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중요한 건 그날의 바다

좋아하는 일을 자꾸 미루던 30대 온라인 게임인의 첫 프리다이빙 여행_5편

by황제펭귄
- 3부 -
어떻게든 나아가기
먼저 오키나와에 다녀온 동생의 영상에는 투명한 물과 산호, 알록달록한 열대어가 있었다. 나는 그곳에 가서 슈트를 입고 핀을 신으면 자연스럽게 같은 장면 속으로 들어갈 줄 알았다. 운이 좋으면 거북이도 만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행은 예약할 수 있어도 바다까지 예약할 수는 없었다.


5편 | 중요한 건 그날의 바다


오키나와 바다로 떠나는 아침, 오전 10시에 출발하는 배를 타려고 일찍 눈을 떴다. 여행에서는 이상하게 알람보다 설렘이 먼저 잠을 깨운다. 함께 준비하던 동생이 휴대폰 속 영상 하나를 내밀었다.

“언니, 작년에 여기 왔을 때 찍은 영상이야.”

영상 속 자마미섬은 현실 같지 않았다. 투명한 바다 아래로 산호가 훤히 보였고 알록달록한 열대어와 햇빛에 반짝이는 물고기 떼 사이를 동생이 유영했다.


image.png실제 자마미섬 생태계


아직 시작하지도 않은 내 프리다이빙이 벌써 성공한 것 같았다. 신혼여행 때 몰디브에서 못 한 프리다이빙을 여기서는 할 수 있겠구나.

몰디브에서도 눈앞에 넓고 아름다운 바다가 있었다. 하지만 안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남편과 나는 골반 아래쯤 오는 얕은 물에서만 스노클링을 하며 놀았다.


실제 신혼여행 때 사진, 지금보면 프리다이빙 하기 딱 좋은 바다였다.


당시에는 프리다이빙을 전혀 몰랐다. 심지어 숙소 부근에 프리다이빙을 위한 전용 부이와 안전요원이 있어도 무엇을 위한 것인지 알지 못했고, 함께 들어갈 버디도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깊은 곳에 들어가지 않은 것은 잘한 일이었다.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는 아쉬움이 남았다. 몰디브까지 가서 저 바다에 제대로 들어가보지 못했네. 접어두었다고 생각한 마음이 자마미섬 영상을 보자 다시 살아났다. 오늘이구나. 드디어 진짜 바다에서 다이빙을 해보는 날. 물고기도 실컷 보고 싶고, 운이 좋다면 거북이도 만나고 싶었다.


몰디브에서의 첫 스노클링, 숙소 근처에 프리다이빙 포인트가 있는지도 모르고 얕은 곳에서만 놀았다.


기대는 사람 마음 안에서 남몰래 참 빠르게 자란다. 아직 배도 타기 전인데 내 머릿속 자마미섬에는 이미 거북이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오키나와 하면 많이 이야기하는 미야코지마에 비해 자마미섬은 내가 찾을 수 있는 정보가 많지 않았다. 그래서 더 궁금했다.


우린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선착장으로 향했다. 덕분에 선착장으로 가는 길이 즐거웠다. 일본 신호등에서는 ‘피요, 피요피요’ 하는 새소리 같은 신호음이 들렸다.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소리인데, 여행 중에는 이런 것까지 귀엽게 들린다


image.png선착장 가는 길, 기분 좋은 발걸음으로 생각보다 많은 신호등을 건넜다.


생각보다 많은 신호등을 건너 도착한 선착장은 북적였다. 마침 일본의 골든위크와 여행 기간이 겹쳤다. 가족 단위 여행객과 서양인 여행객이 많았고, 방송국 카메라는 인터뷰를 하느라 바빴다. 마스코트들도 사람들과 사진을 찍으며 분주하게 움직였다.


image.png반갑게 인사해 준 마스코트


배를 기다리는 줄에는 일본인도, 서양인도 많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일본에서 요즘 흔하다는 한국인은 보이지 않았다. 아직 자마미섬은 한국인에게 유명하지 않은 탓이었다. 선착장에서 한국인으로 보이는 사람은 우리 자매뿐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다 보니 도시락을 든 사람들이 많았다. 섬에는 식당이 많지 않다고 알아본 터라 우리도 다른 사람들의 도시락을 슬쩍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다.


image.png역시 일본은 도시락의 나라

마침내 탑승 시간이 되었고 우린 배로 향했다.

