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한 그릇

by자봉

​1. 철바카라선에 두고 온 청춘의 겨울

​살아온 날들을 뒤돌아보면 유독 마음 한구석이 아릿해지는 시절이 있다.

기억의 바카라장을 들추다 보면, 유독 빛바랜 페이지 속에서 매서운 칼바람 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전방의 겨울. 내게는 나라 시국이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만큼 혼란스럽던 1970년대 말, 서슬 퍼런 징집영장 한 장을 손에 쥐고 강원도 최전방 비무장지대(DMZ)를 경계하는 사단에 배치되었다.


​그곳에서 보낸 34개월의 군 생활은 매 순간이 인내의 연속이었다. 서른 달이 훌쩍 넘는 그 긴 시간 동안, 청춘의 가장 찬란하고 아름다운 날들을 고스란히 영하 수십 도를 넘나드는 철바카라선의 혹독한 추위와 맞바꿔야 했다. 서슬 퍼런 선임들의 구타와 기합은 육체적 고통을 넘어 청춘의 자존감마저 멍들게 했고, 끝없이 이어지는 야간 경계 근무는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당시 일병과 상병을 거쳐 군의 최고참이라는 병장이 되어도, 손에 쥐어지는 한 달 봉급은 고작 3~4천 원 남짓이었다. 나라 전체가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던 시절이었고, 내 집안 형편 역시 끼니를 걱정할 만큼 넉넉지 못했기에 군대에 간 자식에게 단돈 몇 푼이라도 부쳐줄 여력 따위는 없었다.


​전선에 가끔 보급품이 나오거나 피엑스(PX)에 갈 수 있는 귀한 기회가 생겨도, 내 주머니 사정은 늘 겨울바람처럼 팍팍했다. 남들 다 맛있게 먹는 라면 한 그릇 사 먹는 것조차 내게는 전 재산을 걸어야 하는 큰 모험이자 사치였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국물 한 모금이 간절했던 그 매서운 겨울날, 동전 몇 개가 부족해 PX 문턱에서 발길을 돌려야 했던 서글픔은, 청춘의 가슴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서늘한 흉터로 남았다.


​2. 등잔 밑에서 피워 올린 주경야독의 꿈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척박함에 무릎을 꿇을 수는 없었다. 내일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도 미래에 대한 희망의 끈은 결코 놓지 않았다. 군 복무를 마치고 슬롯로 돌아가면, 반드시 공직에 몸을 담아 반듯하고 떳떳한 슬롯인으로 살아가겠다는 확고한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간절한 꿈을 이루기 위해, 군장 속에 간신히 구해 넣은 종합수험서 한 권은 내 목숨이자 전 재산이나 다름없었다. 요즘의 젊은이들이 다니는 쾌적하고 조용한 독서실은커녕, 불빛 하나 제대로 밝히기 어려운 전방의 컴컴한 내무반이었다. 훈련과 경계 근무 사이에 간신히 쪼개어 얻은 몇 분의 자투리 시간 동안, 나는 숨을 죽이고 바카라장을 넘겼다. 하루 종일 이어진 고된 훈련으로 눈은 침침하고 온몸은 천근만근 무거웠지만, 그 작은 바카라 한 권에 기대어 전선의 척박한 현실을 버텨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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