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했던 순간은 지나갔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일까.
행복했던 순간은 지나갔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일까.
아니면 그 순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에야, 비로소 행복이었다고 부르게 되는 것일까.
골목 끝에는 하루를 빌려주는 가게가 있었다.
간판에는 작은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당신이 가장 행복했던 하루를 맡기면, 다른 사람의 하루를 빌려드립니다.’
처음 그 가게를 발견한 사람들은 장난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가게 안쪽에는 날짜가 적힌 작은 상자들이 빼곡히 쌓여 있었다. 상자마다 주인의 이름과 하루의 제목이 붙어 있었다.
누군가는 결혼식 날을 맡겼고, 누군가는 첫 월급을 받은 날을 맡겼다.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어머니와 저녁을 먹었던 날을 내놓은 사람도 있었다.
가게 주인은 손님에게 규칙을 설명했다.
“하루를 맡기시면 그날의 기억은 사라집니다. 대신 다른 사람의 하루를 하나 빌려 가실 수 있고요. 하루를 더 빌리고 싶으시면 그만큼 하루를 더 맡기시면 됩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
“맡긴 하루를 되찾고 싶으시다면, 그동안 빌린 하루를 모두 반납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온 날 중 가장 소중한 하루를 대가로 내놓으셔야 합니다. 그날의 기억도 사라집니다. 한 번 내놓은 하루는 다시 돌려받을 수 없습니다.”
“그럼 빌린 하루는요?”
“다른 사람의 삶을 하루 동안 경험하는 겁니다. 그날의 기억과 감정은 온전히 당신의 것이 됩니다. 다만 그 하루를 살았다고 해서 현실에서 그 사람의 삶이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손님들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게를 찾는 사람들에게 행복했던 하루는 이미 지나가 버린 날이었다. 그날을 떠올릴수록 오늘의 초라함이 더 선명해지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차라리 그 하루를 내놓고 다른 사람의 삶을 살아보고 싶어 했다.
서른두 살의 남자도 그 가게를 찾았다.
그는 특별히 불행한 사람은 아니었다. 매달 월급을 받았고, 크게 아픈 곳도 없었다. 다만 매일이 비슷했다. 출근하고, 퇴근하고, 주말에는 밀린 빨래를 하고 장을 봤다.
양말은 꼭 짝을 맞춰 갰고, 영수증을 버리지 못해 지갑은 늘 두툼했으며, 휴대전화는 언제나 무음이었다.
화면에 ‘엄마’라는 이름이 뜨는 것은 일주일에 한 번쯤이었다. 그는 그 이름이 흔들리다 꺼지는 것을 지켜보며 나중에 걸어야지,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그는 자주 과거를 떠올렸다.
열아홉 살 여름, 대학 입학을 앞두고 아버지와 바다에 갔던 날이었다.
아버지는 운전하는 내내 별말이 없었다. 두 사람은 휴게소에서 우동을 먹었고, 해변에서는 신발을 벗고 모래사장을 걸었다.
아버지가 바다를 보며 말했다.
“나중에 네가 돈 벌면 이런 데는 네가 데려와라.”
남자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때 되면 더 좋은 데 데려갈게.”
그것이 아버지와 단둘이 떠난 마지막 여행이었다. 몇 년 뒤 아버지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남자가 돈을 벌기 시작했을 때, 아버지는 더 이상 어디에도 갈 수 없었다.
그날을 떠올릴 때마다 즐거움보다 후회가 먼저 왔다.
조금 더 좋은 곳으로 모시고 갈 걸. 사진이라도 한 장 더 찍을 걸.
기억 속의 아버지를 만날 때마다 그는 그날 자신이 하지 못한 일들을 하나씩 찾아냈다.
그렇게 그날의 행복은 그에게 오래된 후회로 남았다.
남자는 가게 주인 앞에 서서 말했다.
“이 하루를 맡기겠습니다.”
“그날이 행복했습니까?”
“네.”
“그런데 왜 맡기려고 하십니까?”
그는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기억할 때마다 후회하게 되니까요.”
주인은 더 묻지 않았다. 작은 상자를 열어 바다의 날짜가 적힌 카드를 꺼냈다.
남자가 카드를 건네는 순간, 아버지의 얼굴과 파도 소리, 휴게소 우동의 맛이 희미해졌다.
