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김 없는 갑옷을 입기까지

by날아올라

처음부터 내 가운이 이렇게 구김 없는 갑옷이었던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15년 차라는 꼬리표를 보며 나이팅게일의 숭고한 소명이나 헌신 따위를 입에 올리지만, 나는 그럴 때마다 속으로 쓴웃음을 삼켰다. 내게 간호사 면허증은 누군가를 구원하기 위한 증서가 아니라, 술병이 날아다니던 거실과 어머니의 하얀 정신 병동에서 도망치기 위한 유일한 비상구였다.


보살핌 대신 매를 피하며 자란 내게 유일한 동아줄은 취업률 1위가 적힌 대학 입시 바카라자였다. 나는 아버지의 고함이 절대 닿지 못할, 지도상에서 집과 가장 먼 남쪽 끝 간호학과에 점을 찍었다. 밤을 새워 해부학 용어를 빽빽하게 적어 내려간 건 환자를 살리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다시는 나프탈렌 냄새 찌든 장롱 속으로 기어들어 가 덜덜 떨지 않겠다는 처절한 발악이었다.


하지만 졸업 후 도망치듯 올라온 서울의 대학병원 소아과 병동은 내가 꿈꾸던 무균실과는 거리가 멀었다. 새벽 5시, 병동은 서늘한 알코올 솜 냄새로 깨어났다. 뻑뻑한 눈을 비비며 한 시간 일찍 출근해 수액 세트와 주사기 개수를 강박적으로 맞추고 나면 곧바로 오전 6시. 첫 혈관 주사를 알리는 카트 바퀴 소리가 복도를 울리면 내 어깨는 이미 바짝 얼어붙어 있었다.


대부분이 항생제 투여였다. 수액 라인 중간에 주사기를 꽂고 약물을 밀어 넣을 때마다, 곤히 자던 아이들은 살점을 에는 혈관통에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내 손끝에서 타인의 고통이 시작될 때마다 주사기를 쥔 손목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러나 찢어지는 아이들의 울음소리보다 숨을 턱 막히게 하는 건 선배 간호사들이었다. 오전 회진 시간, 보호자 앞에서는 상냥하게 웃던 담당 선배는 스테이션 뒤로 돌아오면 서늘하게 돌변했다.


“서정원, 어제 내준 급성 폐쇄성 후두염 증상이랑 치료방법 얘기해 봐.”


환자와 동료들이 뻔히 오가는 복도 한가운데였다. 밤새 외웠던 지식들은 선배의 매서운 눈초리 앞에서 하얗게 증발했다. 입술만 달싹이는 내게 선배는 경멸 섞인 시선을 꽂아 넣었다.


“환자 목숨이 장난이야? 돌머리면 잠을 줄여서라도 외워왔어야지. 네가 그따위로 어리바리하니까 보호자들이 우습게 보는 거 아니야.”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수액처럼 끈적하게 내 정수리로 흘러들었다. 아버지가 던진 술병을 피해 맨발로 도망치다 바지에 오줌을 지렸을 때, 혀를 차며 수군거리던 동네 사람들의 눈빛을 받으며 서 있던 그 축축한 골목길로 다시 끌려간 기분이었다.


폭력은 늘 예고 없이 일상을 파고들었다. 호되게 깨진 어느 날, 선배와 마주 앉아 교대 식사를 하러 내려갔을 때였다. 모래알 같은 밥을 억지로 목구멍으로 밀어 넣고 있는 내게, 선배가 숟가락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너는 내가 만만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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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병 엄마 밑에서 자란 간호사 딸의 생존과 자가치유. 대물림되는 아픔을 끊고 엄마가 된 나를 응원해. 아들아, 너의 모든 순간을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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