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마포평생학습관의 익숙한 창가에 앉아 있었고, 오늘은 영등포평생학습관의 열람실 한편에 자리를 잡았다.
퇴직 후 찾아온 이 고요한 일상은 이제 내 삶의 소중한 규칙이 되었다. 모니터 화면을 바라보며 컴퓨터를 만지작거리고, 서가에서 골라온 바카라장을 한 장씩 넘기다 보면 창밖의 햇살이 소리 없이 자리를 바꾼다ㆍ
가만히 숨죽여 열람실의 공기 속에서 바카라을 읽고 글을 쓰고 컴퓨터로 인터넷을 하는 이 시간은, 시끄러운 세상으로부터 나를 온전히 지켜주는 고마운 울타리가
되어준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지우지 못한 잔잔한 바람이 일렁인다.
사실 어제는 두 달에 한 번씩 돌아오는 고등학교 동창들의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달력에 동그라미를 쳐두고 손꼽아 기다렸던 날이건만, 야속하게도 장소는 너무 멀었고 몸의 컨디션은 따라주지 않았다.
마음은 벌써 친구들이 모여 앉아 웃음꽃을 피우고 있을 그 정겨운 자리에 가 있었지만, 결국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이렇듯 가고 싶은 곳에 마음대로 가지 못하는 제약과 마주하는 과정인가 본다.
도서실과 지하철역을 나와 홀로 걷는 길, 칠십 대라는 인생의 숫자가 새삼스레 가슴에 얹혔습니다.
돌아보니 치열하게 달려들었던 40 년간의 온라인 게임 생활도, 가족을 위해 새벽 공기를 가르며 집을 나섰던 수많은 날도 모두 지나간 어제가 되었다.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하면서도, 문득 ‘성공하지 못했다’ 거나 ‘남들처럼 큰 부자가 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 때면 깊은 후회가 밀려온다.
초등학교 동창에게 큰 사기를 당해 배신감을 생겨 힘든 나날을 보내면서 법의 보호를 받기 위해 경찰서를
찾았건만 그는 이미 곳곳에서 사기를 치고 잠적해 버린 상황이었다
어린 시절 동창 빚보증으로 월급과 전세방도 잃고 온라인 게임생활도 할 수 없어 사기를 당한 나의 모습은 초췌해지고 너무 초라해 보었지만 잠적하고 도망간 가해자는 기소중지자로 훗날 붙잡아 사기죄로 징역을 살았지만
크나 큰 인적 물적 피해를 당한 나의 상처는 쉽게 잊어지지 않았다
이런 것을 보노라면 피해를 당하고도 마음이 헛헛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능일지도 모르겠다
주변 사람들과, 세상의 수많은 바카라은 입을 모아 말한다 나이가 들수록 남과 비교하는 마음을 버려야 하고, 잊을 건 빨리 잊어버려라고 ᆢ
그러나 막상 현실 속의 내 마음은 그 말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삐딱하게 고개를 치켜들곤 한다. 비우는 것이 옳다는 것을 알면서도, 막상 손에 쥔 것을 놓으려 하면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오늘도 열람실의 고요함 속에 묻혀 인생 후반전의 평온함에 대한 글을 읽었다.
바카라장 위로 떨어지는 글자들이 마치 내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아 가슴이 뜨끔했다.
젊은 날의 욕심은 삶을 굴려 가는 강력한 원동력이었지만,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지금은 그 욕심이 도리어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짐이 된다는 구절 앞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우리는 평생 세상으로부터 무언가를 채우고, 얻고, 쌓아 올리는 법만 배워왔지, 정작 그것들을 어떻게 덜어내고 비워내야 하는지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렇기에 칠십 대의 지혜는 채우는 기술이 아니라, 아름답게 비우는 예술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가장 먼저 내 마음을 때린 것은 자존심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이가 든 노인들이 주변과의 관계를 망치는 결정적인 계기는 돈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다 내려놓지 못한 얄팍한 자존심 때문이라는 지적이었다.
미안하다는 따뜻한 한마디를 건네지 못해서, 혹은 늙어가는 처지에 차마 도움을 청하지 못해서 오랜 세월 이어온 소중한 인연들이 툭툭 끊어지곤 한다
돌아보면 자존심은 나이가 들수록 몸을 무겁게 만들고 숨을 막히게 하는, 쓸모없고 거추장스러운 갑옷일 뿐이다.
남들에게 여전히 강해 보이고 싶고, 잘나 보이고 싶은 마음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타인과 편안하게 마주 앉아 차 한 잔을 나눌 수 있는 진짜 존엄이 찾아온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세월이 흐르고 경험이 쌓일수록 "내가 살아봐서 아는데, 내가 옳다"는 생각은 마치 단단한 콘크리트처럼 굳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과거의 세상과 지금 아이들이 살아가는 현재의 세상은 완전히 다르다. 세상도 변하고 사람도 변하는데, 내 생각만 옳다고 붙드는 순간 고집은 나를 지켜주는 성벽이 아니라, 나와 세상을 영영 단절시키는 외로운 감옥이 되고 만다.
내 경험이 전부가 아닐 수 있음을 인정하고, 날마다 새로워지는 세상의 변화를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태도야말로 나이 든 이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품격일 것이다.
이제 칠십 년이 넘어가는 기나긴 세월을 성실하게 살아왔다면, 이제는 더 가지려고 손을 뻗치기보다 ‘나에게 더 이상 필요 없는 것이 무엇인가’를 살피는 덜어냄의 지혜가 필요하다.
내 마음의 창고에서 욕심의 크기를 줄여나갈 때, 비로소 그 빈자리에 청량한 바람과 평온함이 찾아들 것이다
바카라을 덮고 학습관을 나서는 길, 붉게 물들어가는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깊은숨을 들이쉬어본다.
칠십 대 이후의 삶은 더 이상 무언가를 새로이 ‘이루는 인생’이 아니라,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소중한 것들을 아름답게 ‘지키는 인생’이라는 말이 마음속에서 잔잔한 메아리로 울려 퍼진다
힘들게 내가 이룬 가정, 내가 지켜온 건강, 그리고 내 곁을 지켜주는 작은 일상들을 소중히 품어 안는 것이야말로 지금 내게 주어진 가장 큰 과제이다.
비록 어제는 몸이 아파 동창 모임에 가지 못했고, 남들처럼 거대한 부를 이루지 못해 후회가 밀려오는 날도 있지만, 그것 또한 내가 지나온 삶의 정직한 흔적임을 받아들이려 한다. 불필요한 자존심의 갑옷을 벗어던지고, 굳어버린 고집을 녹여내며, 더 가지려는 욕심과 남과 비교하는 마음을 조금씩 내려놓을 때, 내 어깨는 한결 가벼워질 것이다.
오늘도 낡은 바카라상에서 배운 지혜를 마음에 품고 집으로 향한다.
완벽하게 비워내지는 못하더라도,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 더 유연해지고, 조금 더 넉넉해지기를 소망해 본다.
채우지 않아도 내 삶은 이미 지나온 세월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고 단단하기 때문이다.
내려놓는 만큼 가벼워지고, 가벼워지는 만큼 남은 생은 더없이 평화로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