남자는 자신이 무엇을 잊었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가게를 나섰다.
그날 밤, 그는 처음으로 다른 사람의 하루를 살았다.
처음 빌린 하루는 이름 모를 노인의 것이었다.
그는 오래된 주택의 부엌에서 아침을 먹었다. 마당에서는 빨래가 바람에 흔들렸다. 점심 무렵에는 아내와 시장에 갔다가 별것 아닌 일로 다퉜고, 돌아오는 길에는 함께 웃었다.
저녁에는 손녀가 찾아왔다. 아이는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쉴 새 없이 이야기했다. 노인은 같은 질문을 몇 번이나 했고, 손녀는 귀찮다는 듯 대답하면서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별다른 사건은 없었다. 대단한 기쁨도, 오래 기억할 만한 성취도 없었다.
그런데도 남자는 그날이 끝나는 것이 아쉬웠다.
눈을 뜬 그의 방은 조용했다. 알람이 울렸지만, 그는 한참 동안 천장만 바라보았다.
그날 점심시간에 그는 다시 가게로 갔다.
“다른 하루도 빌릴 수 있습니까?”
“새 하루를 하나 맡기시면 됩니다.”
그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대학 시절, 친구들과 밤새 시험공부를 하다가 새벽에 편의점에서 라면을 먹었던 날을 내놓았다. 그때는 매일이 지겹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 더 지겨웠다.
그 하루가 정확히 어떤 날이었는지는 카드를 건네는 순간 기억에서 빠져나갔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하루를 맡기고 다른 사람의 하루를 빌렸다.
작은 식당을 하는 여자의 하루도 있었다. 손님이 뜸한 오후에는 밀린 계산서를 정리했고, 저녁이 되자 단골이 와서 늘 먹던 음식을 시켰다.
여자는 투덜거리면서도 반찬을 하나 더 내주었다. 손님은 고맙다는 말 대신 빈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
여자는 그릇을 치우며 별생각 없이 웃었다.
남자는 그 표정을 오래 바라보았다.
자신의 하루에도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를 내어주던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기억하는 것은 대개 더 좋은 것을 갖지 못했다는 사실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살아온 날들을 너무 쉽게 초라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달았다고 해서 당장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다음 날이 되면 그는 다시 출근했고, 점심을 먹었으며, 퇴근길에는 버스 창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다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전보다 조금 길게 느껴졌다.
그가 가장 오래 기억하는 하루는 전화를 기다리는 할머니의 하루였다.
아침에 할머니는 휴대전화를 식탁 위, 손이 닿는 곳에 놓았다. 청소기를 돌리다가 한 번 돌아보았고, 빨래를 널다가 또 한 번 돌아보았다.
점심에는 혼자 먹을 국을 한 솥 끓였다. 양을 줄이려 했는데 손이 먼저 움직여, 사람 수대로, 그러니까 둘이 먹을 만큼 끓이고 말았다.
오후에는 화면을 한 번 켜 보았다. 아무것도 와 있지 않았다. 할머니는 괜히 설정 화면을 열어 벨소리 크기를 확인하고는 다시 닫았다.
저녁이 되도록 전화는 오지 않았다.
잠들기 전에 할머니는 휴대전화를 충전기에 꽂았다. 불이 꺼진 방에서 혼잣말을 했다.
“바쁜가 보지.”
남자는 그 목소리를 자신의 입으로 들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하루 동안 할머니는 수십 번 휴대전화를 확인했고, 식탁을 바라보았으며, 오지 않은 사람의 몫까지 밥을 지었다.
그날이 끝나고 자기 방에서 눈을 떴을 때, 남자는 이유도 모른 채 한참 동안 가슴이 눌려 있었다.
그 감정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지만, 꿈에서 깬 뒤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그 감정이 어디서 온 것인지 묻지 않았다. 대신 가게로 갔다.
그는 점점 더 자주 하루를 빌렸다.
점심시간마다 가게로 갔고, 퇴근 후에도 갔다. 맡길 하루는 점점 줄어들었다.
졸업식 날, 첫 월급으로 친구들에게 술을 샀던 날, 혼자 떠났던 여행의 마지막 날.
그는 특별히 행복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날들까지 하나씩 내놓았다. 그러지 않으면 더 이상 빌릴 하루가 없었기 때문이다.
