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넘어가기, 곱게 미치기

스물아홉 번째 귤껍질 편지

by귤껍질

오랫동안 글을 쓰지 못했네요. 변명하자면 쓸 수 있는 글의 총량이 있는 것 같아요. 이번 주는 대학원에 지원하며 자기소개서와 포트폴리오를 정리하느라 졸린 눈을 하고 늦게까지 깨어 있었거든요. 다시 대학생 된 느낌이었어요.


시안의 이야기, 나의 관심사가 확장된 이야기를 적어 내려 갔어요. 지나간 이야기를 되짚다 보니 100쪽 정도의 한 권의 이야기가 되었어요. 나를 소개할 때 회사가 가장 먼저 나오지 않는 것도 새로웠고, 내가 어떤 경험들로 구성된 사람인지, 요리라면 낱낱의 재료를 정리해 본 느낌이었어요.


뭐든 열심히는 해요. 이제 공은 던져졌고, 또 열심히 나아가야죠. 관련된 바카라을 일주일 만에 10권 정도 샀고, 삼일에 하나꼴로 읽어내리며, AI에게 무수한 질문을 던지며 지내고 있어요.


최성운의 사고 실험 김영민 교수님 편을 재밌게 봤는데요. 예술가는 곱게 미친 사람이라는 말이 재밌었어요. 곱게 미쳐서 나의 똘기와 개성을 어떤 영역의 전문가가 되는 방식으로 표출하고 싶어요.



앞으로 시안과 광덕산의 소식들은 별도 글로 발행하려고 해요. 자동차 사고로, 시안북스테이의 두 면이 무너졌는데요. 다행히 인명 사고는 없었지만, 스테이는 바로 중단되었어요. 그대로 원상 복구하기보다는, 그동안 아쉬웠던 부분들을 보완하기로 했어요. 정원을 더 잘 이용하시도록 뒷문을 냈어요. 또 거실과 부엌을 분리했어요. 정원과 바로 연결되고 차와 위스키 한잔 기울 일 수 있는 작은 부엌을 만들고 있어요.


이런 이야기를 앞으로 시안 뉴스레터 겸 온라인카지노 시리즈에서 이어가 볼게요 :)





ch1. 마음이 끌리는 재료와 도구, 조각이라는 예술품이 가지는 존재감에 대해


파주의 정현 작가님의 작업실을 방문했어요. 지금까지 걸어온 여정에 따라, 작품 세계를 설명해 주셨어요. 침목, 철의 부산물, 나무와 돌, 타르, 녹까지 시간을 견디고 버려진 것들에 꾸준히 관심을 기울여 오셨어요.


가만히 내 마음이 어떤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싶어 하는지, 기다리고 고민해 본 사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차분차분히 내어 놓으셨어요.


기차와 탱크의 무게를 오래 견뎌온 침목으로 만든 거인 같은 조각은 엄청난 깊이와 넓은 마음으로 무엇이든 괜찮다고 말해줄 것 같았어요. 수많은 삶을 지켜봐 온 커다란 거목 같았어요.


한국적인 것에 대한 관심이 무척 높아지는 시기여서, 무심해서 힘이 있는 정질이나 휘어진 나무도 대들보로 쓰는 자연과의 공존과 존중에 대한 이야기가 귀에 쏙쏙 들어왔어요.


가지가 잘린 뒤, 수많은 잎을 내는 나무들의 그림도 보았어요. 어려운 상황에 더욱 뿜어져 나오는 생의 에너지, 삶을 기어코 나아가게 하는 터져 나오는 의지력이 느껴졌어요. 살아가며 마주할 여러 힘든 변화의 시기에 눈앞에 떠오를 장면이었어요.


스토리가 있는 작가는 강해요. 정현 작가님의 작업실을 나선 뒤,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도 분명하게 기억이 돼요. 나의 마음을 움직이는 대상이 무엇인지 정확히 아는 건 엄청난 힘이라고 느꼈어요. 걸맞은 재료와 도구를 선택하며, 나의 생각을 물질로 표현할 수 있는 게 예술 가고, 저도 그렇게 되고 싶다는 생각도 했어요.


대학원을 준비한다 하니, 와르르 귀한 바카라들을 추천해 준 분이 있어요. 그 리스트를 함께 남겨둘게요. 한국의 미에 대해 궁금하다면 읽어보세요.


