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누군가가 내 삶에 갑자기 쳐들어와 내 삶을 점령할 때가 있다.
부지불식간에 그는 또는 그녀는 잔잔했던 내 일상을 흐트러놓는다.
내 주변의 지인일 수도 있고, 소설이나 영화 속 등장인물일 수도 있다. 사랑에 빠졌을 때의 연인이야 말할 필요도 없다. 여고생 때는 헤르만 헤세의 소설 속 주인공 데미안이 그러했고, 대학생 때는 실존 인물로써 인간 예수가 그러하였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아주 우연히 알게 된 실비아.
서울 송파구의 한 고등학교에서 근무할 때 친하게 지내던 영어 선생님이 있었다. 자신의 영문학 박사학위 논문이 나왔다며 건네주신 두꺼운 논문에서 그녀의 이름을 처음 보았다. 바이런이나 프로스트, 에밀리 디킨슨 같이 유명한 몇몇 시인의 이름은 들어봤지만 영문학, 영시를 잘 모르니 난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실비아 플라스(Sylvia Plath)
그녀가 궁금하여 검색해 보았다.
그녀에 관한 리뷰가 엄청 많았다.
2003년에는 영화 '실비아(Sylvia)'도 나왔었다. 기네스 팰트로가 주연을 맡아, 그녀가 남편 테드 휴즈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결혼 생활의 고통과 질투, 그리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전기 영화다.
어떻게 모르고 살았지?
재능과 미모와 모든 것을 가진 천재 여류 시인이자 소설가.
그녀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공부하다 만난 당대 최고의 시인인 테드 휴즈와 불같은 사랑에 빠져 결혼하였지만, 휴즈의 외도로 인해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하게 된다. 휴즈와 이별하고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자신의 고독과 분노와 사랑을 담아 작품 활동에 몰두하다가 어느 추운 겨울날 그녀는 31살의 나이에 가스 오븐에 머리를 박고 자살하였다.
휴즈와의 별거로 인해 홀로 두 아이를 키워야 한다는 부담감과 어릴 때부터 그녀를 힘들게 했던 우울증으로 삶의 무게를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병적일 정도로 집요한 사랑과 우울증, 그리고 뛰어난 재능을 가진 여인과 자유분방한 남자의 행복한 결혼 생활은 매우 짧았다. 사랑하는 사람의 배신과 이별의 아픔으로 힘겨워하면서도 두 아이의 엄마로 최선을 다하며 작품활동에 전념했으나 우울증과 외로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끝내 자살한 젊은 여인의 삶이 당시의 나에겐 매우 충격이었다.
눈을 감으면 세상이 죽고
눈을 뜨면 모든 것이 다시 태어난다.
살아있게 해 줘
사랑하게 해 줘
좋은 문장으로 말하게 해 줘
그녀의 시 한 구절이다.
하선생님 덕분에 알게 된 실비아 플라스의 삶과 그녀의 시를 찾아보며 동생 채운과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느꼈던 감정과는 또 다른 감정으로 여성 시인인 채운은 그녀가 님긴 작품 속에서 그녀를 만났을 것이다.
실비아 플러스
어둠 속의 정지.
다음엔 바위산과 먼 곳의
실질 없는 푸른 쏟아짐.
신의 암사자,
어떻게 우리는 하나로 되나,
발꿈치와 무릎의 축으로!--고랑이
갈라지고 지난다, 내가
잡을 수 없는
목의 갈색 호에 자매로써,
검은 눈같은
딸기가 검은 고리를
던진다--
검고 감미로운 한 모금의 피,
그림자들.
다른 무언가가
나를 공중으로 끌어당긴다--
허먹지, 머리카락,
내 발꿈치의 파편들.
하얀
고디바여, 나는 벗지 않는다--
죽은 손들, 죽은 절박함을.
그리고 지금 나는
거품으로 밀밭에, 바다의 찬란함에 다다른다.
아이의 울음은
벽에 녹는다.
그리고 나는
화살,
이슬이 되어 날아간다
돌진과 하나가 되어
자포자기 하고, 붉은
눈, 아침의 가마솥 속으로.
* 에어리엘은 셰익스피어의 {폭풍우}(The Tempest)에 나오는 공기의 요정이다
[출처] 실비아 플라스 시 모음 - 11편|작성자 리오
그녀의 시는 어렵다.
그러나 뭔가 강렬한 외침이 가슴을 친다.
사랑도 재능도 너무 크면 힘들다. 살아보니
적당하고 평범한 것이 것이 최고다.
자신도 그리고 사랑하는 내 옆의 사람들도 그 열정의 불꽃으로 아프게 하지 않을 테니까.
그러나 그렇게 뭔가 강렬하고 열정적으로 살다간 그들이 부럽기도 하다.
다 타버린 재 속에서도 불꽃같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생을 향해 타오르는 열정을 지닌 사람들이......
채운도 그랬나 보다.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 실비아 플라스의 슬픈 인생이 안타까웠나 보다.
천재 시인으로서의 실비아 플라스의 재능이 부러웠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