카드를 건네고 나면 그날이 있었다는 사실만 목록처럼 남았다.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누구와 있었는지, 어떤 표정으로 웃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회사에서는 서류를 두 번이나 틀렸다. 팀장이 이유를 묻자 그는 잠을 못 자서 그렇다고 답했다.
사실은 밤마다 남의 집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
주말이 되면 빨래가 쌓였고, 양말은 짝이 맞지 않은 채 서랍에 들어갔다. 식탁에는 배달 음식 용기와 읽지 않은 우편물이 쌓여 갔다.
무음으로 해둔 휴대전화에는 ‘엄마’라는 이름이 세 번 찾아왔다. 그는 그 알림을 지웠다.
빌린 하루가 끝나면 그는 늘 같은 방에서 눈을 떴다. 같은 알람, 같은 출근길, 같은 신호등.
다른 사람의 하루를 살수록 자신의 삶은 조명이 꺼진 무대처럼 낯설어졌다. 이제는 자기 삶으로 돌아오는 것이 두려웠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다른 사람의 하루를 빌리는 이유조차 잊고 있었다.
그저 오늘이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어느 날 주인이 선반 맨 아래에서 카드 한 장을 꺼내 그의 앞에 놓았다.
카드에는 날짜 대신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누군가가 당신을 기다렸던 날.’
“이건 누가 맡긴 하루입니까?”
남자가 묻자 주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도 맡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여기에 있습니까?”
“사람은 자신이 살아온 날을 전부 기억하지 못합니다. 어떤 하루는 너무 평범해서 잊고, 어떤 하루는 너무 익숙해서 소중한 줄 모릅니다. 그런 날들이 주인을 잃은 채 이곳으로 흘러오기도 합니다.”
“그럼 누구의 하루입니까?”
주인은 카드를 남자 쪽으로 밀었다.
“당신의 것입니다.”
남자는 카드를 내려다보았다.
“저는 누군가에게 기다려질 만큼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건 당신이 기억하는 방식일 뿐입니다.”
주인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이 하루는 대가 없이 빌려드리겠습니다. 다만 이미 당신에게서 멀어진 하루를 다시 경험하는 것이니, 다른 하루를 빌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기억과 감정은 당신에게 남을 겁니다.
그리고 나중에 원래의 하루를 되찾으려 한다면, 이 하루도 다른 빌린 하루들과 함께 돌려주셔야 합니다.”
남자는 그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카드에 적힌 문장이 마음에 걸렸다.
그는 카드를 받아 들었다.
그날 밤, 그는 열일곱 살의 아침으로 돌아갔다.
어머니는 새벽부터 일을 나가야 했다. 식탁에는 식은 밥과 계란 프라이가 놓여 있었다. 현관에서 신발을 신던 어머니가 그를 돌아보았다.
“오늘 학교 끝나고 일찍 오니?”
그는 휴대전화를 보며 대답했다.
“몰라. 왜?”
“아니, 그냥.”
어머니는 더 말하지 않고 문을 닫았다.
저녁에 돌아온 식탁에는 쪽지가 놓여 있었다.
‘밥 먹고 가. 늦으면 전화하고.’
그는 대충 밥을 먹고 방으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늦게 돌아와 장바구니를 내려놓고, 그가 남긴 밥그릇을 씻었다. 그는 방문을 열고 물었다.
“엄마, 내일 아침에 깨워줘.”
어머니는 등을 돌린 채 대답했다.
“그래. 늦지 않게 깨워줄게.”
그에게는 아무 일도 아니었다.
다음 날에도 어머니는 그를 깨웠고, 그 다음 날에도 그랬다. 그가 퉁명스럽게 대답해도, 전화를 받지 않아도 어머니는 다음 날 아침 다시 방문을 두드렸다.
어머니에게도 피곤한 날이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위로받고 싶은 저녁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의 남자는 어머니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문을 닫고 나가면 하루가 시작되었고, 집에 돌아오면 밥이 있었다. 그 사이 어머니가 어떤 하루를 보냈는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꿈속의 그는 식탁 앞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식은 계란 프라이. 현관에서 나던 신발 소리. 방문 너머의 목소리.
그는 어머니에게 다가갔다. 입을 열었지만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를 보지 못한 채 장바구니를 들고 부엌으로 갔다. 그제야 남자는 어머니의 뒷모습이 얼마나 작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그날 무슨 말을 했어야 했을까.
