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유산
여긴 밤꽃이 피고 있어.
계절은 결코 질서를 어기지 않는구나.
여전히 오늘 아침에도
떨어진 오디를 줍고 있었는데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밤꽃이 피고 있었어.
이번 가을에도 비탈을 오르내리며 밤을 줍겠지?
벌써부터 신나.
봄엔 두룹을 시작으로 산나물을 캐고
여름엔 가치와 고추 등 텃밭의 작은 수확의 기쁨을 누리고
가을엔 밤을 줍고
겨울엔 냉기를 품고 극한 압축을 견디며 새로운 봄을 준비하겠지.
엄마 삶의 보폭은 세상의 군무에서 꽤 멀어진 것 같아.
이제 겨우 시골에서의 2번째 봄인데 말이야.
그런데 이상하다.
여기 시골은 너무 불편한데 너무 평안해.
너무 자유로운데 너무 바빠.
너무 조용한데 모든 소리가 다 들려.
그리고,
가장 이상한 것 하나는
엄마를 감시하는 눈이 있는 것 같아.
아스팔트를 걷던 발이 흙을 밟잖아.
깨끗한 것만 만지던 손이 흙을 만지잖아.
그러면서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땅'이 주는 호흡이 느껴져.
참! 여긴 음식물쓰레기봉투가 없다!
그냥 밭에 버려.
이것만으로도 여기 사람들이 무엇을 먹는지,
땅이 왜 비옥한지를 알 수 있지?
땅은
늘 무용한 것만 받아.
그런데 새벽에 글을 쓰고 마당과 텃밭에 나가면
짙은 푸른 향에 엄마는 취해.
모든 죽은 것들을 품은 땅이
어떻게 이리 신선한 향을 뿜어낼까...
뿐만 아니야.
죽은 것들이 모두 땅으로 들어가는데
그 모든 것을 부활시켜.
똑같은 얼굴로,
딱맞는 계절에,
더 번식시켜서 말이야.
그래서,
갓난쟁이들을 계속 소생시키느라
자기 얼굴을 자꾸만 더 깊이 내릴 수밖에 없어.
그리고 엄마는
땅이 늘 엄마를 떠받들고 있는 느낌에 빠져.
바로 서서 걸으라고.
내가 받쳐줄테니까 자기 얼굴을 대신해서
얼굴 당당히 들고 다니라고.
네 얼굴답게,
네 얼굴로써 살라는 땅의 소리가
발바닥으로부터 머리꼭대기까지, 그리고 가슴 깊숙한 곳까지 전해져.
경험하지 않고서는 결코 알 수 없는,
이렇게 너에게 편지를 쓰지만 어떤 어휘로도 부족한
느낌이 엄마 속을 가득 채우고 있단다.
아이야,
모든 무용한 것들을 품고
세상의 질서를 위해 다시 소생시키는 땅 위에
우리가 서 있어.
살면서,
살면서 말이야.
앞만 보고 걷다가
가끔 하늘을 보지?
그렇게
아래도 봐.
네 발밑에서
어떤 예외도 없이 모든 것을 소생시키는
땅의 기운이
널 떠받치고 있단다.
모든 생명은 조작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이해되어야 마땅하다.
참으로 엄정한 세계의 이해를 요구한다(주).
이 거대한 질서 속에
엄마가, 그리고 네가 있어.
세상은 변하지.
엄정한 질서를 위해 변화에 과감해.
엄마는 그래서.
생명의 질서를 위해
땅의 감시를 받는 것 같아.
땅은 엄마가
자기에게서 멀어지는지,
엄마자체의 얼굴로 사는지 감시하며
직접 발로 걸어야만 삶이 된다고 말하는 것 같아.
각자가 그런 삶이어야
땅이 가는 거대한 하나의 질서,
조화가 지켜지니까 말이야.
아이야,
앞을 보고 걷되
위를 보고 품되
아래를 보고 따끔해져라.
모든 생명 가운데 네가 있고
그 생명의 근원이 어디로부터인지
살다가, 살다가...
잠깐 걸음을 멈춰 아래를 보렴.
네가 딛고 있는 대지가
오늘도 너를 떠받들고 있단다.
너는 땅의 조화를 위해
자체로서 충분한 하나의 질서란다.
- 2026. 6. 8. 11:51
주> 김우창, 깊은 마음의 생태학,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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