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화 뛰지 못한 코트

by바담풍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던 중학생 배구부 에이스 선미. 싸움도 잘하고 운동신경도 뛰어나지만, 정작 말로 따지기 시작하면 얼굴부터 빨개지고 머릿속은 하얘진다. 그런 선미 앞에 서울에서 온 ‘말빨 최강’ 전학생 소영이 나타난다. 소영의 코를 납작하게 해 주겠다는 오기로 시작한 디베이트. 토론대회, 보이스피싱 사건, 주니어 디베이트 코치 자격과 초등 디베이트 자원봉사를 거치며 선미는 조금씩 달라진다.



경기 날짜는 여지없이 찾아왔다. 선미는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팀원들과 학교 버스를 타고 용인에 있는 배구 실내체육관으로 향했다. 어제 예선전에서 선미 없이 조 2위로 간신히 본선 진출하고 오늘 8강을 겨루는 시합이었다. 어제는 리그전으로 승패와 상관없이 세 번을 경기할 수 있었지만 오늘은 토너먼트로 한 번만 져도 짐을 싸고 집으로 가야 했다.


버스 안에서는 예전의 왁자지껄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경기 때마다 항상 브이로그를 찍는 희선이도 오늘은 잔뜩 긴장했는지 잠자코 앉아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여중생 특유의 깨발랄한 모습들이 버스 안을 가득 메웠을 것이다.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놓고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발을 구르고, 가사를 전부 외운 아이돌 노래를 따라 부르며 흥을 주체하지 못해 온몸을 들썩였을 것이다. 창문 바깥 풍경을 보며 뮤직 비디오의 여주인공처럼 아련한 표정을 짓다가도, 서로 눈이 마주치면 이내 깔깔거리며 숨 넘어가게 목젖을 내보이고 웃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이 모두가 선미 때문이란 것을 버스 안의 무거운 침묵이 말해주고 있었다. KB전국 청소년 배구대회, 강력한 우승 후보였던 일천중학교가 에이스 중의 에이스의 부상으로 결승 진출이 불투명한 상태였다. 아니 결승은 고사하고 준결승에나 오를 수 있으려나 하는 절망감이 버스 안의 공기를 짓누르고 있었다.


선미는 그만큼 일천중학교 배구부에서의 존재감이 컸다. 어제 리그전에서도 겨우 1승 1패로 팀 득실차에서 간신히 2위에 올라 본선에 올라간 터였다. 모두가 선미만을 바라보고 있는 일천중학교 여자배구부의 현실이었다.


버스가 덜컹거릴 때마다 아이들의 한숨 소리도 덩달아 덜컹거렸다. 창밖으로 슬며시 다가오는 실내체육관의 거대한 지붕이 오늘따라 무덤처럼 보였다. 에이스가 빠진 코트라니,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명치끝이 막혀왔다.


“야, 대박. 야야! 이것 좀 봐봐! 미쳤어 정말!”


그때 버스 맨 뒷자리에서 정적을 찢는 돌고래 비명이 터져 나왔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팀의 리베로이자, 일천 중 자타공인 ‘뇌 맑은 여신’ 주아였다. 주아는 지금 버스 안의 공기가 장례식장 뺨치게 무겁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혼자만 필터를 백 개쯤 끼운 핑크빛 세상에 살고 있었다.


주아가 옆자리에 앉아 영혼이 탈출한 표정으로 창밖을 보던 세터 민지의 어깨를 짤짤 흔들었다. 민지가 귀찮다는 듯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주아는 자신의 스마트폰 화면을 코앞까지 들이밀었다.


“이것 봐! 오늘 배구장에 연예인 온대! 나 방금 인스타 스토리에서 봤잖아!”


“…….”


“대박이지? 나 오늘 앞머리 볼륨 잘 살려야 돼. 카메라에 잡히면 어떡해? 야, 민지야. 내 앞머리 가르마 5대 5가 나아, 6대 4가 나아? 솔직히 말해줘, 현기증 나니까.”


