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눈부신 태양 아래 노란 캐리어가 동구르르

좋아하는 일을 자꾸 미루던 30대 온라인 게임인의 첫 프리다이빙 여행_4편

by황제펭귄


4편 | 눈부신 태양 아래 노란 캐리어가 동구르르



“우와악.”

바카라상에 오래 앉아 굳어진 몸을 풀려고 사자후 같은 소리를 내며 온몸을 쭉 늘였다. 여행 전날 밤 열 시까지 일했다. 내일 아침이면 오키나와로 떠날 사람치고는 꽤 성실한 회사원이었다. 노트북을 닫고 나서야 방 한쪽의 노란 캐리어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좋아하는 물건 중 하나다. 이 캐리어의 바퀴가 동구르르 굴러가기 시작하는 날에는 대체로 좋은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계획적인 성격 탓에 며칠 전부터 필요한 물건을 하나둘 던져두었다. 일도 끝났겠다, 마지막으로 짐을 정리했다. 슈트와 수영복, 타월과 마스크, 스노클과 방수팩, 선크림과 상비약, 여권까지. 체크리스트에 하나씩 줄을 그으며 필요한 것들을 차곡차곡 눕혔다.


나의 실제 준비 리스트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되길 바라며)

*파일 암호 : emperorpenguin



샤워를 마치고 침대 위에 뻗어 누워서도 준비는 끝나지 않았다. 마지막은 프렌젤이었다. 코를 잡았다. 뾱. 귀가 열렸다. 다시, 뾱. 됐다. 다행히 몸이 아직 그 감각을 기억하고 있었다.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

20대에는 여행 전날이면 괜히 설레서 뒤척였는데, 30대 중반 온라인 게임인에게 그런 낭만은 없었다. 그대로 꿀잠이었다. 잘 놀려면 잘 자야 한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늘 방 한구석에 누워 있던 노란 캐리어가 드디어 일어나 굴러갔다. 길바닥을 구르며 도로로로록 소리를 냈다. 내 마음도 꼭 그 소리 같았다.

동생과는 공항철도에서 만났다. 만나자마자 동생보다 동생의 캐리어가 먼저 보였다. 커다란 캐리어 위에 보라색 피크민이 통째로 씌워져 있었다.

“이거 뭐야! 귀엽다!”

“쿠팡에서 샀어. 귀엽지?”


응 왔어?


귀여웠다. 내 노란 캐리어와 보라색 피크민이 나란히 서 있으니 캐리어들끼리 먼저 여행을 온 것 같았다. 나는 쇼핑백이나 포장 리본을 잘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라 집에 모아둔 리본 하나를 손잡이에 묶어두었다. 내 캐리어는 머리에 리본을 묶고 있었고, 동생 캐리어는 똘망똘망한 눈으로 우리를 바라봤다.


image.png잔망잔망

공항에서 수하물을 부치려고 줄을 서니 고추장 반입 안내문마저 귀여워 보였다. 여행 가는 날에는 별것도 아닌 것들이 좋아 보인다.


image.png태양초 고추장의 나라


수속을 마치자 컨베이어 벨트 위로 보라색 피크민이 먼저 올라갔다. 점점 우리에게서 멀어지는 그 뒷모습까지 귀여웠다.


image.png먼저 간다


물론 출국이 완벽했던 건 아니다. 전날까지 업무를 불태우느라 모바일 체크인을 늦게 해 동생과 붙어 앉을 좌석을 잡지 못했다. 빠른 것으로는 어디에도 지지 않는 한국 사람들이었다.

“오는 건 빨리 하자.”

“응.”

그렇다고 기죽지는 않았다. 문제는 날씨였다. 비행기에 올라 오키나와 날씨를 다시 확인했다.