고맙다고 했어야 했을까. 오늘은 어땠느냐고 물었어야 했을까. 아니면 그저 식탁에 앉아 어머니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어야 했을까.
어떤 하루는 다시 살 수 있어도, 그 하루에 하지 못한 말까지 없었던 일로 만들 수는 없었다.
그는 어머니를 붙잡으려 했지만 손은 허공을 통과했다.
잠에서 깨어나기 직전, 어머니가 현관에서 그를 돌아보았다.
“늦지 않게 들어와.”
그 말은 꾸중처럼 들리지 않았다.
오래 기다리겠다는 말처럼 들렸다.
아침에 눈을 뜨자 그는 곧장 휴대전화부터 집어 들었다.
부재중 전화 목록에는 ‘엄마’가 네 번 쌓여 있었다. 마지막 전화는 그가 잠든 사이에 와 있었다.
그는 화면을 한참 바라보았다.
어젯밤 꿈에서 본 식탁과, 충전기에 꽂히던 휴대전화가 겹쳐 보였다. 무엇이 자신을 이렇게 만들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다만 더 이상 그 이름을 아무렇지 않게 지우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전화를 걸려다 멈추었다.
아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미안하다는 말도, 고맙다는 말도 입안에서 어색하게 맴돌았다.
대신 그는 가게로 갔다.
“제 하루를 돌려받고 싶습니다.”
주인은 그를 바라보았다.
“처음 맡기셨던 하루 말씀이군요. 아버지와 바다에 가셨던 날입니다.”
남자는 잠시 주인을 바라보았다.
아버지와 바다에 갔다는 말이 낯설었다. 자신이 그런 하루를 살았다는 기억은 없었다. 다만 이 가게에 처음 왔을 때 무언가를 맡겼고, 그날의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만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러려면 지금까지 빌린 하루를 모두 반납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가장 소중한 하루 하나를 대가로 내놓으셔야 하고요.”
“알고 있습니다.”
“대가로 내놓은 하루는 기억에서 사라집니다. 그날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떠올리지 못할 수 있습니다.”
남자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동안 빌린 하루들이 떠올랐다. 노인의 부엌, 식당 여자의 빈 그릇, 전화를 기다리던 할머니의 목소리. 그리고 열일곱 살의 아침.
그 모든 하루가 카드에 담겨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날들의 기억은 자신의 것이 되었지만,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려면 다시 돌려놓아야 했다.
남자는 주머니에서 카드를 꺼내 하나씩 내려놓았다.
노인의 하루. 식당 여자의 하루. 할머니의 하루.
그가 빌렸던 카드가 모두 탁자 위에 놓였다. 마지막으로 열일곱 살의 아침이 적힌 카드가 남았다.
주인은 그것을 바라보았다.
“이 하루도 돌려주시겠습니까?”
남자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 아침을 경험하기 전에는 자신이 무엇을 잃고 살아왔는지 알지 못했다. 어머니가 차려놓은 밥도, 현관에서 돌아보던 얼굴도, 아무렇지 않게 건넨 말도 그저 지나가는 일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겼던 하루가, 누군가에게는 수없이 되풀이해 내어준 사랑의 한 조각이었다는 것을.
그는 카드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돌려드리겠습니다.”
주인은 카드를 다른 카드들과 함께 상자에 넣었다.
“이제 대가를 정하셔야 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날 중 가장 소중한 하루를 내놓으셔야 합니다.”
남자는 눈을 감았다. 가장 소중한 하루.
한때는 아버지와 바다에 갔던 날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하루를 되찾기 위해 다른 날들을 내놓고 있었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가장 소중한 하루일까.
오래 생각한 끝에 그는 열일곱 살의 아침을 떠올렸다.
식은 밥과 계란 프라이가 놓인 식탁. 깨워주겠다고 말하던 어머니. 내일도, 그다음 날도 자신을 기다릴 것처럼 문을 닫던 뒷모습. 그 하루를 경험하기 전의 자신이라면 결코 고르지 않았을 날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 그만큼 무거운 하루는 없었다.
남자는 마지막 카드를 집어 들었다.
주인이 조용히 물었다.
“이걸 내시면 그 아침의 기억은 사라집니다. 방금 보셨던 장면도, 그때 느끼신 감정도 기억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남자는 카드를 내려다보았다.