<저공비행> 하라 켄야

<남김의 미학> 이남호

<나를 찾는 한국 미학 여행> 신동주

<기교 너머의 아름다움> 최광진




ch2. 새로운 삶과 만날 때, 우프와 띵크그린


모티프원 사장님이 새로 낸 프레농이라는 숙소에 머물며, 이틀 내리 띵크그린이라는 곳을 다녀왔어요. 첫날은 혼자 가서 현미밥을 먹으며 글을 썼고, 둘째 날은 엄마와 함께 방문했어요. 범상치 않게 패셔너블한 옷을 입은 사장님 부부가 계셨는데요. 인연이란 매우 신기해서, 엄마의 지인 두 분과 아는 사이셨어요. 떡과 고구마를 간식으로 내어 주셔서 감사히 먹으며 대화를 이어갔어요. 그러다가 우프(wwof)라는 시스템을 알게 되었어요.


농가에서 일손을 돕고, 숙식을 제공받는 구조인데, 엄마의 지인분도 파주에서 농가를 운영하신다고 했어요. 맛있고 건강한 음식을 먹는 것, 식재료가 땅에서 나고 조리되는 과정 하나하나를 곱씹어 보는 것에 관심이 많아요. 새로운 경험과 깊이 있는 삶의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에 꼭 참여하러 오겠다 말씀드렸어요.


논밭 갤러리에서 빨간 상자에 갇힌 나무들, 그 나무들에 붙은 이름들을 보고 마음 아파하고, 머리가 없는 조각 앞에서 방향성 상실에 대해 대화를 나눴어요. 처음 가 본 갤러리였지만, 작품에서 느껴지는 것들에 대한 엄마의 수다를 듣다 보니 전문 도슨트 못지않게 작품들과 교감하고 온 기분이었어요.


한참 먹고, 구경하고 나서 마지막 인사를 드리니 조만간 보자, 하셨는데 그냥 인사치레가 아닌 진심으로 느껴졌어요. 저도 진심으로 그러겠다고 화답했는데, 잘 전달이 되었길 바라고 있어요.



ch3. 어떤 부부는, 이렇게 삶을 운영해요.


프레농에서 하루 머무는 고사이 엄마와 다투고, 또 다음날에는 짱친이 되어 돌아다녔어요. 서울에서 결혼식을 마치고 파주로 오기로 한 엄마를 기다리며, 라운지에서 LP 음악을 들으며 바카라을 읽었어요. 사장님 부부와 가족에 대한 바카라인 <여행자의 하룻밤>과 <아내의 시간>이 놓여 있었어요.


가족의 모습은 어떠해야 한다,라는 틀이 관계를 해치지 않도록 고민하고 조심하며 각자의 삶이 존중받는 공동체를 만들어가고 있었어요. 가족은 꼭 같이 살아야 한다는 기본적인 생각부터, 가족 내에서 역할 서로의 삶에 대한 관여의 정도 등 당연하지 않지만, 으레 그렇게 하는 것들을 하나씩 질문하고, 두 분의 삶에 맞게 조정하시며 살고 계셨어요. 삶에 대한 사유와, 존중이 묻어나는 글을 읽으며 존경스러운 마음이 들었어요.



ch4. 너무 좋아서, 탐이 나는 것들


탐이 나는, 그래서 설레게 하는 대상이 있으신가요? 프레농에 들어섰을 때 감탄 뒤에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질투였어요. 나도 이런 공간을 만들고 싶다. 기분 좋은 자극과 욕심이 올라왔어요. 바카라을 읽으며 모티프원과 프레농은 그 안에 담긴 가족의 이야기, 그들이 삶을 대하는 태도로 차별화되는 공간이구나 싶었어요.


시안도 저희 가족의 이야기를 담고 있어요.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써 내려갈 수 있을까, 기능만 제공하는 게 아니라 삶에 대한 사유도 함께 전달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ch5. 상상을 구현하기, 호텔 치커리


호텔 치커리에 다녀왔어요. 광명 집 인테리어 기간 동안 머물렀던 제비댁 바로 옆에 위치해 있더라고요. 오가며 여긴 어딜까, 궁금해서 기웃거린 바로 그곳이었어요. 그래서 괜히 이곳에 다시 온 게 운명처럼 느껴졌어요.


에어비엔비를 하고, 카페 공간을 운영하며 공간에 대한 노하우가 쌓이면 최종 보스 같은 프로젝트가 이렇게 폐모텔, 건물 단위를 매매하여 호텔로 바꾸는 거라고 하더군요.


