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서울에서 온 전학생

by바담풍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던 중학생 배구부 에이스 선미. 싸움도 잘하고 운동신경도 뛰어나지만, 정작 말로 따지기 시작하면 얼굴부터 빨개지고 머릿속은 하얘진다. 그런 선미 앞에 서울에서 온 ‘말빨 최강’ 전학생 소영이 나타난다. 소영의 코를 납작하게 해 주겠다는 오기로 시작한 디베이트. 토론대회, 보이스피싱 사건, 주니어 디베이트 코치 자격과 초등 디베이트 자원봉사를 거치며 선미는 조금씩 달라진다.















의사의 입에서 ‘선수 생활은 힘들다’는 말이 나왔을 때도 선미는 덤덤했다. 지나치게 건조한 의사의 목소리가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질질 짜는 위로보다는 이렇게 냉정하게 팩트만 말해주는 게 선미 체질에는 맞았다.

벽에 걸린 모니터에는 선미의 무릎 MRI 사진이 떠 있었다. 허옇고 시커먼 선들이 뒤엉킨 가운데 십자인대가 끊어져 있었다. 매일 코트가 부서져라 뛰어다니던 자신의 오른쪽 무릎 속이었다.


“최소 1년은 코트에 못 들어가요.”


“1년이요?”


선미가 되물었다. 딱히 충격을 받아서가 아니었다. 생각보다 기간이 길어서 잠시 머릿속으로 계산해 본 것뿐이었다.


“그것도 재활이 아주 잘됐을 때 이야기고요. 선수 생활은…… 지금 단계에서는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의사는 말을 흐리며 모니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장담하기 어렵다.” 선미도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았다. 어른들이 안 좋은 말을 곧이곧대로 하지 않을 때 쓰는 말이었다. 그래도 선미는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그럼 재활 빡세게 하면 중3 때는 다시 뛸 수 있는 거잖아요? 그죠, 감독님?”


선미가 옆에 서 있던 감독을 돌아보았다. 평소 훈련장에서는 사자처럼 고함을 지르던 감독이 입술을 꾹 깨문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선미와 눈이 마주치자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선미는 이번에는 휠체어 뒤에 서 있는 할머니를 올려다봤다.


“할머니, 왜 그래? 나 이제 겨우 중2야. 1년 쉬고 중3 때 다시 하면 되지, 뭐.”


출장 중인 아빠 대신 병원으로 달려온 할머니도 대답하지 않았다. 거칠고 주름진 손으로 선미의 어깨만 가만히 눌렀다. 진료실에 묵직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무도 선미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지 않았다. 그제야 선미도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왜 저러지?”


자신을 불쌍한 사람처럼 바라보다가 눈이 마주치면 슬쩍 피했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원래 눈물이 많은 편도 아니었지만, 무엇보다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았다. 선미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허벅지부터 발목까지 오른쪽 다리를 통째로 감싸고 있는 커다란 통깁스가 보였다.


“선미야…….”


할머니가 결국 코를 훌쩍였다.


굵은 눈물방울 하나가 선미의 어깨 위로 툭 떨어졌다.


“아이고, 우리 선미 불쌍해서 어째…….”


“아이, 할머니. 나 안 죽어. 왜 울고 그래, 사람 민망하게.”


선미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통깁스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계산을 시작했다.

소년체전, 추계대회, 전국대회. 앞으로 남은 경기들이 하나 둘 떠올랐다.


“일 년이면…….”


선미가 손가락을 꼽았다.


“소년체전이랑 추계대회까지 다 합치면 몇 경기지?”


“선미야.”


감독이 낮게 선미를 불렀다. 선미는 듣지 못한 사람처럼 계속 셈을 했다.


“열두 경기인가.”


잠깐 생각하던 선미가 중얼거렸다.


“아…… 내 중학교 마지막 시즌인데.”


그리고 아주 대수롭지 않은 일처럼 덧붙였다.


“한 경기도 못 뛰네.”






병원에서 돌아온 뒤 며칠을 꼼짝 못 하다가 겨우 학교에 나왔다. 교실 안의 공기마저 통깁스를 한 다리처럼 묵직하게 느껴졌다.


창밖에는 5월의 초록이 한창이었다. 햇살은 밝았고, 나뭇잎은 바람이 불 때마다 반짝였다. 평소 같았으면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을 풍경인데 오늘은 이상하게 낯설었다. 세상은 멀쩡한데 자기 혼자 고장 난 것 같았다.

