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바람이 머무는 길에서

by자봉


입추(立秋)가 지났다는 절기의 선언이 무색하지 않게, 피부에 닿는 공기의 결이 미세하게 달라졌다. 한낮의 열기는 여전히 완강하지만, 문득 뺨을 스치는 바람 한 자락에 서늘한 가을의 냄새가 묻어난다. 계절의 변화는 이토록 소리 없이, 그러나 어김없이 찾아와 지친 이의 어깨를 토닥인다.

언제부턴가 내 삶은 대학병원의 하얗고 서늘한 복도와 단조로운 기계음 사이에 묶여 버렸다. 콩팥과 췌장이 좋지 않다는 진단을 받은 이후, 나의 달력은 온통 정기 검진일과 진료 예약일로 채워졌다. 병원은 늘 사람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지만, 그곳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지독한 외로움과 피로감이다.

차가운 대기실 의자에 앉아 내 이름이 번호판에 뜨기를 기다리는 시간은 매번 영원처럼 길게만 느껴진다. 엄격한 식단을 지키고 몸을 돌보아도 수치 한 줄에 일희일비해야 하는 일상. 나도 모르게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툭하면 짜증이 치밀어 오르고, 원인 모를 스트레스가 안개처럼 마음을 뿌옇게 가로막곤 했다.

내 몸의 장기들이 보내는 경고음과 병원이라는 공간이 주는 압박감에 숨이 턱 막혀오던 어느 날, 나는 이 무거운 스트레스를 그대로 안고 집을 나섰다. 무작정 걷다 보니 발걸음이 닿은 곳은 집에서 가장 가까운 독립문역이었다. 지하철역을 빠져나오자 웅장하게 서 있는 독립문이 보였고, 그 뒤로 서대문 안산의 푸른 능선이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나를 부르고 있었다.


안산자락길은 나처럼 몸이 완벽하게 건강하지 못한 사람에게도 더없이 다정한 길이다. 가파른 흙길이나 험한 바위 대신, 나무 데크가 부드럽고 완만하게 숲길을 따라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한 걸음, 한 걸음 데크를 밟으며 숲의 품으로 걸어 들어갔다. 초록의 잎사귀들이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도심의 소음은 이내 울창한 나무들이 만들어낸 천연의 방음벽 뒤로 사라졌다.

숲이 내뿜는 맑은 향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와 약봉지 냄새에 찌들어 있던 폐부 깊은 곳까지 초록의 생기가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울창한 나뭇가지 사이로 시야가 툭 터지며 저 아랫동네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는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의 현대적인 건물과, 붉은 벽돌이 고즈넉하면서도 쓸쓸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었다.

그 풍경을 내려다보며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저 붉은 담장 안에서 모진 고초를 겪으면서도 끝내 조국의 푸른 하늘을 꿈꾸었던 이들의 삶이 떠올랐다.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묵묵히 고통을 견뎌낸 그들의 시간에 비하면, 매달 병원을 오가며 겪는 나의 짜증과 스트레스는 어쩌면 참 가벼운 투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자연의 품에서 역사의 흔적을 내려다보는 일은, 이처럼 옹졸해졌던 마음의 크기를 다시금 넓혀주는 묘한 힘이 있다.


다시 마음을 추스르고 숲길을 돌고 돌아 능선을 향해 올랐다. 데크길은 마치 어머니의 품처럼 부드럽게 굽이치며 나를 산의 높은 곳으로 인도했다. 마침내 사방이 활짝 열린 능선에 다다랐을 때, 기다렸다는 듯이 사방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아, 가을이구나."

입 밖으로 감탄사가 절로 터져 나왔다. 능선에서 마주한 바람은 평지의 그것과 완전히 달랐다. 땀방울을 식혀주는 수준을 넘어, 가슴속 깊은 곳에 웅크리고 있던 답답함과 응어리를 단숨에 쓸어가 버리는 시원함이었다. 마치 거대한 자연이 나를 향해 커다란 부채질을 해주는 것만 같았다.

능선에 서서 바람을 맞으며 저 멀리 펼쳐진 서울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빽빽한 빌딩 숲과 그 사이를 바쁘게 오가는 자동차들이 까마득한 점처럼 보였다. 그 속에서 아등바등하며 내 건강을 원망하고, 다가올 검사 결과를 두려워하며 보냈던 시간들이 바람결에 흩어졌다.


콩팥과 췌장이 조금 아프다고 해서 내 삶의 모든 순간이 불행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토록 시원한 바람을 느낄 수 있는 감각이 남아 있고, 내 발로 이 아름다운 산을 걸어 오를 수 있는 기력이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할 일이라는 마음이 들었다.

여전히 나는 정기적으로 병원에 가야 하고, 엄격한 관리를 계속해야 하겠지만, 이제는 두렵거나 짜증스럽지만은 않다.

내게는 마음이 답답할 때마다 찾아와 위로를 건네받을 수 있는 안산자락길이 있고, 지친 이마를 짚어줄 시원한 가을바람이 곁에 있기 때문이다. 자연이 준 치유의 에너지를 품고, 나는 다시 나의 일상을 씩씩하게 걸어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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