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5 대 1은 껌이지

by바담풍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던 중학생 배구팀 에이스 선미. 싸움도 잘하고 운동신경도 뛰어나지만, 정작 말로 따지기 시작하면 얼굴부터 빨개지고 머릿속은 하얘진다. 그런 선미 앞에 서울에서 온 ‘말빨 최강’ 전학생 소영이 나타난다. 소영의 코를 납작하게 해 주겠다는 오기로 시작한 디베이트. 토론대회, 보이스피싱 사건, 주니어 디베이트 코치 자격과 자원봉사를 거치며 선미는 조금씩 달라진다.
















선미의 주먹이 남학생의 콧등에 꽂히는 순간, 왼손에는 여학생의 머리카락 한 움큼이 잡혀 있었다. 두 아이가 동시에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야! 시간 끌지 말고 한꺼번에 다, 다…… 덤벼.”


선미가 손가락 사이에 낀 머리카락을 털어내며 말했다. 단단히 묶었던 머리는 어느새 풀어져 어깨 위로 산발처럼 흩어져 있었다. 뒤에 서 있던 남학생 하나와 여학생 둘은 공포에 질려 선뜻 나서질 못했다. 또래 중 제일 잘 나가는 일진 애가 한 방에 나가떨어지는 모습을 본 일행들은 전의를 완전히 상실한 채 서로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아니 우리는 그냥 같이 가 달라고 해서 온 거야.”


남학생 한 명이 쭈뼛거리며 말했다. 여학생 두 명은 고개만 끄덕일 뿐 아무 말도 못 하고 엉거주춤 서 있었다.

선미는 또래 아이들보다 한 뼘은 더 컸다. 떡 벌어진 어깨에 다부진 체격의 실루엣이 휴일 초등학교 운동장 구석을 꽉 채우고 있었다. 단단하게 다져진 통뼈의 체구는 다섯 명의 아이들 앞에서도 밀리지 않고 묵직한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잔뜩 약이 올라 씩씩거리는 아이들의 얼굴을 선미는 턱을 약간 치켜든 채 차분하게 훑어보았다. 그 눈빛에는 두려움 대신 ‘어디 한 번 와봐라’는 식의 장난기와 자신감이 서려 있었다.



그때 길을 지나던 여학생 둘이 이 모습을 보며 걸음을 멈췄다.


“야, 쟤들 싸운다.”


“보지 마. 그냥 가.”


“잠깐만. 쟤 우리 학교 애야.”


“누구? 저 키 큰 남자애?”


“아니. 쟤 여자야.”


“뭐야? 덩치는 완전 남잔데?”


“우리 학교 배구부야. 남자애들도 쟤한테 잘못 걸리면 끝장이야.”


“그럼 일진이야?”


“일진은 맞는데…… 그래도 착한 일진이야. 같은 반 애들은 안 건드려.”


옆에 있던 아이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착한 일진은 뭐야? 정의로운 조폭 같은 건가?”


“재는 ESTP야, 수완 좋은 활동가라 할 수 있어. 카리스마 작렬이야. 진짜 강자는 약자를 밟지 않는다는 자신만의 철학을 갖고 있거든. 다른 일진들하고는 차원이 달라”


MBTI 신봉자인 여학생은 자신이 무슨 심리학 대가라도 되는 양, 사람을 제대로 판단하고 분류하는 데는 정확하다고 확신하는 듯했다.


“차라리 임꺽정이라고 그래라. 일진을 무슨 영웅처럼 모시고 있냐? 하여간 너의 그 MBTI에 대한 믿음은 종교야 종교.”


옆에 있던 친구가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때 쓰러져 있던 여학생이 뽑혀나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만지며 비웃었다.


“뭘 다다 거려. 싸우기 전에 말부터 제대로 배워.”


선미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라 귀부터 빰까지 붉어졌다. 말이 목구멍에서 엉켰다.

뒤에서 누군가 킥킥 웃었다. 선미는 주먹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주먹으로 사람을 쓰러뜨리는 것은 쉬웠다. 그러나 말로 자신을 비웃는 사람을 쓰러뜨리는 방법은 아직 알지 못했다.


“이이, 이게 제대로 맞을 못 봤구나”


선미는 여학생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힘껏 내리쳤다. 일천중학교 배구부 에이스의 강 스파이크는 여린 중학생 여자애의 머리를 날려 버리기에 충분했다. 여학생은 다시 바닥에 널브러졌다.


여자친구가 맞는 걸 보다 못한 남학생은 몸을 낮추며 선미의 허리를 잡아채려 돌진했다. 선미는 재빨리 옆으로 한 바퀴 빙글 돌며 남학생의 어깨를 잡아챘다. 그리고는 방금 때린 콧등에 다시 한번 세차게 주먹을 내질렀다. 남학생은 엽기닭 소리를 내며 모래밭에 꼬구라졌다.






파출소

다음 날 시비에 휘말려 패싸움을 벌였다는 명목으로 선미는 일천중학교 생활 지도실을 거쳐 동네 파출소까지 불려 갔다. 맞은 부모들이 고소했기 때문이다.

하얗고 시린 파출소 형광등 불빛 아래, 선미는 혼자서 애처롭게 앉아 있었다.


“경찰관님! 저 몰골 좀 보시라니까요? 저렇게 덩치 크고 기가 센 애가 우리 순진한 애들을 골목으로 끌고 가 일방적으로 두들겨 팬 게 분명해요!”