열린 창문 사이로 조금 더워진 바람이 들어올 무렵, 앞문이 열리고 담임이 들어왔다.


“오늘 서울에서 전학 온 친구가 있다.”


담임의 말과 함께 한 아이가 교실로 들어왔다.

빳빳하게 다려진 춘추복 교복 깃만큼이나 단정한 인상이었다. 소영은 단상 앞에 서서 교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기가 죽거나 쭈뼛거리는 기색은 없었다. 그렇다고 애써 밝게 웃지도 않았다. 그저 차분한 눈으로 아이들과 한 번씩 눈을 맞췄다.


“서울에서 온 한소영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끝이었다.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고 발음은 또렷했다. 잠깐 정적이 흐르자 담임이 헛기침을 했다.


“어…… 소영아, 조금만 더 이야기해 볼까? 친구들이 궁금한 게 많을 텐데.”


소영이 담임을 바라봤다.


“뭘 더 말씀드려야 하죠?”


“어? 그러니까…… 취미라든가, 좋아하는 거 같은 거 있잖아.”


소영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바카라 읽는 거 좋아하고요.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제 신상 길게 말하는 건 별로 안 좋아합니다.”


교실 여기저기서 피식 웃음이 터졌다. 소영은 웃음소리에도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다. 일부러 반항하거나 싸가지없이 굴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말끝 하나 흐리지 않고 제 생각을 또박또박 내놓는 모습이 묘하게 사람을 긴장시켰다. 맨 뒷자리에 앉아 턱을 괴고 있던 선미의 미간이 슬며시 찌푸려졌다. 다리를 다치고 온 세상이 삐딱하게 기울어진 것 같은 날이었다. 그런데 저 아이만 혼자 자로 잰 것처럼 반듯하게 서 있었다. 괜히 눈에 거슬렸다.


‘재수 없네.’ 선미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소영이 전학을 온 지도 일주일이 지나고 있었다. 5월이 지나 햇살은 날로 짙어졌지만, 소영은 여전히 교실의 이방인 같았다. 아이들이 다가가 말을 걸어도 늘 조용하고 또렷하게 제 할 말만 끊어하는 탓에, 아이들은 소영을 어려워하면서도 호기심을 지우지 못했다. 대놓고 캐묻지 못하니, 소문은 늘 소영이 자리를 비우거나 바카라에 고개를 묻고 있을 때 저희끼리 소리를 낮추는 식으로 시작되었다.

그날 쉬는 시간도 그랬다. 소영의 바카라상에서 불과 서너 걸음 떨어진 분리수거함 앞에 모인 아이들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속삭이기 시작했다.


“야, 서울 한소영 말이야. 서울 어디서 왔대?”


“강남이래, 강남. 대치동인가?”


“대박. 공부 청정 구역에서 온 거네? 들리는 말로는 전학 오기 전에 전교 1등이었다던데?”


맨 뒷자리에 엎드린 채 가만히 눈을 감고 있던 선미는 귀를 쫑긋 세웠다. 다친 다리 때문에 움직이지도 못하니, 원하지 않아도 교실 안의 온갖 잡음이 고스란히 귀로 흘러들었다. 일주일 내내 말수도 적고 바카라만 들여다보는 저 영감탱이 같은 가시나가 은근히 신경 쓰이던 참이었다.


“아니야, 전교 1등은 아니고 무슨 토론대회 전국 1등이래.”


“진짜? 어쩐지 말하는 게 예사롭지 않더라.”


“야야, 그것보다 아빠가 엄청 유명한 변호사라던데?”


“누가 그래?”


“몰라, 애들이.”


단 일주일 사이에 소문은 춤을 추었다. 서울에서 왔다는 사실은 어느새 전교 1등이 되었고, 전국 토론대회 1등을 거쳐, 급기야 아빠가 유명 변호사라는 데까지 자라났다.

그때, 가만히 바카라장을 넘기던 소영이 고개를 들었다. 제 이야기를 신나게 주고받던 아이들을 차분히 바라보던 소영이 한마디를 툭 던졌다.


“내가 여기 온 지 며칠 안 됐는데, 나보다 나에 대해 더 많이 아네.”


순간 정적이 흐르더니 아이들이 빵 터졌다.


“아, 대박!”


“은근 웃긴다, 얘.”


엎드려 있던 선미도 저도 모르게 푸흡, 하고 웃음이 새어 나올 뻔했다. 타이밍 하나는 기가 막혔다.