민지는 깊은 한숨을 쉬며 주아의 손을 밀어냈다. 지금 우승 후보였던 우리가 본선 탈락을 걱정하게 생겼는데, 연예인이 눈에 들어오고 앞머리 가르마 비율이 눈에 들어오겠냐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앞자리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주장 지현이도 결국 참지 못하고 도끼눈을 한 채 뒤를 돌아보았다.


“이주아, 너 지금 장난해? 선미가 다쳐서 우리 오늘 준결승도 간당간당해. 정신 안 차려?”


주장의 매서운 일침에 버스 안은 더 차갑게 얼어붙었다. 보통의 중학생이라면 이 타이밍에 깨갱하고 꼬리를 내리는 것이 정상이었다. 하지만 주아는 ‘깨발랄 여신’ 타이틀을 고스란히 달고 있는 일천 중 최고의 긍정 왕이었다.

주아는 눈을 똥그랗게 뜨고는 오히려 당당하게 가방에서 반짝이는 하트 모양 집게핀을 꺼내 머리에 꽂으며 말했다.


“에이, 언니! 선미가 없으면 우리가 있잖아요!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위기 속에 영웅이 탄생하는 법이라고 어제 웹툰에서 그랬단 말이에요. 오늘 내 수비 레이더 완전 풀가동이라니까요. 공이 바닥에 닿기 전에 내 몸이 먼저 날아갈 걸요.”


말은 청산유수였다. 주아는 비장한 표정으로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하지만 그러다가 삐끗해서 무릎을 버스 앞 좌석 등받이에 쿵 찧었다.


“아얏! 헐, 내 무릎…… 깨진 거 아냐? 나 오늘 리베로인데 장애물 발생!”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며 엄살을 부리는 주아의 모습에, 결국 민지가 풋 하고 실소를 터뜨렸다. 앞자리에서 잔뜩 독기를 품고 있던 주장 지현이도 기가 찬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어휴, 저 꿀밤 때리고 싶은 걸 고대로 경기장에서 상대 팀 스파이크 때릴 때 써야 하는데.”


주아의 대바카라 없는 발랄함은 분위기를 바꾸는 이상한 마력이 있었다. 질질 짜고 있어 봐야 다친 선미의 무릎이 나아 돌아오는 것도 아니었다. 어차피 들이받아야 할 경기라면, 주아처럼 머리 비우고 들이받는 게 답일지도 몰랐다.

체육관 주차장에 버스가 멈춰 서고, 문이 열렸다. 주아는 벌써 가방을 한쪽 어깨에 메고 제일 먼저 문 앞으로 튀어나갔다.


“가자, 일천 중! 오늘 이기고 연예인이랑 사진 찍는 거다! 고고!”


주아의 촐랑거리는 발걸음을 따라 가방에 달린 커다란 인형 키링들이 짤랑거리며 춤을 추었다. 무겁기만 했던 일천 중 배구부 아이들의 발걸음에 아주 미세하지만, 톡 쏘는 탄산 같은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경기장에 들어서는 순간 선미는 온몸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다리는 족쇄라도 찬 듯 무거웠고, 심장은 박자를 놓친 드럼처럼 제멋대로 뛰었다.


원래 경기장은 선미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었다. 관중들의 함성, 코트에 들어설 때면 괜히 어깨가 으쓱해지는 기분, 시합 직전 온몸을 간질이는 긴장과 흥분. 그 모든 것이 좋았다. 공부도, 말도 자신 없었지만 코트에만 들어서면 선미는 누구보다 당당해질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똑같은 체육관이고 똑같은 관중석인데도 공기부터 낯설었다. 쾌적한 실내인데 숨을 들이쉴 때마다 축축하고 무거운 안개가 가슴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예전에는 자신을 향한 것처럼 들리던 관중들의 함성도 오늘은 멀게만 느껴졌다.


선미는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봤다. 무릎을 단단히 감싼 두꺼운 압박 붕대가 오늘따라 쇠사슬처럼 답답했다. 깁스를 한 것도 아니었다. 마음만 먹으면 코트에 들어가 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감독과 팀 닥터는 단호했다.


“여기서 더 다치면 앞으로 배구 인생 끝이야.”


