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여덟 번째 귤껍질 편지
요즘은 여행하듯 일상을 살았어요. 세상 온갖 아름다운 걸 보겠다, 는 기세로 살아요. 삶에서 반드시 해야 되겠다는 건 없어요. 오히려 그러니까 굉장히 자유로워요. 여러 갈래로 뻣어나갈 수 있는 가능성이 보이고, 어디로 가든 나는 행복할 것 같고, 왠지 두둥실 마음이 떠 있어요. (연금술사, 바카라에서 행복의 비밀은 '숟가락 속 기름 두 방울을 잊지 않는 동시에, 세상 모든 아름다운 걸 보는 것'이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어요.)
지금 오티움의 재즈 음감회에 와 있어요. 재즈에 취해 쓰는 글이라, 낭만 필터가 씌워진 듯도 해요. 한 주 간 아름다운 공간과 그림, 조각품들 속에서 휘몰아치듯 행복한 시간을 보냈어요. 이 좋았던 기분을, 기억을 어떻게 기록하면 좋을까 고민이 되었어요. 일단 토플 시험 끝나고 기록하자, 영어 시험을 핑계로 글에 대한 생각을 잠시 멈춰뒀어요.
어제부터 시험이 끝나면, 우다다 마음이 궁금한 걸 따라 달릴 수 있게 풀어줘야지 했어요. 미뤄둔 글도 쓰고, 바이브코딩으로 만들고 있는 첫 서비스도 마무리하고, 환경 대학원도 알아보고, 그렇게 다시 사부작거리며 무언가를 할래요.
프리즈/키아프 기간 동안 모든 나잇 행사에 참여하고, 친구와 잔다리 페스타에서 프랑스 아티스트의 오프닝 무대를 봤어요. 또 다음날은 홍제천 근처 스위스호텔에서 숙박하며 서울 여행을 했어요. 그뿐인가요, 체크아웃을 하고 바로 평창으로 부모님과 여행을 갔어요. (의도한 건 아닌데, 모든 게 연달아 있게 되어서 걱정했는데요. 생각보다 제가 체력이 좋더라고요.)
좋아하는 게 지나가면 또 너무 좋은 게 왔어요. 좋아하는 마음도 엄청난 에너지라서 기가 쏙 빠져버리기도 했어요. 자주 행복해서 심장이 아팠던 한 주였어요. (이 말을 하니, 지인이 병원에 가야 하는 거 아니냐고 했지만 ㅎㅎ 정말 설렘이 잦아들면 또 신나는 게 찾아와서, 버거웠어요.)
올해의 아트주간, 파리 여행에 이어서 두 번째로 색과 생각들이 마음과 머리를 가득 채우는 것 같았던 시간들을 소개할게요. 화요일부터 오늘까지의 일정에요. 월요일 을지로 나잇을 가지 않은 것이 유일하게 조금 아쉬워요. 앞으로도 충만하게 즐길 수 있게 체력을 더 탄탄하게 길러둘래요.
9/1 한남 나잇
9/2 크로스핏 체험, 청담 나잇
9/3 삼청 나잇
9/4 잔다리 뮤직 페스타
9/5 프리즈/키아프, 스위스 그랜드 호텔, 홍제천
9/6 평창 (정강원, 트리고 본점)
9/7 강릉 (하슬라아트월드, 고래바카라방, 테라로사 본점)
9/8 원주 (뮤지엄산)
9/9 점심요가, 미술관학교 첫 수업, 헬스
9/10 하트원 전시, 필라테스, 헬스
9/11 옥상 점심, 워크숍 진행, 엄청난 펜케이크, 헬스
9/12 토플 시험, 헬스, 오티움, 숙성회
9/13 백두강산
ch1. 작품으로 휘몰아쳤던 밤들
한남 나잇에서는 동그란 벽돌로 지어진 프리즈 박물관이 가장 좋았어요. 정원의 은색 의자들 위로 빗방울이 떨어져 아름다웠고, 풀들이 물을 머금어서 유독 청명했어요. 가정집 같이 아늑한 목재 계단을 타고 오르내리며 자연을 닮은 조각과 그림들을 관람했어요.
그다음으로는 파운드리서울 갤러리가 기억에 남아요. 해파리와 다정한 색으로 그려진 그림, 분홍색 음료 케이터링으로 예쁘고 마음이 살랑거리는 전시였어요.
