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긋난 노쇼(No-show)

by날아올라

그곳은 병원의 다른 부서들과 동선이 크게 겹치지 않는 독립된 섬 같았다. 하루 종일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복도를 뛰어다니는 대신, 사방이 차단된 개인 공간에 온전히 앉아 정교하게 짜인 매뉴얼대로 수술 동의서와 수납 조건만을 조율하면 되는 부서였다. 망설임 없이 지원서를 던졌고, 대학병원의 화려한 간판과 내 차가운 결벽증은 면접관들의 눈에 베테랑의 노련함으로 완벽하게 비쳤다.


그렇게 들어선 상담실은 나를 위한 완벽한 요새였다. 사람의 체온이 직접 닿지 않는 투명한 1평짜리 유리 상자를 짜서 스스로를 가두기로 한 것은, 나약한 나를 지키기 위한 나의 가장 완벽하고도 서늘한 처방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이 1평짜리 공간이 완벽한 요새였던 것은 아니다. 육체의 피로만 사라졌을 뿐, 사람의 밑바닥을 상대하는 일은 예측 불가능한 변수의 연속이었다. 수술 결과에 만족하지 못해 다짜고짜 문을 박차고 들어와 악을 쓰는 환자들, 예상보다 몇만 원 더 나온 청구서를 들이밀며 삿대질을 해대는 보호자들. 그들의 통제 불가능한 날것의 감정 앞에서 내 등줄기는 매번 서늘하게 굳어졌다. 그들의 분노와 고함은 번번이 내 코트 자락 안에 숨어 있던 여덟 살 아이의 멱살을 끄집어내려 했다.


하지만 도망치지 않고 악착같이 버텼다. 1년이 지나고, 5년이 지나고, 10년 이상의 굳은살이 박이는 동안 나는 타인의 날뛰는 감정을 해부하고 완벽하게 제어하는 법을 터득했다. 핏대를 세우는 환자 앞에서는 한 치의 동요 없이 차갑고 건조한 의학 용어들을 방패 삼아 기세를 단숨에 눌렀고, 수술비 앞에서 망설이는 이들에게는 미리 계산된 미소로 두려움을 지워내며 기어이 수술 동의서에 서명을 받아냈다.


환자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해 자바카라하며 무너지던 나약한 간호사는 죽어있었다. 대신 타인의 불안을 정확히 계산하고 설득해 병원의 수술 건수로 환산해 내는 상담실장이 그 자리에 남았다. 참으로 기막힌 아이러니였다. 상처받지 않으려고 타인과 거리를 두기 위해 도망쳐 온 이 투명한 감옥이, 감정을 철저히 배제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내 차가운 결벽증과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천직이었으니 말이다.


15년 차의 굳은살이 모든 돌발 상황을 막아주리란 믿음은, 오후 진료시간에 구겨진 골절 의뢰서를 들고 온 남자를 마주한 순간 보기 좋게 산산조각 났다. 그가 상담실의 유리문을 밀고 들어오자 공들여 채워둔 아로마 향이 단숨에 흩어졌다. 남자의 몸에서 훅 끼쳐오는 짙은 담배 찌든 내가 1평의 공기를 난폭하게 점령했다. 그는 각을 맞춰 정돈해둔 서류 뭉치 위로 둔탁한 손을 툭 올려놓았다. 반듯했던 종이 단면들이 투박한 손끝에서 속수무바카라으로 구겨지는 꼴을 보며, 나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brunch membership
날아올라작가님의 멤버십을 시작해 보세요!

조현병 엄마 밑에서 자란 간호사 딸의 생존과 자가치유. 대물림되는 아픔을 끊고 엄마가 된 나를 응원해. 아들아, 너의 모든 순간을 사랑해.

247 구독자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

  • 최근 30일간 1개의 멤버십 콘텐츠 발행
  • 총 6개의 혜택 콘텐츠
최신 발행글 더보기
이전 03화구김 없는 갑옷을 입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