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금이 효자

by자봉

새벽녘, 세차게 한줄금 쏟아지던 장맛비가 거짓말처럼 멎었습니다.

창문을 열자 빗물을 머금은 눅눅한 공기 사이로 벌써부터 후끈한 무더위가 밀려옵니다.


계절의 변화는 이토록 어김이 없고 거침이 없는데, 창밖을 내다보는 내 마음의 풍경은 멈춰 선 채 한참을 서성이고 있습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하늘을 바라보는 시간보다 발밑의 그림자를 들여다보는 시간이 길어지는 일일지도 모른다.


젊은 날에는 늘 위만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조금만 더 높은 곳에 오르면, 조금만 더 많은 것을 손에 쥐면, 그리고 타인에게 조금만 더 인정받으면 마침내 내 삶이 완벽하게 만족스러워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쉬지 않았고, 멈추지 않았으며, 늘 분주하게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그러나 삶의 후반전에 접어든 지금에야 비로소 깨닫습니다. 정신없이 위를 향해 오르는 동안 내가 지나쳐 온 것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계절이 몇 번이나 소리 없이 바뀌었는지, 내 아이들의 얼굴이 어떤 표정으로 변해갔는지, 그리고 나를 지탱해 주던 부모님의 등이 얼마나 깊게 굽어 들었는지 그때는 미처 보지 못했습니다.


평생을 다해 붙잡으려 했던 세상의 명예나 물질은 결국 하나도 온전한 내 것이 아니었고, 반대로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며 흘려보냈던 평범한 하루하루와 부모님의 거친 손등이야말로 진정 내 삶의 가장 소중한 알맹이였다는 사실을, 이 서글픈 계절의 길목에서 다시금 뼈아프게 절감합니다.


벌써 10년 전부터 아버지가 요양원에 입소하시게 되면서, 평생을 함께 자라온 남매들 사이에 깊은 불협화음이 일었습니다.


핏줄이라는 단단한 울타리마저 흔들어 놓는 갈등의 중심에는 서글프게도 ‘돈’이라는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가만히 홀로 앉아 생각을 거듭할수록, 인간의 도리와 효도마저 자본의 논리에 매몰되는 현실에 마음이 한없이 씁쓸해집니다.


매월 꼬박꼬박 통장에 찍히는 아버지의 연금이 자식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가장 큰 동력이자 '가장 정직한 효자' 노릇을 하고 있는 작금의 풍경은 잔인하도록 서글픈 울림을 줍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봅니다. 과거 내가 목동에 살던 시절, 어머니에게는 나오는 연금이 전혀 없었고 아버지에게는 매월 상당한 액수의 보훈연금이 지급되고 있었습니다.

그때 이혼하지 않았던 둘째 며느리는 어머니를 우리 집에 일주일 동안 떼어놓고 가면서도, 연금이 나오는 아버지만큼은 서로 모셔가겠다고 강한 의지를 내비쳤습니다.


돈의 유무에 따라 부모의 무게가 달라지던 그 씁쓸한 이면을 나는 똑똑히 기억합니다.

지금에 와서 다시 입장을 바꾸어 상상해 봅니다.

만약 2016년도에 별세하신 어머니가 지금 살아 계시고, 연금이 한 푼도 나오지 않는 처지였다면, 과연 동생들이 어머니를 지성으로 보살피겠다고 그 먼 목포까지 선뜻 내려갔을까.


가슴 아프지만 대답은 회의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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