그 뒤로도 크고 작은 갤러리를 돌며, 가구와 작품들을 잔뜩 봤어요. 비가 내렸고, 저녁 식사를 할 곳을 찾아 오래 이태원 거리를 걸었는데, 그래서 왠지 대학생 때 늦게까지 어울리던 기억이 겹쳐져서 좋았어요.
청담 나잇에선 딱 두 곳을 갔어요. 화이트큐브와 그 옆 페로탕이에요. 크로스핏 체험 수업을 하고, 혼이 쏙 빠질 줄 알았는데요. 은근히 쌩쌩해서 호로록 보고 오자 했는데요. 막상 작품 앞에 서니, 에너지가 채워졌어요.
화이트큐브에서 본 마리나 라인간츠 라는 브라질 작가의 작품과 페로탕의 미스터 라는 일본 작가의 작품의 결이 너무 달랐어요. 흩어지고 모이는 색들로 이루어진 작품 앞에서 마음이 따뜻했다가, 슬펐다가 하다가 경쾌하고 직관적인 애니메이션 앞에서는 기분이 산뜻하고 상쾌해졌어요. 그 격차에서 오는 새로움이 좋았어요.
삼청 나잇은 따릉이를 타고 본격적으로 돌아다녔어요. 외곽의 갤러리부터 국립현대미술관까지 돌아들어 오며 관람했어요. 날은 선선하고, 비 온 뒤 하늘이 아주 청명했죠. 산을 닮은 도자기 작품, 숯처럼 까만 오브제와 의자들, 눈이 초롱초롱한 곰돌이 그림, 깜짝 선물 같았던 민주킴 디자이너와의 만남까지 모두 좋았어요.
작은 파티 같았던 서촌 곳곳의 갤러리들과 달리 광화문역 근처 큰 갤러리들에서는 시끌벅적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었어요. 초록 숲과 푸른 바다를 그린 김보희 작가님의 그림이 마음을 시원하게 해 줬어요. 어쩌다 보니 로이킴의 공연도 봤어요. 특히 박서보 작가의 정돈되고 깊은 작품 옆 케이터링과 디제잉 파티가 이색적이었어요. 함께 간 일행이 3040의 클럽 같다고 했는데, 정말 어른들의 파티 같았어요. (ㅋㅋ)
화수목 퇴근하고 매일매일 갤러리를 가는 삶이 얼마나 좋았는지, 개성 있는 갤러리들과 휙휙 바뀌는 작품들 사이를 누비면서 한바탕 여행을 하고 온 기분이었죠.
ch2. 산바카라과 낮잠으로 잔뜩 사치 부린 여행
스위스그렌드호텔에 가자, 툭 이야기가 나온 뒤에 바로 숙소를 예약했어요. 써머 패키지를 예약하고, 늦여름 파티를 하기로 했죠. 수영복 뭐 입을까, 그날 패션의 포인트 컬러는 뭐로 할까 잔뜩 신나서 이야기하며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어요. 그리고 예약한 날짜가 되어 급하게 보라색이 하나씩 들어간 옷을 입고 만났어요. 그런데 수영장은 진작에 닫아버린 거 있죠.
일단 왁뿌 소금빵 하나 사들고 와구와구 먹으면서 "우리 오늘 일정은 어떻게 되는 거지", 물으니 "잘 모르겠는데 재밌겠지 뭐"하는 답이 돌아왔어요. 그렇게 홍제천 주민들 사이에서 연보라와 진보라 색 옷을 입고, 여행지에 온 것 마냥 사진을 찍었어요. 따스하게 햇살이 드는 동네 밥집에서 된장국과 한식을 먹고, 호텔에서 빙수를 거하게 먹었어요. 엄청난 피자 맛집에서 피자 먹고 소화시키겠다며 연남동까지 무한 산바카라을 했어요.
다음날 아침에는 조식을 먹고, 각자 쇼파와 침대에서 스르르 잠이 들었어요. 잔잔한 노랫소리와 창으로 비치는 햇살, 든든한 식사 후 낮잠이 얼마나 평화로웠는지, 오래 기억할 것 같아요.
ch3. 아빠도 예술을 좋아한다.