맞은편 테이블에서 남학생 엄마가 악을 쓰며 파출소가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 어제 선미에게 호되게 맞고 쓰러졌던 일진 녀석들은 오늘 부모 뒤에 쏙 숨어, 세상에서 가장 억울하고 가녀린 피해자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리 민우는 평소에 욕 한마디 할 줄 모르는 순둥이예요! 어제 저 애가 말다툼하다가 갑자기 험악한 얼굴로 시비를 걸어서 맞았다잖아요!”


남학생 엄마는 한쪽 구석에 뾰루퉁 하고 앉아 있는 선미를 가리키며 매섭게 쏘아붙였다. 담당 경찰관이 난감한 표정으로 선미를 돌아보았다.


“학생! 정말 어제 이 친구들을 일방적으로 때린 거야? 학생이 먼저 시비 걸었다는데, 맞아?”


억울함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선미는 벌떡 일어나 “쟤들이 먼저 게임하다가 저를 성희롱 하고 말 더듬는다고 놀렸단 말이에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긴장되면 말을 더듬는 버릇은 여전히 비켜갈 줄 몰랐다.


“쟤가… 쌍… 먼저… 그래서… 놀렸어요.”


선미는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삼키며 간신히 깨진 파편 같은 말들을 이어 붙였다.


“어머, 어머! 말 더듬으면서 핑계 대려는 것 좀 봐! 찔리는 게 있으니까 저러지!”


남학생 엄마가 명품가방을 자랑이라도 하듯 이리저리 어깨를 바꿔가면서 걸치고는, 턱을 치켜든 채 선미를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비아냥거렸다. 짙은 화장 위로 가식적인 비웃음이 얇게 번져 있었고, 그늘진 눈가에는 은근한 우월감이 가득했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몸에서 풍기는 매캐하고 독한 향수 냄새가 차가운 경찰서 조사실을 가득 채우며 선미의 코끝을 찔렀다.


그녀에게는 사건의 경위가 어떻든지, 누가 더 잘못했는지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여자아이에게 자신의 귀한 아들이 얻어맞아 기가 죽고, 자존심이 상하는 이 상황을 견디지 못할 뿐이었다.


“아주머니 조용히 하세요, 조사하면 다 나와요.”


경찰관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시큰둥하게 말했다.

경찰관은 두 아이를 따로 분리해서 진술서를 쓰게 했다. 제출된 내용을 대조해 보니 아니나 다를까 서로 싸운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진술서 내용이 달랐다. 선미는 잔뜩 긴장한 채 꾹꾹 눌러쓴 글씨로 남자애가 피시방에서부터 던진 성희롱 발언과 조롱을 자세히 서술했다. 반면 남자애는 어떻게든 처벌을 피하고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자기에게 유리한 내용만 골라내 중언부언 장황하게 진술을 늘어놓았다.


사건 경위를 제대로 파악하기 곤란해지자 경찰관은 결국 그날 골목에서 싸움을 지켜보았던 목격자 아이들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의 증언은 이 사건을 하나의 유흥으로 즐기는 듯했다.


“민우 얼굴에 제대로 한 방이 들어갔어요. 그걸로 끝났죠. 민우는 엉거주춤한 상태에서 코피를 흘렀고, 가빈이가 저 여자애를 놀려대는 통에 대가리를 한 대 더 맞았죠. 와! 저는 손바닥으로 치는데도 그렇게 큰 타격감은 본 적 없어요. 완전 파워 슬랩(뺨 때리기 대회) 같았다니까요”


옆에 있던 다른 아이도 거들었다.


“민우 입장에선 가만 못 있죠. 잠자코 있다간 아이들에게 ‘찌질이’라며 놀림을 받을 수 있거든요. 그러면 학교생활 끝이거든요.”


아이들의 증언은 사건을 파악하기에는 도움이 됐지만 놀랍게도 아이들이 폭력에 얼마나 둔감했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심지어 그것에 길들여진 채로 친구들의 싸움을 즐기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민우가 먼저 ‘맞짱 뜨자’며 시비를 걸었어요. 그러고도 남자애가 여자애한테 주먹 한번 뻗어보지 못하고 얻어맞았으니, 스타일이 완전 구겨진 거죠. 저 같으면 가만 못 있어요. 한 순간에 셔틀로 전락할 수 있거든요.”


그날 선미의 한방을 보고 뒷걸음을 쳤던 남학생이 자신은 그렇지 않은 듯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정말 얄궂은 아이였다. 이 말을 경찰관 혼자 들었으니 망정이지 만약 얻어맞은 남학생이 들었다면 다시 한번 제대로 붙어보라고 부추기는 걸로 받아들였을 것임이 틀림없었다.


이유야 어떻든 일방적으로 얻어맞은 억울함 보다는 친구들로부터 받게 될 조롱이 그 아이에게는 더 큰 고통일 게 분명했다. 또래 아이들에게는 ‘찌질이’라고 불리는 게 가장 듣기 싫은 단어다. 이 말은 정말 최악의 멸칭이자 욕설이었다.


여하튼 그 사건은 남자아이를 포함한 다섯 명의 아이들이 먼저 시비를 걸었다는 점, 그리고 선미는 혼자서 대항하는 과정 중 발생한 ‘방어적 대응’이었다는 측면을 인정받아 쌍방이 합의하는 선에서 끝을 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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