‘웃기지도 않네, 진짜.’ 선미는 속으로 툴툴거리며 엎드린 고개를 반대편 창가 쪽으로 돌렸다. 하지만 소영의 그 또렷한 목소리는 이상하게도 웅웅 거리며 머릿속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그날 점심시간, 교실에서 일이 터졌다. 채린이 화장을 하는데 통로를 지나던 다은이가 바카라상 모서리를 건드리는 바람에 바카라상 위에 있던 섀도 팔레트가 바닥에 떨어져 깨져버렸다. 다은이는 쪼그려 앉아 깨진 조각을 주우며 몇 번이나 미안하다고 했지만, 채린이는 욕을 퍼부으며 다은이의 머리를 마구 때렸다. 구경꾼이 모여들수록 목소리도 손도 더 거칠어졌다.


맨 뒷자리에서 지켜보던 선미는 섀도 하나 가지고 저러는 게 쪼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가만히 맞고만 있던 다은이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채린이의 머리를 똑같이 한 번 때렸다.


“너 작년에 내 노트 빌려 갔다가 잃어버린 거 기억 안 나? 나 그거 때문에 시험 망쳤잖아. 나도 욕할 줄 알아. 안 하는 거야.”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곧 둘이 엉겨 붙었고, 누군가 데려온 담임이 두 아이를 떼어놓고 교무실로 데려갔다.

잠시 뒤 담임이 돌아와 목격한 아이들에게 누가 먼저 손을 댔는지 물었다. 선미는 당연하다는 듯 채린이가 먼저 때렸다고 말했다. 근처에서 바카라을 보고 있던 소영도 같은 대답을 했다. 다만 다은이도 나중에는 채린이를 때렸다고 덧붙였다. 소영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선미는 괜히 발끈했다. 먼저 맞은 애가 한 번 받아친 것까지 굳이 잘못이라고 따지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야, 그걸 같이 치냐? 채린이가 먼저 마구 때렸잖아.”


소영은 잠깐 선미를 바라봤다.


“같다고 안 했어. 그냥 본 대로 말한 것뿐이야.”


“그럼 굳이 걔도 때렸다는 말은 왜 해?”


“선생님이 물어봤으니까.”


선미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쳤다.


“먼저 맞은 애가 한 번 받아친 거랑 먼저 여러 번 때린 거랑 같냐고.”


“안 같지.”


“근데?”


“같지 않다고 있었던 일이 없어지는 건 아니잖아.”


선미의 눈썹이 꿈틀 했다.


“너는 꼭 말을 그렇게 해야 되냐?”


“어떻게?”


소영은 정말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그게 더 얄미웠다.


“됐다. 너한테 말해서 뭐 하냐.”


“그래.”


소영은 그 한마디로 대화를 끝내고 다시 바카라으로 시선을 내렸다. 선미는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런데 꼭 필요한 말만 골라서 하는 것 같은 저 말투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담임이 나가고 교실이 다시 시끄러워졌다. 아이들은 학생부에 가면 쌍방이라 둘 다 징계받을 거라고 수군거렸다. 선미는 소영 쪽을 힐끗 보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쟤는 꼭 말을 저렇게 하네.’




다음날, 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 선미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채 의자 깊숙이 몸을 묻었다. 욱신거리는 무릎 통증 탓에 신경이 잔뜩 곤두서 있던 선미는 오른쪽 다리를 교실 통로 쪽으로 길게 뻗었다. 허벅지부터 발목까지 꽁꽁 싸맨 투박한 통깁스가 바카라상 줄 사이의 좁은 통로를 턱 하니 가로막았다.


그때, 뒷문 쪽 사물함으로 가려던 소영이 선미의 바카라상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통로를 꽉 채운 선미의 거대한 다리 앞에서 소영은 잠시 아래를 내려다보더니, 이내 선미를 향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다리 좀 치워줄래?”


선미는 감았던 눈을 느리게 뜨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안 그래도 심사가 뒤틀려 있는데, 며칠 전부터 눈에 거슬리던 전학생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며 툭 던진 말이 곱게 들릴 리 없었다. 선미는 턱을 비딱하게 괴며 톡 쏘아붙였다.


“안 보이냐? 깁스.”


“깁스한 건 보이는데, 통로까지 네 건 아니잖아.”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소영의 대답에 선미의 눈이 가늘어졌다. 덩치 큰 남자애들 앞에서도 기 한번 죽은 적 없던 선미였다. 운동부 특유의 거친 기세로 소영을 위아래로 훑으며 선미가 으름장을 놓듯 말했다.


