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게임을 잃은 디자이너가 AI로 돈을 벌기까지

다시 회사에 들어가지 않기로 했다

by엘리사

아침 열 시, 출근을 한다. 안방에서 서재까지 열 걸음 남짓. 노트북을 열면 전날 밤까지 작업했던 창들이 나를 맞이하고, 듀얼 모니터 불빛이 아직 덜 깬 얼굴을 비춘다.


이 집은 회사 근처라서 고른 집이었다. 결혼을 앞두고 신혼집을 구하면서 제일 먼저 따진 게 직주근접이었다. 그런데 집을 구하고 얼마 안 돼 그 회사에서 권고사직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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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자신감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취업할 수 없을 거라는 걱정은 별로 없었다. 오히려 그때는 내 실력에 대한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디자이너로서 할 만큼 해봤고, 어떤 문제가 주어져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근거 있는 자신감에 근거 없는 자신감까지 조금 보태졌던 것 같다.


이직 제안도 종종 들어왔다. 디자인 스튜디오의 팀장급 포지션을 제안받기도 했고, 다양한 스타트업에서 면접도 봤다. 면접장에 앉아 있을 때마다 마음이 영 움직이지 않았다. 좋은 자리인 건 알겠는데, 거기서 일하는 내가 잘 그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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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놓고 묻진 않지만 결혼은 했는지, 아이 계획은 있는지 슬쩍 가늠하는 질문들도 있었다. 아무리 일을 잘해도 보는 게 실력만은 아니구나 싶었다. 억울하고, 피곤했다.


헤드헌터에게는 조건을 말했다.


내가 진짜 풀어보고 싶은 프로젝트일 것.

집에서 너무 멀지 않을 것.


회사 근처로 이사까지 했다가 회사를 잃었으니, 이번엔 내 생활을 회사에 맞추고 싶지 않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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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마지막 회사에 다닐 때부터 혼자 되뇌던 말이 있었다.


"여기가 내 마지막 온라인 게임일지도 몰라."


나의 고민을 남편에게 꺼냈다. 남편은 그럴 때마다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처럼 창작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면 절대 온라인 게임인으로 가만히 있지는 않았을 거다. 너는 뭐든지 할 수 있는 능력자야."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인줄 알면서도 그 한마디에 움츠러 들었던 승모근이 탁 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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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왕 이렇게 된 거 이 기회에 진짜 내 일을 해보자. 나에게 유기불안을 안겨줬던 회사들에게 보란듯이 보여주고 싶기도 했다. 약간의 오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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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손으로 나온 건 아니었다. AI로 처음 돈을 번 건 회사에 다니던 때였다. 마케터들이 미드저니 같은 이미지 생성 도구를 실무에 쓸 수 있게 가르치는 VOD 강의를 만들어 달라는 제안이 왔다. 예전에 디자인 포트폴리오 VOD 강의를 만든 적이 있었는데, 아마 그걸 보고 '이 사람은 강의를 만들 줄 아는 사람'이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팀원들도 소식을 듣고 같이 축하해 줬다. 잘됐으면 좋겠다는 응원도 받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건 그저 기분 좋은 부업이었다.


첫 정산금이 들어온 날, 입금 알림을 몇 번이나 다시 열어봤다. 월급 말고 내 이름으로 번 돈. 꽤 두둑했다. 그래도 그땐 그냥 기분 좋은 부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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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강의 하나가 내가 퇴사한 뒤에도 다음 일을 물고 왔다.


오프라인 강의도 하게 됐다. AI로 자기 브랜드의 키비주얼을 만들고 싶은 사람들에게 미드저니와 BX 디자인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큰돈이 되는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내가 좋아하던 브랜딩과 새로운 기술이 한자리에서 만나는 게 좋았다.


디자인 스튜디오와 의료기기 광고 이미지를 만드는 외주도 했다. 원래는 스톡 이미지를 사서 합성하던 장면을 AI로 구현해 보는 실험이었다. 실무에서 AI가 어디까지 되고 어디서부터 막히는지 손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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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내 인스타그램을 보고 스페인 스타트업에서도 연락이 왔다. 영어 회화라면 자신 없는 내가 실시간 AI 통역 프로그램을 켜 놓고 해외 담당자들과 화상 미팅을 무사히 끝냈다. AI가 없었던 시대라면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일이다. 계약서도 주고받았다. 아직 빌드업 단계라 돈이 된 건 아니지만, 내 작업이 바다 건너까지 닿았다는 게 신기했다.