드디어 승선.


image.png오른쪽 배가 우리 배


드디어 배에 올라 자리를 잡았는데 TV에서 낯익은 얼굴이 나왔다.


image.png
image.png


“어? 이병헌인 것 같은데?”

곧이어 최지우도 등장했다.

오래된 한국 드라마가 자마미섬행 배 안에서 상영되고 있었다.


한국인이라곤 우리 둘뿐인 것 같은 배에서 오래된 한국 드라마가 흘러나오는 풍경은 조금 재밌기도 뿌듯하기도 했다. 자마미섬 주민들이 한류의 충성 고객인 걸까?

옛날 한국 드라마의 격정적인 전개를 즐겁게 보고 있는 동안 배는 푸르른 바다를 향해 천천히 나아갔다. 나는 잠시 갑판 앞으로 나가 바닷바람을 맞아 보기로 했다. 하지만 바깥은 생각보다 훨씬 거칠었다.


"내 어린 시절 우-연히" 만화 원피스 가사가 생각나게 하는 바다


전날 비가 내렸고 이날 파도도 제법 높았다. 배가 물살을 가를 때마다 하얀 포말이 튀었고, 갑판의 여행객들이 몇 번이나 파도를 뒤집어썼다. 마치 바다가 거친 환영 인사를 건네는 것 같았다. 재미있는 건 실내에서도 그 모습이 그대로 보였다는 점이다. 누군가 파도를 정통으로 맞을 때마다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다. 젖은 사람들도 당황하기보다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배는 작은 놀이기구 같았다.

크게 흔들릴 때도 있었지만 자마미섬에 가까워질수록 파도는 잔잔해졌다. 동생은 섬에 도착한 후 해변행 버스에 쓸 동전지갑을 열었다.


image.png동생이 챙겨온 동전 지갑

해변으로 가는 버스를 타려면 잔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우린 한번 더 동전 개수를 세고 셀카를 찍고, 당시 한창 유행하던 셋로그도 찍으며 도착을 기다렸다. 동전은 딱 맞았다. 계획도 완벽했다. 섬에 도착하고, 물에 들어가고, 프리다이빙을 하며 물고기를 보고, 운이 좋으면 거북이까지.

계획은 언제나 완벽하다.


그렇게 자마미섬에 도착했다. 선착장에서는 귀여운 고래 조형물이 우리를 반겼다. 겨울에는 고래도 볼 수 있다는 섬이었다.


우릴 가장 먼저 반겨 준 고래 조형물


해변까지 버스를 탈 수도 있었지만 잠깐 고민하다 걷기로 했다. 모처럼 왔으니 섬의 공기를 더 오래 느끼고 싶었다. 챙긴 동전은 잠시 그대로 두었다.

이번 여행의 주제곡을 틀고 해변으로 걸었다.


https://youtu.be/-_o0EihifHI?si=5EldYlS-3oYkXAZm


눈부신 태양 아래로

사랑이 익어가는 거리

멋있는 사람 사람들

언제나 즐거운 인생


우리의 젊은 날들을

소중히 간직한 추억

불타는 정열 속에서

우리는 날마다 청춘


사랑해 사랑해요 뜨겁고 또 진하게

흥겨운 리듬으로 모두 삼바춤을 춥시다!


흥겨운 삼바 리듬에 걸음이 빨라졌다. 야자수 사이로 에메랄드빛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고 맑은 수면 아래에는 산호의 윤곽이 비쳤다.

“와.”