가족 여행은 다른 글로 기록해 볼게요. :3
ch4. 미술관학교, 주변인이 낼 수 있는 시너지
뮤지엄산을 마지막으로 서울로 다시 돌아왔어요. 그리고 바로 미술관학교가 개강했어요. 1기 오픈 소식을 듣고, 사옥에서 전시한 경험, 시안 갤러리에서의 경험을 모아서 지원했어요. 다행히 붙어서 첫 강의를 갔어요. 미술관이라는 정의는 계속 변해왔고, 최근 개정에서는 공동체 참여라는 부분이 추가되었다고 해요. 그러면서 미술관에 다양한 사람들이 필요하게 되었다구요. 심리학도이자 금융권 종사자로서 반가운 소식이었어요.
김정운 교수님의 강의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말들로 가득했어요. 여수의 섬의 미역공장을 서재로 개조했다는 것부터, 나체로 바다수영을 하고 하염없이라는 의자에 앉아 생각을 풀어놓는다는, 자기소개부터 심상치 않았죠. 무의식이라는 개념의 탄생이 새로운 세상을 만든 거라는 이야기, 생각의 경계를 넘어 계속 밀고 간 사람들이 잘 제자리로 돌아오면 천재, 계속 가버리면 또라이가 된다는 말이 재밌었어요.
심리학, 예술, AI가 각 영역의 경계를 넘어 훌륭한 요리처럼 연결된 강의였어요.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너무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채웠어요. 머리가 좀 아프긴 했지만, 미술관에 대해 이렇게 많은 고민들을 해본 건 처음이라, 첫 강의로 아주 적절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잘 배워서 시안 갤러리로, 제 일로, 앞으로 제가 만들고 싶은 공간으로 풀어내 보고 싶어요.
ch5. 재즈라는 낭만 언어
이른 헬스를 하고, 저녁으로 코돈부리 돈가스를 든든하게 먹었어요. 그렇게 배뚜드리며 있는데, 좋아하는 언니에게 연락이 왔어요. 오티움에서 재즈 음감회가 있다고, 유혹적인 현장 영상을 보내왔죠.
즐거운 콘텐츠로 휘몰아쳤던 한 주라, 주말 저녁은 차분히 쉬어야지 했는데요. 마침 메시지를 받았던 곳이 오티움과 15분 정도 떨어진 곳이라, 마음 따라 달려가기로 했어요. 가면 제가 행복할 것 같았고, 그런 예감이 들면 망설이지 않고 행동하는 게 좋더라구요.
거대한 오디오에서 명반들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그 음악을 배경으로 바카라을 읽고 노트에 글을 썼어요. 오티움의 사장님 두 분은 슬롯적인 이슈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시는 분들이 신데요. (검색해 보시면 엄청난 커리어를 가지고 계십니다 ㅎㅎ) 이 슬롯의 여러 목소리들이 서재를 가득 채우고 있었어요.
언니가 사랑 노래를 선곡했는데, 음질이 너무 크고 튀었어요. "마치 제 사랑 같네요"라는 말이 재밌었어요. 씩 웃으며 다음 코스를 정했다며, 화려한 공작새 오브제가 빛나는 공간을 소개해주던 표정도 좋았어요. 서로의 폭발하는 호기심과 아름다움에 쉽게 매료되는 습성을 이해하고 있고, 삶을 잘 살아내길 진심으로 응원하는 느낌이에요. 언니가 <옐로페이스>라는 바카라을 슥 선물로 사줘서 집에 와서 늦은 밤까지 읽어내렸어요.
ch6. 내가 하고 싶은 걸 먼저 한 사람들
백두강산, 이라는 카페가 곧 리뉴얼되어요. 제가 애정하는 커뮤니티에서 모임 공간 겸 카페로 사용한다고 했거든요. 일요일 아침에 찾아갔더니, 손님이 마침 저뿐이라 같이 김밥도 나눠먹고 공간, 건축 전문가분께 커리어 상담도 했어요. 이름만 알고 있었지 처음 가본 곳이었어요. 그런데 아는 얼굴들과 함께 있으니 너무 아늑하고 마음이 풀어졌어요.
저도 을지로에 공간을 하나 열고 싶다, 생각하고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는데요. 직접 실행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나도 하고 싶다,라는 마음이 불쑥 커졌어요. 무언가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의 설렘과 에너지가 가득했어요.
궁금하고 끌리는 게 생기면 그 주변을 얼쩡거려요.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생각을 듣고, 도대체 어떻게 하루를 살아가나 옆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요. 이번 주는 매력적으로 보인 세상에 달려가서 폭 뛰어들어봤던 시간이었어요. 종종 돌아와서 그 여운을 만끽해 보고 싶어서 글로 남겨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