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젊은 사람

by은진

오전 8시 40분, 남편과 함께 시부모님을 모시고 노인전문병원에 도착했다. 진료 예약은 9시였다. 퇴직하면 아침잠부터 실컷 자보자던 계획은 이런 식으로 자주 미뤄졌다.

지방 소도시의 아침 거리는 그런대로 한산했다. 그러나 병원으로 꺾어 드는 길부터는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환자를 내려주는 차들과 느린 걸음의 어르신들, 휠체어를 미는 보호자들이 뒤엉켜 오도 가도 못했고, 주차장은 턱없이 부족했다. 야외주차장은 멀었고 예약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아 나와 시부모님이 먼저 내렸다. 한 걸음 한 걸음을 겨우 떼는 시아버지를 부축해 2층으로 올라갔다.

대기실은 이미 만원 버스 안 같았다. 긴 복도 양쪽 의자마다 사람이 앉아 있었고, 앉지 못한 이들은 벽에 기대 서 있었다. 아픈 사람이 이렇게 많은 곳도, 이렇게 많은 노인이 한 곳에 모인 곳도 처음 보았다.

접수창구에서 예약을 확인하자 "기다리세요"라는 무심하고 짧은 대답만 돌아왔다. 멀리서 왔는데 그저 기다리라니, 이런 식이라면 예약제는 왜 있는 걸까 싶어 작게 한숨이 나왔다. 어딘가에 차를 대느라 한참을 헤맨 남편도 뒤늦게 올라왔다.

잠시 뒤 간호사가 환자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대기실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대답이 없자 한 번 더 목소리가 울려 퍼졌고, 저 멀리 복도 끝에서 "여-기-요" 하는 느릿한 대답이 들려왔다.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어르신이 천천히 걸어오자 간호사는 곧장 다가가 팔을 잡았다.

두 사람의 느린 실루엣이 가까워지는 동안 사람들의 시선도 그 걸음을 따라 움직였다. 예약제는 왜 있느냐고 속으로 투덜대던 마음이 슬그머니 접혔다.


빈자리를 겨우 찾아 시부모님을 모셨다. 복도 한구석의 진료실 앞은 그나마 한산했다. 소아청소년과 앞이었다. 노인 환자가 대부분인 병원에 소아과가 있다는 게 의외였다. 그 앞만 소음이 덜했다. 마침 한 엄마가 아이의 손을 잡고 들어가고 있었다.

엄마는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몸을 낮췄고, 아이는 무언가를 쉴 새 없이 조잘거렸다. 그 작은 목소리가 복도에 맑게 번졌다. 무표정하던 어르신 몇 분이 아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가 금세 사라졌지만, 그 순간만큼은 병원 대기실의 공기가 한결 부드러웠다.

그제야 답답하게만 느껴지던 대기실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말끔한 정장을 입은 사람은 찾아볼 수 없었다. 무채색 점퍼와 오래 신은 운동화, 손때 묻은 가방들. 할머니들은 하나같이 짧은 파마머리였고, 할아버지들은 이어폰도 없이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며 손끝으로 무언가를 계속 눌러댔다.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트로트 반주가 들렸고 거침없는 통화 소리도 들렸지만 아무도 눈살을 찌푸리지 않았다.

언제 부를지 모르는 이름 때문에 진료실 바로 앞에 서 있었다. 그때 한 어르신이 나와 남편을 보며 빈 의자를 두어 번 두드렸다. 흙빛으로 그을린 얼굴에 굵은 주름이 깊었지만 허리는 꼿꼿한 분이었다.

"여기 앉아. 그런데 젊은 사람들은 어디서 왔어?"

젊은 사람?

나는 반사적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굽은 허리와 흰머리 사이에서 우리 부부와 비슷한 나이대조차 찾아보기 힘들었다.

어딜 봐도 나는 나이 든 아줌마다. 그 호칭이 익숙하다. 아니, 그렇게 불리는 것도 이제는 감사하다. 뿌리 염색을 미루면 정수리부터 흰머리가 훤히 드러난다. 거울 속 머리 모양만 놓고 보면 할머니라 불려도 이상할 것 없다. 그런 내가 이곳에서는 팔팔한 젊은이 취급이라니. 나름 기분 나쁘지 않았다.

보령에서 시부모님을 모시고 왔다고 하자 어르신은 우리를 한 번 더 바라보았다.

"그렇게나 멀리서 왔어? 큰일 하느라 고생이 많네."

말끝에 순한 눈빛이 따라왔다.

고생이라는 말을 가족이 아닌 처음 보는 사람에게 들으니 좀 묘했다. 병원에 모시고 오는 일은 우리 부부에게 고생이기 전에 해야 할 일이었고, 해야 할 일에는 수고했다는 말이 따로 붙지 않았다. 목이 뜨끈해졌다. 나는 대답 대신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나는 첫차 타고 왔지. 혼자야."

어르신은 날씨 얘기라도 하듯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어르신의 발끝을 내려다보았다. 앙상한 정강이 아래 운동화가 가지런했다. 낡은 끈을 두 번 단단히 묶어 놓은 모양이었다. 혼자 병원에 와서 진료를 받고 다시 버스를 타러 갈 사람의 신발이었다.

한참 만에 시아버지의 이름이 불렸다. 나는 시아버지의 팔을 잡았다. 단단해 보이던 아버님의 손은 마디마디가 가볍고 헐거웠다. 귀가 어둡고 다리가 불편해진 시부모님은 이제 병원도, 약국도, 전구 하나 바꾸는 일조차 우리의 손길을 필요로 하신다.


진료를 마치고 복도를 걸어갈 때였다. 평소 아버지와 친하지 않다며 무뚝뚝하게 굴던 남편이 말없이 아버지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아버지가 몇 걸음 걷다 숨이 차 멈춰 서자 남편도 군말 없이 곁에 멈춰 섰다. 아버지가 다시 발을 떼자 남편도 한 걸음 늦춰 따라갔다.

병원을 나서기 전 대기실을 한 번 더 돌아보았다. 어르신이 두드려 주던 의자에는 이미 다른 사람이 앉아 있었다. 첫차를 타고 오셨다던 그분은 진료를 마치고 버스를 타러 가셨는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잡고 있던 시아버지의 헐거운 손을 더 깊이 쥐었다

이전 07화도둑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