ChatGPT Image 2026년 7월 22일 오후 09_56_02.png
실물.png
만화 같은 자마미섬 입장, 어쩌다보니 각기 다 다른 브랜드인데 민트색 깔맞춤


동화 같이 예뻤다. 동생이 왜 다시 오고 싶어 했는지 바로 알 것 같았다. 오늘 정말 제대로 놀겠다. 그때까지는 아무 의심도 없었다.


image.png자마미섬 분위기


자리를 잡고 산호 보호를 내세운 선크림을 발랐다. 우리의 즐거움이 바다 생물의 삶을 해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날씨는 화창하다 못해 뜨거웠고 얕은 물도 따뜻하게 느껴졌다. 슈트 대신 수영복만 입었다. 휴대폰에 방수 케이스를 씌우고 마스크와 스노클도 챙겼다.


버스를 타고 해변에 먼저 도착한 무리들이 먼저 바닷가에 있었다. 이제 우리도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데, 뭔가 이상했다. 동생이 왔을 때는 없었다는 커다란 안전 부표가 보였다. 바다를 유심히 보던 동생이 말했다.

“언니, 이상한데?”

“뭐가?”

“내가 왔을 때는 이런 거 없었는데.”

부표는 내눈에 보기에도 너무 가까웠다.

“설마 저기까지야?”

“아닐걸?”


image.png내가 바라보던 광경
image.png넓은 해변 속 허락된 구역


설마 했다. 그런데 물에 들어갔던 사람들이 허탈한 표정으로 금세 나오고 있었다. 그날 허용된 입수 구역은 우리가 기대한 것보다 훨씬 좁았다. 그래도 배까지 타고 왔으니 들어가봤다. 발목에서 무릎, 무릎에서 허벅지로 물이 올라왔다. 더 걸었다. 여전히 허벅지였다. 안전선에 닿았다. 끝이었다.

허벅지.

키가 160센티미터인 내가 수영 가능한 구역 끝까지 걸어가도 바다는 허벅지에 머물렀다. 동생도 끝까지 걸어왔다. 둘이 아래를 보고 서로의 얼굴을 봤다. 할 말이 없어 웃음만 나왔다.


우리와 함께 허탈함에 말을 잇지 못하는 사람들


프리다이빙하러 오키나와까지 왔다. 배도 탔다. 노란 핀도 샀다. 마스크도 챙겼다. 그런데 바다 수심이 허벅지 높이였다.

‘…프리다이빙은커녕 수영도 못 하겠는데?’


생각해 보니 내 바다는 점점 얕아졌다. 친구들과 갔던 파타야에서는 허리, 신혼여행 몰디브에서는 골반, 이번 자마미섬에서는 허벅지. 머리 어깨 무릎 발 노래도 아니고, 만나는 바다가 갈수록 얕아졌다. 다음에는 무릎까지 오는 것 아닐까.


image.png나에게 닥친 자연재해


동생과 또 마주 보고 웃었다.

“진짜 내가 왔을 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동생도 억울해했다. 야박하게 느껴지는 안전선 밖으로 몇몇 여행객이 나가려 하자 라이프가드가 안으로 돌아오라고 했다. 우리만 아쉬운 게 아니었다. 나는 일말의 희망을 품고 말했다.

“그래도 물고기 한 마리는 있겠지.”


미련을 못 버리고 라이프가드 선을 넘어갔다가, 경고를 받고 다시 돌아오는 다른 관광객들


대야에 받아놓은 물에 세수라도 하려는 사람처럼 허리를 푹 숙여 들여다봤다. 모래, 또 모래, 조금 다른 모래가 있었다. 물고기 한 마리 보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다 한참 후 동생이 나를 불렀다.

“언니! 물고기!”

서둘러 가서 머리를 숙였다. 딱 한 마리였다. 작고 소중한 물고기가 우리를 빤히 바라봤다. 거북이를 생각하며 찾아온 바다에서 물고기 한 마리와 눈이 마주쳤다고 신이 났다. 한 마리라도 봐서 정말 다행이었다. 기대치는 놀라울 만큼 빠르게 낮아졌다.


