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갈 곳이 있는 자유

교토의 가모 강에서, 가족의 빈자리를 그리다

by나온우

유독 쳇바퀴를 도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다. 매일이 똑같은 육아에 지쳐가고 있었다. 아이들도 아프지 않았고, 와이프와도 갈등 없이 잘 지내고 있던 시간들. 하지만, 그렇게 모든 게 안정이 되자, 빠져나갈 곳이 없는 것만 같은 무기력함이 나를 휘감았다. 이 반복되는 삶은 끝이 없을 것만 같아 보였고, 그 좋아하던 게임도, 술도 전혀 위로가 되어주지 못했다.


물리적으로 벗어나고 싶었다. 쳇바퀴를 계속 돌아야 한들, 잠깐이라도 멈춰서 쉬고 싶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숨이 막혀 쓰러져버릴 것 같았다. 아이들을 재우고, 와이프와의 술자리에 얘기했다. "여보, 나 지금 휴가가 필요해. 며칠만 나 혼자 어디든 다녀올게."


와이프는 한숨을 쉬었다. "여보, 나도 요새 많이 힘든거 알잖아." 나도 알고 있었다. 요즘 와이프가 회사에서 많이 힘들어 한다는 걸. "응, 나도 알아. 근데, 내가 이대로 계속 있으면 미쳐버릴 거 같아서 그래... 미안해. 한 번만 시간을 줘." "어쩔 수 없지. 알아서 해. 대신 다녀와선 좀 나아졌으면 좋겠다." "... 그래. 고마워."


대신 나 혼자 가는 여행이니, 용돈으로 가기로 합의했다. 어디든 비행기를 타고 가고 싶었다. 목적지를 '전 세계 모든 곳'으로 선택하고, 제일 싼 항공권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비수기 평일 출발 기준으로 유럽 왕복 항공권이 40만 원밖에 하지 않았다. '내려서 밥만 먹고 돌아올까?' 어쨌든 비행기를 타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떨어져 있는 여행이니까.


찾다 보니 바로 다음 주 오사카 왕복 항공권이 10만 원도 하지 않았다. 언젠가 한번 가보고 싶던 교토를 이 가격에 갈 수 있다니! 바로 결제 버튼을 클릭했다. 준비랄 것도 없었다. 내몸만 홀로 떠나는 여행은, 백팩 하나면 충분했다. 새벽 공항으로 가는 길도, 평일 한산한 공항에서 부칠 짐도 없는 여유로운 발걸음도, 아무것도 신경 쓸 필요 없는 출국장에서의 여유도, 그토록 바라던 자유였다.


교토에서는 캡슐 호텔에서 쉬었다. 나 하나만 들어갈 수 있는 작은 침대가 주는 아늑함이란. 아이들과 함께였다면 새로운 환경에서 '호기심 천국' 모드가 되어 만지고 다니는 아이들을 "하지 마!" "조심해!" 하고 따라다니며 소리치느라 금세 넋이 나가버렸겠지. 정반대의 지점에서, 작은 평온을 느끼는 공간이었다.


걸어가다 만난 라멘집 앞의 긴 줄을 보며, "오, 여기 맛집인가 보다.' 하며, 바로 줄을 서기도 했다. 역시나 아이들이 있었다면 상상도 못 할 즉흥적인 결정이었다. 일단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 자체가 도전이었을 테다.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개별 테이블이 있는지, 아이들이 먹을만한 메뉴가 있는지 확인해야 했고, 식당에 들어가서도 낯선 곳에서 정신없이 아이들 밥 먹이는 걸 신경 쓰다 보면 내 식사는 언제나 식어있었다.


한참을 줄 서서 기다려 들어간 라멘집은 작고 아담한 테이블이 몇 개 있었다. 그 좁은 자리에 혼자 앉아, 여유 있게 메뉴판을 보며 메뉴를 고르고, 주문하고 나서 식당을 둘러볼 수 있다는 것, 이게 여행이지, 싶었다. 조금 기다려 나온 라멘을, 여유 있게, 한 젓가락씩, 음미하며 먹었다. 아, 이렇게 편안한 외식을 한 게 언제였던가.


아무런 목적지 없이 발길이 닿는 대로 걷고, 걸었다. 왠지 사람이 북적이던 독립서점은, 찾아보니 무라카미 하루키가 추천한 서점이라고 했다. 들어가서 한참을 구경하다가, 점원에게 물어 근처에 괜찮은 카페를 물어서 갔다. 거기서도 한참을 앉아 바카라 읽고, 커피를 마시고, 그러다 지겨워질 때쯤 자리를 일어섰다. 다른 누군가를 위해 나의 하고 싶음을 뒤로 물러도 되지 않은, 모든 게 내 뜻대로였다.