꿈속 세상에 온 듯 녹아내리는 듯한 조명, 색유리로 된 오브제들, 불투명한 무늬 창, 서도호 작가님의 작품으로 된 문, 내추럴한 꽃꽂이와 검은 고양이 오브제, 파란 얼굴의 신선 같은 할아버지가 춤추는 영상 등 꿈속 세상같이 온갖 이미지들이 불규칙하게 자리 잡고 있었어요.


여기에 철저하게 의도된 노란빛이 테이블과 의자에 내리치고, 인조 선인장이 창 밖으로 보였어요. 왠지 미국 대륙 어딘가 도시지만 야만이 깃든, 근처에 사막이 있는, 지명이 바뀌는 경계에 있는 식당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정말 취향을 가득 담아, 재밌게 만든 공간이구나 느껴져서 이곳저곳 둘러봤어요. 테라로사에 방문했을 때처럼, 쓰임이 없이 동그마니 놓인 공간에서 새로운 모습을 이끌어내고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다시 들었어요.




이번 귤껍질 편지는 긴 기간의 회고인 만큼 매일 쓴 일기와 나에게 보내둔 카톡에서 뒤적거리며 썼어요. 더 생생한 글을 위해서였는데, 일기를 읽으며 과거의 나를 만나는 게 꽤나 좋았어요.


여전히 운동에 진심이에요. 많게는 하루에 세 번 요가, 필라테스, 헬스를 해요. 그렇게 기른 체력을 바탕으로 여기저기 열심히 쏘다니고 있어요. 구체적인 맥락은 잊었는데, 팀장님과 면담을 하면서 가장 많이 신경 쓰는 건 그날 좋은 기분을 만드는 거라고 말한 적이 있어요. 넉넉한 마음만 준비되면 어떤 문제도 최선의 방법을 찾아 잘 해결할 수 있더라고요.


동시에 싫은 걸 안 하며 사는 연습 중이에요. 제 체력이나 컨디션이 받쳐주지 않는 날은 약속을 취소해요. 불편한 자리, 내키지 않는 만남, 무리한 일정은 지양하려고요. 꾹 참고 싫은 걸 하면, 삶이 원래 그런 거구 나하고, 좋아하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못하게 될 것 같아요.


그리고 싫은 걸 안 할 수 있는 자유는 엄청난 부자도 누리기 힘든 거 아닌가요. yes,라는 말보다 no라고 말한 뒤, 나의 페이스에 맞춰 삶을 운영할 때 묘한 쾌감도 있어요.


동기가 냅다 후배분들께 저를 뽀로로라고 소개했는데, 이런 생각을 들킨 건가 싶으면서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어요. (ㅋㅋ)


동시에 싫은 관계를 견디는 힘에 대해서도 생각해요. 사실 순수하게 좋은 관계는 없고, 마찰과 조정을 통해서 삶의 다른 면이 보이는 거니까요.


싫음도 일부로 받아들이는 넉넉한 마음이 이해하고 경험할 수 있는 삶의 범위를 넓혀줄 테니까요. 아무튼 그 중간에서 왔다 갔다 조정하며 하루를 잘 운영해 보려고요.


지난 몇 주는 제 삶의 바운더리를 넘어서, 도시와 환경, 예술의 영역으로 나아가봤던 시간이었어요. 앞으로는 좀 더 짧은 주기로 회고해 볼게요.



이번 글부터는 일정을 나열하는 건 맨 마지막으로 조정하려고요. 궁금하신 분만 보셔요.


꽤 긴 기간의 일정을 정리해 봤어요.


9/14 저녁 펍, 무과수님 여행메이트 응모

9/15 에어비엔비 강의

9/16 오일파스텔 수업

9/18 미술관학교, 대외활동 워크숍

9/19 트레바리, 영어 시험

9/21,22 브루잉클래스, 모헤이(장염으로 취소)

9/24~27 성남, 김포, 광명, 천안을 오가며 명절 나기

9/30 미술관학교

10/2 밤샘 작업 후 용산 집들이

10/3,4 천안, 첫 솥밥 요리

10/7 대림사진관 여권 사진 촬영

10/8 여권 재발급 신청, 바젤리크 전시 및 안미희 관장님 강의

10/10 정현 작가님 작업실, 모티프원 숙소 방문

10/11 띵크 그린, 황인용 뮤직 카메라타

10/13 첫 출장 항공권 발권

10/14 첫 출장 숙소 예약

10/15 사장님과 사진 촬영

10/16 대외활동 진행, 서울국제음악제


다음 글에서 뵈요!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