그 말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렇다고 가만히 벤치에 앉아 경기를 지켜보는 것도 선미에게는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본선 8강전을 간신히 이기고 4강전에 들어갔다. 예상대로 일천중학교는 처참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1세트를 허무하게 내준 데 이어, 2세트마저 18대 10으로 뒤지고 있었다. 선미가 없는 공격 진영은 상대 팀의 높은 블로킹 벽 앞에서 길을 잃었다. 세터 민지의 토스는 흔들렸고, 수비 전문 리베로인 주아가 온몸을 던져 공을 받아내며 필사적으로 버텼지만 역부족이었다. 주아의 이마에는 땀이 비 오듯 흘렀고, 평소의 장난기 가득하던 얼굴은 이미 흙빛으로 변해 있었다.

점수판의 숫자가 20대 11로 벌어지는 순간, 선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감독님, 저 뛸게요. 붕대를 더 세게 감으면 할 수 있어요.”


선미의 다급한 외침에 벤치의 모든 시선이 쏠렸다. 감독은 미쳤냐는 듯 선미의 어깨를 눌러 앉히려 했지만 선미의 눈빛은 완강했다. 이대로 허무하게 팀의 탈락을 지켜보느니 차라리 코트 위에서 부서지는 게 나았다.


“딱 5점만, 5점만 버텨서 분위기만 바꿀게요.”


선미는 감독이 말릴 틈도 주지 않고 제자리에서 두어 번 펄쩍 뛰어올랐다. 마지막에는 블로킹을 하듯 두 팔까지 번쩍 치켜들며 높이 뛰어올랐다.


“보세요. 하나도 안 아프잖아요.”


뛸 때마다 무릎 안쪽이 찌릿했다. 불안했지만 지금은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니었다. 어떻게든 이번 세트를 가져와야 했다. 선미의 애원에 결국 감독은 고개를 숙이며 교체 사인을 보냈다. 선미가 코트로 걸어 들어가자, 관중석에서 웅성거림과 함께 환호가 터져 나왔다.


“선미가 나온다! 파이팅 강선미!”


응원 나온 일천 중 학생들이 외쳤다. 숨을 몰아쉬던 주아가 선미를 보며 눈을 커다랗게 떴다.


“너 진짜 미쳤어? 왜 들어와!”


“시끄러워. 이주아, 공만 띄워. 내가 다 때릴 테니까.”


에이스의 복귀는 마법과도 같았다. 선미는 들어서자마자 민지의 토스를 받아 상대의 블로킹 벽을 찢어발기는 강력한 스파이크를 성공시켰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일천 중 쪽으로 넘어왔다. 21대 15, 이어 22대 18. 선미의 통증을 잊은 활약으로 점수 차가 무서운 속도로 좁혀졌다. 무릎이 찌릿하게 끊어질 것 같았지만 선미는 이를 악물었다. 조금만 더, 3점만 더 내면 이 세트를 가져올 수 있었다.


하지만 비극은 순식간에 찾아왔다. 세터 민지가 올린 토스가 포물선을 그리며 정점으로 향했다. 선미는 날아오는 공을 향해 용수철처럼 뛰어올랐다. 부상당한 다리는 잊을 채, 득점해야 한다는 본능만으로 허리를 활처럼 휘었다. 동시에 팔을 뒤로 힘껏 젖혔다가 떨어지는 공을 힘껏 내리쳤다.


콰앙!


공이 상대 코트 바닥에 꽂히는 강렬한 파열음이 체육관을 울렸다. 그 순간 선미는 손목뼈가 으드득 부서지는 통증을 느꼈다. 자전거와 넘어지면서 짚을 때 충격이 되살아 났다. 이 통증으로 착지마저 엉망이 되었다. 오른발이 먼저 바닥에 닿는 순간 체중을 지탱하던 무릎에 송곳으로 찌르는 극심한 통증을 느꼈다. 예기치 못한 통증에 순간적으로 다리에 살짝 힘을 뺀다는 게 발목마저 뱅글 뒤틀어지고 말았다.

손목과 무릎, 그리고 발목이 동시에 접질리며 엄청난 고통이 밀려왔다. 선미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굳어버린 몸으로 코트 바닥에 쓰러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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