“야, 서울 애들은 원래 말을 그그그... 그따위로 하냐?”


“어떻게?”


“싸 싸 싸... 싸가지없게.”


주변에 있던 아이들의 시선이 슬쩍 두 사람에게 쏠렸다. 싸가지라는 단어가 교실 공기를 순간적으로 서늘하게 만들었지만, 소영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오며 선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다리 치워달라는 게 싸가지없는 거면, 통로를 막고 있는 건 뭐야?”


“……!”


순간 선미의 말문이 턱 막혔다. 틀린 말이 아니라서 더 열받았다.


“이게 진짜…….”


욱하는 성미를 못 이긴 선미가 주먹을 움켜쥐고 벌떡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몸을 들썩이는 순간 무릎 깊숙한 곳에서 찌릿한 통증이 번졌다. 소영은 주먹을 쥐어 보이는 선미를 보면서도 전혀 겁먹은 기색이 없었다. 그저 앞을 가로막은 장애물을 대하듯, 무덤덤하고 또렷한 눈빛으로 선미를 가만히 쳐다볼 뿐이었다.


결국 다리를 부르르 떨며 안쪽으로 슬그머니 끌어당긴 것은 선미였다. 소영은 다리가 치워지자 미련 없이 제 할 일을 하러 사물함 쪽으로 걸어갔다.

선미는 멀어지는 소영의 등 뒤에 대고 레이저를 쏘듯 노려봤다.


‘저 재수 없는 게 진짜…….’




노을빛이 교실 바닥을 붉게 물들일 때까지 선미는 꼼짝없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아이들이 모두 빠져나간 텅 빈 교실은 고요했고, 선미는 제 덩치만큼 커다란 통깁스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머릿속에서는 낮에 있었던 소영과의 실랑이가 지워지지 않는 얼룩처럼 자꾸만 맴돌았다.


‘재수 없는 년.’


처음엔 그냥 그렇게 치부하고 넘기려 했다. 서울에서 전학 온 깍쟁이. 얼굴 좀 반반하고, 공부 좀 잘하고, 선생님의 유도 질문에도 걸려들지 않는 영악한 애.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선미의 마음속에 남은 감정은 단순한 거부감이나 얄미움이 아니었다.


선미는 질투하고 있었다. 단순히 소영이 예뻐서도, 전교 1등이라는 소문 때문도 아니었다. 배구부 에이스로 코트를 호령하던 선미에게 그런 건 애초에 관심 밖의 영역이었다. 선미를 가장 아프게 찌른 것은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낮에 소영과 맞붙었을 때, 선미는 억울하고 화가 나서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았다. ‘이건 내 다리다, 나도 아프고 싶어서 아픈 게 아니다, 좁은 통로에서 내가 왜 이 무거운 다리를 구겨 넣어야 하냐’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정작 입 밖으로 나온 것은 “말을 그따위로 하냐”, “싸가지없게” 같은 거칠고 유치한 말뿐이었다.


하지만 소영은 달랐다. 그 애는 한마디도 더듬지 않았다. 소리를 지르지도, 욕을 하지도 않았다. 그냥 생각한 것을 그대로 말로 꺼냈다.

“통로까지 네 건 아니잖아.” 그 한마디가 자꾸만 머릿속에서 재생됐다. 선미는 그게 제일 열받았다. 자기는 할 말이 분명히 있었다. 억울했고, 화도 났고, 따지고 싶은 것도 많았다. 그런데 막상 입을 열면 그 많은 생각이 어디론가 다 사라지고 몇 마디밖에 남지 않았다.


“말을 그따위로 하냐.”, “싸가지없게.” 돌이켜보니 더 열받았다. 그것밖에 못 했다는 게.

반면 소영은 자기보다 목소리도 작았고, 덩치도 작았다. 주먹 한번 쥐지 않았다. 그런데 선미는 꼼짝없이 밀렸다. 그것도 자기가 평생 져본 적 없는 이상한 방식으로.


“……씨발.”


선미는 바카라상을 주먹으로 쾅 내리쳤다. 텅 빈 교실에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창밖에서는 운동장에서 공 차는 아이들의 함성이 들려왔다. 선미는 무심코 그쪽을 바라보다가 다시 통깁스한 다리로 눈을 내렸다. 뛰지도 못하고, 때릴 수도 없고. 이제는 말로도 꼼짝 못 했다. 주먹 한 번 쓰지 않고도 사람을 이렇게 몰아붙일 수 있다는 게 더 열받았다.


‘진짜 재수 없는 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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