나는 내 평생에 강사가 될 생각도, 아티스트라는 직함을 달 생각조차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행사장 테이블 위에 '디자이너' 대신 '김효신 작가님'이라고 적힌 이름표가 놓인다. 아직 좀 어색하고 간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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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회사 밖이 마냥 낭만적이진 않았다. 매달 같은 날 꼬박꼬박 월급이 들어오던 생활과는 달랐다. 강의나 외주 제안이 들어와도 다음 달 통장이 어떨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한동안은 당근마켓에서 열심히 팔았다. 안 쓰는 서브 맥북, 전자기기, 카메라, 운동화, 피규어까지. 미친듯이 팔아제꼈다. 한두 달 만에 중고 판매로만 매출(?)이 도합 500만 원쯤 나왔다. 괄목할만한 성과다. 웃긴 건 그 와중에 마케팅 공부가 되었다는 거다. 타게팅을 설정하고 그들을 공략할 카피를 짰다. 사진을 어떻게 찍고 제목을 어떻게 다느냐, 설명과 금액 설정이 어떻냐에 따라 채팅 알림이 울리는 속도가 달랐다. 중고 거래로 마케팅을 몸으로 배운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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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엔 창업 지원 사업에도 자신 있게 냈다가 떨어졌다. 아이디어가 있는 것과 그걸로 사업을 만드는 건 전혀 다른 일이더라. 좋은 걸 만드는 능력만으론 모자랐다. 누가 돈을 내고, 왜 사는지까지 생각해야 했다.


예전보다 모르는 게 훨씬 많아졌다는 걸 그때 인정했다.


일하는 방식도 달라졌다.


AI는 이제 가끔 업무에 도움을 청하는 도구라기보다, 내 일을 같이 처리하는 직원들에 가깝다. 자료를 찾고, 생각을 정리하고,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같이 굴려본다.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일이 정말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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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가끔 사람이 그립다.


회사 다닐 땐 옆자리 동료랑 별것 아닌 농담도 하고, 차 한 잔 들고 수다도 떨었다. 지금은 하루 종일 서재에 앉아 AI하고만 대화하는 날이 있다. 어느 날은 정말 말을 한마디도 안 했더니, 저녁에 입을 떼 보니 목이 꽉 잠겨 있었다.


그 뒤로는 AI랑 얘기할 때 타이핑 대신 음성을 쓰는 일이 늘었다. 말할 상대가 AI밖에 없어서 음성 기능을 켜는 1인 사업자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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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근처라서 고른 이 집에서,
이제는 회사 없이 일한다.

처음 나왔을 때보다 자신감은 조금 줄었다. 대신 내가 모르는 게 얼마나 많은지 알게 됐다. 디자인을 잘하는 것, 일을 만드는 것, 그 일로 꾸준히 먹고사는 것. 셋 다 전혀 다른 능력이었다. 아직 수입이 안정된 것도 아니고, 내 사업이 성공한 것도 아니다. 이제 막 회사 밖에서 일하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그래도 다시 회사에 들어가지 않기로 한 걸 후회하냐고 묻는다면, 적어도 지금은 아니라고 하겠다.


회사에선 누가 일을 줬다. 지금은 무슨 일을 할지부터 내가 정한다. 생각보다 피곤하고, 생각보다 재밌다.


AI가 내 직업을 없앨 줄 알았다. 그런데 적어도 지금까지는, 생각지도 못한 직업들을 하나씩 물어다 주고 있다.


아직 내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설명하는 일은 쉽지 않다. 디자이너였고, 지금은 강의도 하고 작품도 만들고 사업도 준비하고 있으니까.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 직업이 없어진 게 아니라, 직업을 설명하는 일이 더 어려워진 것 같다.

일단 내일도 서재로 출근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