내 얼굴에서도 빗물이 흐르는 날씨


여행 기간 대부분 비 예보가 있었지만 프리다이빙 투어를 하는 토요일은 가장 맑을 예정이었다. 일정을 짤 때부터 비 오는 날이 섞여 있다는 것은 알았다. 그래도 토요일만 맑으면 됐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멀리 떨어져 앉은 동생과 괜히 서로를 바라보며 한 번씩 웃었다. 비행기 모드를 켜고 좁은 좌석에 몸을 맞췄다.


쓸 데는 없지만 이상하게 찍게 되는 비행기 날개 샷


오키나와는 가까웠다. 생각보다 금방 도착해 공항 밖으로 나오자 따뜻한 공기가 먼저 느껴졌다. 건물과 안내판은 분명 일본인데 그 사이로 야자수와 열대 식물이 흔들렸다. 익숙한 일본과 동남아의 풍경을 반씩 섞어놓은 것 같았다. 안내 방송은 익숙한 일본어인데 바깥은 다른 나라처럼 보였다.


image.png숙소 근처 초등학교 담쟁이 덩쿨도 이색적이다.


일본에 오면 나만의 작은 의식이 있다. 계란 샌드위치와 야채주스를 먹는 일이다. 예전에 업무 때문에 두 달쯤 지낼 때 아침마다 자주 먹던 조합이다. 마침 계란과 참치 샌드위치가 함께 있어 동생과 반씩 나눠 먹었다.

한국에서도 먹을 수 있는 맛인데 여행지에서는 계란이 더 고소하고 참치는 더 진하게 느껴졌다. 이것도 여행지의 ‘달라달라 병’일 것이다.


image.png계란도 맛있고 참치도 맛있어서 두개 있는 게 더 좋다.


샌드위치와 야채주스로 입국식을 마치고 모노레일에 올랐다. 창밖으로 낮은 건물과 야자수가 지나갔다. 흐리다던 예보와 달리 눈부신 태양이 나와 있었다. 숙소에 들어가기 전에는 마트에 들러 인형뽑기도 하고, 좋아하는 긴타코 타코야키와 블루씰 아이스크림도 나눠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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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타본 일본 지상 모노레일

중요한 일정은 다음 날부터였다. 첫날의 임무는 무사히 도착하고 아프지 않은 채 숙소까지 가는 것. 우리는 성실하게 수행했다.


숙소는 작은 복층 구조였다. 위에는 조명이 아늑한 침실이 있었고 아래에는 부엌과 냉장고, 세탁기와 건조기, 화장실과 욕실이 알차게 들어 있었다. 아래층에도 따로 잘 수 있는 침구가 있었다. 복층에 올라갈 때 사다리를 놓아야 한다는 불편함을 빼면 마음에 들었다. 옷을 말릴 수 있는 베란다 너머로 모노레일이 지나갔다. 그 풍경을 보고서야 실감이 났다. 아, 오키나와에 정말 왔구나.


짐을 내려놓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국제거리로 향했다. 가는 길에는 유독 깨끗한 도로 반사경에 비친 모습으로 첫 자매 사진을 남겼다.












이상할 정도로 깨끗했던 반사경과

그저 기분이 좋은 우리 자매












일본 고양이와도 한 컷 찍었다. 지브리 애니메이션 속 한 장면처럼 여유로운 고양이였다. 여행지에서는 걸음이 자꾸 느려진다. 평소라면 지나쳤을 것들을 계속 보게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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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원본과 일러스트 느낌


그래도 첫날부터 무리할 생각은 없었다. 둘째 날은 자마미섬, 셋째 날은 본섬 프리다이빙이었다. 우린 꼭 해야 할 일부터 하기로 했다. 벼르던 핀을 사는 일이었다. 우리는 다이빙 장비점 mic21에 들렀다.


image.pngmic 21 첫 방문

일본의 수중 장비 전문점인 mic21은 핀을 꼭 사야 했던 우리의 1순위 방문 장소였다.


