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일곱 번째 귤껍질 편지
한국이 너무 좋아요. 평일에는 밤에 경복궁을 한 바퀴 돌면서 러닝을 하고, 주말에는 한가롭게 여름 철망산 매미 소리를 들으며 떨어진 도토리를 주워요. 종종 뮤지컬을 보고, 꽃을 사고, 오로시 젤라또에서 초코와 피스타치오맛 아이스크림을 먹어요. 그뿐인가요. 발레를 배우고 싶으면 회사에서 10분 거리에 학원이 있고, 재즈바를 검색하면 가까이에 열 곳이 넘게 있어요. 그래서 더 묻게 돼요. 왜 여행을 가야 하는지.
<삶의 발명>이라는 바카라을 읽으며, 그 이유를 조금 알게 되었어요. 나는 오늘을 살지만, 내 머릿속 수많은 기억들을 토대로 지금을 경험해요. 바카라에서 밤하늘에 대한 문장을 읽으면, 몽골의 쏟아질듯한 은하수가 떠올랐어요. 낯선 곳에서 현지인이 추파를 던졌던, 그렇게 현지인에게 도리어 신비로운 여행자로 기억되었다는 기록은 프랑스에서 마주한 친절하거나, 신기해하는 눈빛들을 떠오르게 했어요.
내가 얼마나 아득히 먼 곳으로 왔는지 화들짝 떠오르게 하는 생경한 풍경들, 사소한 것에도 커다란 감정을 쏟아내면 음미했던 시간들이 고스란히 제 안에 있었어요.
전에는 수많은 삶의 가능성과 장면을 만나기 위해 떠난다 말했어요. 이제는 불시에 떠올라서, 지나온 삶을 사랑하게 해 줄 장면들을 만나기 위해 떠난다고 말할래요.
외고에 지원하며, 인상 깊게 읽은 바카라 두 권을 묻는 문항에 <너는 특별하단다>라는 동화를 소개했어요. 웜믹이라는 나무 인형들이 모여 살아요. 하루 종일 나쁜 표와 좋은 표를 붙이며 살죠. 펀치넬로는 역시나 주인공답게 온통 나쁜 표만 받아요. 그러다가 어느 표도 붙지 않는 웜믹을 만나요. 이유를 묻자 우리를 만든 이에게 가보라고 하죠. 거대하고 왠지 따스한 목수 아저씨를 만나요. 그리고 나는 특별한 존재가 아닐까, 생각하는 순간 나쁜 표 하나가 떨어져요.
이번 편지에서 왜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냐면요. 남들이 뭐라 하든 나 스스로 날 좋아할 수 있는 힘, 그 힘을 내내 기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요즘 꽤 근육이 붙은 것 같아요. 내가 별로고, 최악이고, 이렇게 느껴질 때도 물론 있어요. 그래도 오늘 하루 내 기분을 좋게 할 방법을 여러 개, 챙겨놓고 사는 느낌이에요. 곳간이 가득 찬 걸 보는 것처럼 든든해요.
열심히 사는 건, 습관 같아요. 게으름을 피우고, 부지런을 떨고 이런 걸 후자가 더 노력하는 삶으로 생각하기 쉬운데요. 사실 둘 다 삶의 관성에 따라 사는 것 같아요.
세희는 하고 싶은 거 다 하며 살 것 같아, 이런 어마무시한 칭찬을 들으면 기분이 좋은데요. 역시 갓생 산다, 이런 말을 들으면 갸우뚱해요. 칭찬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참 부지런히도 산다, 그렇게까지 해야 해?라는 질문이 함께 있는 느낌이라서요.
뭐, 지금은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게 즐거워요. 부산스러움은 호기심을 폭발시키는 자연스러운 과정인 것 같아요. 혹시 나중에 이것이 바쁨을 위한 바쁨이 되는 건 경계해요. 중요한 문제에 눈감고, 미루고 싶어 작은 바쁨을 만들기도 하더라구요.
올 가을은, 어른 여자로 살아보려고요. 귀여움 원툴로 살아남는 건 이십대까지예요.
초등학교 때부터 반마다 꼭 일짱 친구가 있잖아요. 다들 그 주변을 맴돌 때 저는 애초에 노력하지 않는 쪽이었어요. 그래서 누군가는 저를 흥미로워하고, 또 다른 이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죠.
친구에 대한 관심이 폭발하던 5학년 때를 제외하고, 이후 고등학교까지 쭉 그랬던 것 같아요.
그렇게 무리의 중심에서 빗겨 서서 제가 좋아하는 이들과만 놀았어요. 그리고 이제서야, 좀 능동적으로 관계 맺어 봐야겠다는 다짐이 들어요. 그게 어른의 자질 같거든요.
지나가버린 인연을 그저 바라보며 시절인연이었다, 하지 말고, 조금의 적극성을 발휘할 거예요. 그 시작으로, 제가 무척 멋지다고 생각하는 분께 오랜만에 생일 인사와 선물을 건넸어요.
당신과의 관계를 잘 챙겨가고 싶다, 나는 네가 꽤 좋다, 이런 애정 어린 적극성을 가져보려구요. 주위 사람들과 잘 더불어 사는 것, 그게 어른 여자의 첫 조건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