여행의 마지막 날 밤, 강을 따라 걷다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미 사람들이 저마다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 강가에 많이 있었고, 나는 그 사이에서 홀로 강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도 내가 완벽하게 원하던 순간이었다. 흘러가는 강, 그 흘러가는 물소리를 들으며 있었다. 그 순간을 멍하니 흘렸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둘러앉아 강가를 보며 얘기를 나눴다. 버스킹하는 노랫소리가 들렸다.


한데, 이상했다. 뭔가 허전했다. 시간은 저녁 8시가 넘어갔다. '원래 이 시간이면 집에서는 씻네 안씻네 하면서 투닥거릴 시간이겠군' 그 매일의 일상에서 벗어난 지금이 너무 편안한데, 마냥 편안하지가 않았다. 온전히 내가 여기서 모든 것들을 누리고 있기엔, 한국에 있는 세 모녀가 자꾸 생각이 났다.


집에 영상통화를 했다. 아이들은 "아빠 보고 싶어~" 라고 하고 있었다. 그 뒤에 보이는 와이프는 완전히 지쳐 있었다. 아, 나의 원하는 걸 위해 내 와이프는 내 몫을 채우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어서 와.. 애들이 보고 싶어 해." 통화를 마치고, 가로등에 비친 내 긴 그림자의 끝을 바라봤다.


짧은 여행의 순간을 돌아봤다. 혼자 걷던 중에 길에서 엄마아빠의 손을 뿌리치고 와다닥 뛰어가다가 꽈당 넘어지는 갓난아기가 있었다. '저 녀석, 딱 우리 둘째 같구먼. 자기 멋대로 가다 넘어지는 걸 보니.' 하며, 뒤에서 자연스레 그들을 따라 걸어보기도 했었다. 길거리에서 솜사탕을 파는 곳이 있으면 길거리 가다 솜사탕 안 사주면 떼를 쓰는 첫째가 떠올랐다.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 첫째가 떠오르던 길거리 아이스크림 노점상, 사방팔방 뛰어노는 걸 좋아하던 우리 둘째가 좋아했을 넓은 잔디의 공원, 그리고 우동을 참 좋아하는 와이프가 오면 두 눈 동그래져서 먹었을 법한 우동집, 아이들이 좋아할 것만 같은 장난감 가게.. 오로지 나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던 그 순간에도 나는 가족을 떠올리고 있었다. 아빠가 어디 갔는지도 모른 채 언제 오나 기다리고 있을 그 딸들을, 나의 빈자리를 애써 메꿔주고 있는 와이프를.


인천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경로에는 우리 집이 있다. 심심할 때마다 지도를 보는 취미가 있는 나는 그 높은 하늘에서도 금세 우리 집을 찾을 수 있었고, 내 시야에서 멀어질 때까지 한참을 바라봤다. 오전 8시 35분이었다. 저 점보다도 작은 아파트의 한 집에서는, 한창 어린이집 갈 준비로 실랑이하고 있을 한 엄마와 두 딸이 있겠지. 위에서 보면 이렇게 작은데, 너무 사소하기도 하고, 한편에서는 나도 잘 모를 애정이 솟아올랐다.


점심때쯤 돌아온 집은 초토화되어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한숨부터 나왔을 이 풍경이, 이상하게도 정겹고 편안했다. 치워도 치워도 끝이 없다고 느껴지던 이 짐으로 가득한 공간이, 바로 내가 그토록 편안함을 느끼는 세상이라니. 겨우 이틀을 못 본 딸들은 몇 년은 못 본 것처럼 아빠에게 후다닥 달려와 꼬옥 안겼고, 와이프는 몇 년은 혼자 아이들을 본 것처럼 지쳐 있었다.


며칠 자리를 비웠던 적이 있었는지도 모르게 나는 금세 일상으로 돌아왔다. 육퇴를 하고, 면세점에서 사 온 맥주 한 캔을 들고 와이프랑 소파에 앉았다. "어때, 나 없으니까 나의 소중함을 좀 느꼈어?" "아 모르겠고, 다음엔 내가 갈 거야." "그래. 우리 둘이 가자. 언젠가 꼭." "그건, 봐서."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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