 하든지. 그런데 입에서 나온 말은 고작 이것뿐이었다.


“공…… 떨어뜨리지 마.”


주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알았어, 이 미친년아.”


선미가 희미하게 웃었다.


들것이 코트 밖으로 움직였다. 선미는 누운 채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천장의 형광등이 하나씩 머리 위를 지나갔다. 그 사이사이로 네트와 전광판, 유니폼을 입은 아이들이 보였다가 사라졌다.

선미가 들것에 실려 코트 밖으로 나가는 동안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전광판은 22대 19. 조금만 더 따라붙으면 승부를 뒤집을 수도 있는 점수였다. 그러나 조금 전까지 코트를 휘젓던 에이스의 자리가 텅 비자, 숫자보다 훨씬 큰 구멍이 생긴 것 같았다. 그때 주아가 유니폼 소매로 눈가를 거칠게 훔쳤다.


“야!”


아이들이 주아를 바라봤다. 평소 같으면 한마디만 해도 분위기를 엉뚱한 데로 끌고 갈 주아였다. 하지만 지금은 웃음기가 하나도 없었다.


“선미가 저렇게까지 하고 나갔는데 우리 여기서 끝낼 거야?”


주아가 코트 바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공 하나만 더 살려. 내가 어떻게든 띄울 테니까.”


민지가 이를 악물었다.


“올리기만 해. 내가 다 뿌려 줄게.”


주장 지현도 말없이 손바닥을 내밀었다.


아이들의 손이 하나둘 그 위로 포개졌다.


“하나, 둘, 셋. 일천!”


경기가 다시 시작됐다. 상대 팀의 스파이크가 코트 구석으로 총알처럼 날아들었다. 주아가 몸을 던졌다. 등이 바닥에 떨어지는 쾅! 하는 소리가 관중석까지 들릴 만큼 컸다. 공은 주아의 팔을 맞고 높이 떠올랐다. 민지가 네트 밑으로 달려들었다. 자세가 무너진 상태에서 두 손을 머리 위로 뻗었다. 공이 아슬아슬하게 네트를 따라 흘렀다.


“지현 언니!”


지현이 달려왔다. 한 걸음. 두 걸음. 그리고 힘껏 뛰어올랐다.


파앙!


공이 상대 블로커의 손끝을 맞고 코트 밖으로 튕겨 나갔다. 22대 20. 일천 중 응원석에서 함성이 터졌다. 그 한 점이 시작이었다. 주아는 공이 어디로 날아오든 몸부터 던졌다. 무릎으로 미끄러지고, 배로 바닥을 쓸고, 때로는 광고판 바로 앞까지 굴러가면서도 공을 살려냈다.


“안 죽었어! 안 죽었어!”


주아가 바닥에 엎어진 채 소리쳤다. 민지가 달려와 공을 올렸다. 지현의 스파이크가 다시 상대 코트에 꽂혔다. 점수 차가 하나씩 줄어들었다.

22대 21.

23대 22.

그리고 마침내 24대 24. 듀스.


관중석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선미가 빠진 일천 중의 패배를 예상하던 사람들도 이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코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들은 이미 엉망이었다.


주아의 팔꿈치와 무릎에는 시퍼런 멍이 올라와 있었고, 민지는 손가락을 몇 번이나 털어가며 토스를 올렸다. 지현은 숨을 들이쉴 때마다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그런데도 아무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상대의 강한 서브가 날아오자 주아가 받아냈다. 민지의 토스가 올라가자마자 지현이 뛰었다. 상대 블로커 두 명이 동시에 따라붙었다. 지현은 공을 세게 내리치는 대신 손목을 살짝 틀었다.


툭.


공이 블로커의 손끝을 스치고 빈 곳으로 떨어졌다.


득점.


다음 랠리에서도 주아가 바닥에 몸을 던져 공을 살려냈고, 민지가 악착같이 따라붙어 토스를 올렸다. 마지막 공이 상대 코트에 떨어지는 순간 주심의 호각이 길게 울렸다.


삐익!


2세트, 일천 중 승.

주아가 그대로 코트 바닥에 드러누웠다. 민지가 주아 위로 덮쳐 들었고 지현이까지 달려들었다. 아이들은 서로를 껴안고 소리를 질렀다. 웃는 건지 우는 건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주아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소리쳤다.


“야! 우리 선미 없이도 이겼다!”


그러자 지현이 주아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았다.


“그딴 말하지 마. 아직 안 끝났어.”


주아가 벌떡 일어났다.


“맞다. 한 세트 더!”


하지만 기적은 거기까지였다. 마지막 3세트가 시작되자 아이들의 몸은 눈에 띄게 무거워졌다. 2세트에서 모든 것을 쏟아부은 탓이었다. 주아는 조금 전까지 몸을 날려 받아내던 공에 반 박자씩 늦었고, 민지의 토스는 점점 네트 가까이 붙었다. 지현은 이를 악물고 뛰었지만 상대 블로커의 손끝을 넘기에는 점프가 조금씩 낮아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결정적인 순간마다 선미의 빈자리가 보였다. 평소라면 선미가 올라가 내리꽂았을 공이었다.


점수는 빠르게 벌어졌다.

11대 6.

13대 7.

점수는 순식간에 14대 8로 벌어졌다. 매치 포인트.

마지막 순간, 상대 팀의 서브가 일천 중 코트 빈 곳에 허무하게 떨어졌다.

삐이익―!


경기가 끝났어도 아이들은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지현은 네트 앞에 선 채 고개를 숙였고, 민지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주아는 바닥에 엎드린 자세 그대로 얼굴을 들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그렇게 시끄럽던 체육관에서 일천 중 아이들 주변만 소리가 사라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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