물고기도 당황스럽고 나도 당황스럽다.


그러고 나니 산호가 눈에 들어왔다. 산성화되어 하얗게 색을 잃었고 군데군데 부서진 듯한 부분도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우리가 들어갈 수 있는 곳을 좁게 정해둔 데는 이유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아까까지 야박했던 부표도 달리 보였다. 내게는 한 번 다녀가는 바다지만 이곳 생물들에게는 매일의 바다니까.


이날 자연을 보호해야 한다는 마음과 ‘아쉽긴 아쉬운데’ 하는 마음이 함께 있었다. 결국 장비를 가방에 넣고 타월 위에 앉아 바다를 바라봤다. 다른 관광객들도 비슷했다. 수영복은 점점 뽀송해졌다.

비가 온다던 예보와 달리 하늘은 화창했고 햇살은 따뜻했다. 나는 머리에 꽃무늬 모자를 쓰고 해변에서 사진을 찍는 30대 중반이 되었다.


대가리 꽃밭 사진이라도 남기자.











프리다이빙 사진은 못 남겼지만 머리에 꽃은 남겼다.















돌아갈 때는 얌전히 버스를 탔다. 버스 안에서 내일의 날씨를 다시 확인하고 본섬 투어를 기약했다.


얌전히 버스 타고 돌아가자


우리는 버스를 타고 선착장으로 돌아와 부근 건물 안에 있던 사진 부스에서 스티커 사진도 한 장 찍었다.

현실에서는 만나지 못했지만, 적어도 스티커 속에서는 우리도 거북이와 고래상어와 함께였다. 여행에는 가끔 이런 약간의 사기가 필요하다.


image.png
image.png
일본에 왔으면 스티커 사진을 찍어야지


숙소로 돌아오는 길. 우리는 mic21에 한 번 더 들렀다. 슬프게도 바다에 못들어간만큼 바깥에서 선크림만 열심히 발라 동이 난 것이다. 내일을 위해 산호 보호를 내세운 선크림을 하나 더 샀다. mic21에서 전날 적립한 포인트로 100엔 정도 할인받았다. 선크림 하나만큼은 알뜰하게 챙겼다.


image.png말이 많은 인증마크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 사게 되는 Reef Safe 썬크림


저녁에는 국제거리로 나가 야키소바와 차가운 오리온 맥주로 아쉬움을 달랬다. 프리다이빙을 앞두고는 되도록 술을 마시지 않으려고 했지만, 이날만큼은 한 잔이 필요했다. 이날 만든 셀프 영상의 하이라이트도 물고기보다 맥주였다.

“오늘 진짜 아쉬웠다.”

“그러니까.”

차가운 잔을 부딪치며 우리는 허벅지까지 오던 바다 이야기를 또 했다.


image.png동생이 일본 오면 꼭 먹는 야끼소바와 생맥주


프리다이빙에는 실패했지만 하루가 통째로 실패한 것은 아니었다. 작고 소중한 물고기와 눈을 맞췄고, 동생과 허탈하게 웃었고, 바다를 마음대로 즐길 수만은 없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도 다음 날마저 그러면 어쩌나 싶었다. 날씨가 안 좋으면, 파도가 거세면, 프렌젤이 잘 안되면.


침대에 누워 천장을 봤다. 오키나와까지 왔는데 아직 한 번도 머리끝까지 잠기지 못했다. 이번에는 정말 내 키보다 깊은 바다에 들어갈 수 있을까. 그러다가 함께 만든 셋로그를 다시 봤다. 우당탕탕 천방지축 굴러가는 여행기가 웃겨서, 걱정을 하다가도 웃으며 잠들었다.


image.png
image.png
image.png


image.png
image.png
image.png
image.png
image.png
image.png
우리 자매의 첫 셋로그, 프리다이빙 영상을 담고 싶었지만 어쩌겠어 한잔해





이전 04화4. 눈부신 태양 아래 노란 캐리어가 동구르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