“그날을 기억하지 못하게 되더라도, 제가 그날을 경험했다는 사실까지 없어지는 건 아니겠지요?”
주인은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하루는 기억 속에서 사라져도, 그 하루가 당신에게 남긴 모든 것을 제가 가져갈 수는 없습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습니다.”
그는 카드를 주인에게 내밀었다.
“아버지와 갔던 날을 후회로만 안고 살고 싶지 않습니다.”
주인은 카드를 받아 상자에 넣었다.
상자 뚜껑이 닫히자, 남자는 방금까지 무엇을 보았는지 정확히 떠올릴 수 없었다. 열일곱 살의 어느 아침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희미해졌다.
그러나 손끝에는 이상하게 따뜻한 감각이 남아 있었다.
주인은 오래된 상자 하나를 꺼내 그의 앞에 놓았다.
“처음 맡기셨던 하루입니다.”
상자 안에는 바다의 날짜가 적힌 카드가 있었다.
남자가 카드를 집어 드는 순간, 오랫동안 흐릿했던 풍경이 다시 선명해졌다.
아버지의 얼굴. 파도 소리. 휴게소 우동의 맛.
그리고 바다를 바라보며 나중에 좋은 데로 데려오라고 말하던 목소리.
그날 아버지는 살아 있었다.
두 사람은 함께 바다를 보았고, 같은 우동을 먹었고, 돌아오는 길에도 나란히 앉아 있었다. 아버지는 말이 많지 않았지만, 아들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운전대를 잡았다.
그날은 마지막이 되었지만, 마지막이기 전까지는 분명 행복한 하루였다.
남자는 처음으로 그 하루를 떠올리면서도 자신이 무엇을 더 해드리지 못했는지 세지 않았다.
그저 함께 있었던 시간을 생각했다.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자신이 아버지에게 해드리지 못한 일만큼이나, 아버지가 자신에게 해주었던 일도 많았다는 것을.
가게를 나서자 바깥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남자는 휴대전화를 꺼내 무음 스위치를 올렸다.
화면에는 여전히 ‘엄마’라는 이름이 남아 있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두 번 울린 뒤 어머니가 받았다.
“왜, 무슨 일 있어?”
남자는 입을 열지 못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무엇부터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방금 전까지 분명하게 떠올랐던 식탁과 어머니의 목소리는 이제 기억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야 한다는 생각만은 이상하게 남아 있었다.
그래서 그는 가장 평범한 질문을 했다.
“엄마, 밥 먹었어?”
“먹었지. 너는?”
“나도 먹었어.”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덧붙였다.
“이번 주말에 같이 밥 먹자. 내가 갈게.”
어머니는 잠깐 말이 없었다.
“그래. 뭐 먹고 싶은데?”
“가서 정하자.”
전화를 끊고도 비는 계속 내렸다. 그는 처마 밑에 서서 한동안 빗소리를 들었다.
집으로 가는 길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늘 지나던 가게가 있었고, 늘 기다리던 신호등이 있었으며, 비에 젖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집에 돌아온 그는 양말을 꺼내 짝을 맞춰 갰다. 서랍에 넣고 나니 아직 빨지 않은 빨래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세탁기를 돌렸다.
어머니에게서 문자가 왔다.
‘주말에 오면 연락해. 조심히 오고.’
그는 답장을 쓰다 지우고, 다시 썼다.
‘응. 맛있는 거 먹자.’
창밖에서는 여전히 비가 내렸다.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가 방 안을 낮게 채웠다.
내일은 퇴근길에 좋아하는 빵을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불을 껐다. 휴대전화는 머리맡에서 소리를 켠 채 충전되고 있었다.
잠들기 전, 그는 알람을 평소보다 조금 일찍 맞췄다. 옷장 문을 열어 한동안 입지 않았던 셔츠를 꺼내 의자 위에 걸어두었다. 며칠째 미뤄 두었던 빨래도 그날은 미리 정리해 두었다.
누군가에게 가겠다고 약속한 일이 오랜만이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잊었는지 알지 못한 채 잠들었다.
다음 날은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날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평소보다 일찍 일어날 생각이었다.
빵을 사고, 길을 나서고, 누군가의 문 앞에 도착하기까지.
오래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