image.png입구부터 마음은 두근두근
image.png다양한 마스크

다이빙 장비점 mic21에 들어서자 벽마다 마스크와 스노클, 핀이 빼곡했다. 세일 중인 물건이 있어서인지 매장은 제법 북적였다. 나는 마음속으로 정해둔 노란 핀 앞으로 곧장 갔다. 내 핀은 세일하지 않았다. 그래도 직원이 발 사이즈를 확인해줘 원하는 색으로 직접 신어보고 고를 수 있었다. 그 자리에서 구매하고 적립 카드까지 만들었다. 환율을 적용해도 한국보다 크게 저렴하지는 않았지만, 여러 핀을 직접 보고 신어봤으니 오길 잘했다 싶었다.


image.png하지만 내 핀은 세일하지 않았지

핀을 산 뒤에도 구경할 것이 많아 한 번 더 둘러봤다. 쪼리도 눈에 들어왔다. 평소에는 발가락 사이가 아파 잘 신지 않았는데 직원의 안내를 받아 고른 쪼리는 편했다.

이것도 차원달라병이면 병이다.


image.png평소에는 발가락 사이가 아파 쪼리를 잘 신지 않았는데, 이곳 쪼리는 확실히 발이 편했다.

현지인들도 쪼리 구매에 진심이었다.


image.png귀여운 아이템들도 많았다.

우리는 mic21에서의 목적을 모두 이루고 가게를 나섰다. 우리에게 친절하셨던 직원 두 분은 입구 밖까지 나와 방긋 웃으며 두 손을 크게 흔들어주셨다. 우리도 뒤돌아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리가토 고자이마스!”

“마타네!”


유명한 관광지를 본 것도, 대단한 일이 생긴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누군가 웃으며 오래 손을 흔들어준 일이 이상하게 남는다. 그 배웅 덕분에 기분 좋은 걸음으로 국제거리 중심부를 향했다.


동생과 여행하면 혼자서는 지나쳤을 물건을 구경하게 된다. 태닝한 캐릭터 굿즈와 여행지에서만 살 수 있다는 티셔츠도 골랐다. ‘한정’이라는 두 글자는 지갑을 쉽게 열게 한다. 스누피 서프숍에서는 나는 티셔츠를, 동생은 티셔츠와 모자를 품에 안았다. 가격은 비쌌지만 함께 웃으며 고르던 순간이 옷에 딸려 왔다. 눈빛이 은은하게 돌아 있는 스누피 티셔츠는 지금도 잘 입는다.


ChatGPT Image 2026년 7월 22일 오후 09_56_08.png아는 사람만 아는 곳이라니 쇼핑을 안할 수가 없다.


무리하지 말자던 우리는 어느새 만 보를 넘겼다. 저녁때를 놓쳐 배가 고팠고, 근처의 만만한 이치란에 들어갔다. 오래 기다릴 줄 알았는데 10분쯤 지나 주문할 수 있었다. 나는 소금 달걀을 추가했다. 8년 전 처음 이치란에 왔을 때 라멘보다 그 짭짤한 반숙 달걀에 반했다. 지금처럼 감동란 같은 짭쪼롬한 반숙 달걀을 쉽게 사 먹지 못하던 때라 소금 달걀 먹으러 이치란에 갈 정도였다. 좋아했던 맛을 다시 먹는 것도 나름의 재회다.


image.png만만한 이치란


배를 채우고 생각보다 일찍 숙소로 돌아왔다. 어디선가 생맥주 한 잔 부딪힐 체력은 남았지만 다음 날을 위해 자제했다. 내일은 기대하던 자마미섬이었다. 거북이를 만나고 싶었고, 겨울에는 고래도 볼 수 있다는 그 섬이 궁금했다. 이제 바라는 것은 하나였다. 내일 아침에도 컨디션이 좋을 것.


image.png거북이도 고래도 볼 수 있다는 자마미섬!


드디어 진짜 바다였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바다를 몰랐다. 내 컨디션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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