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단골 생협의 몰락에서 배운 것

by이곰

오래 거래하던 생협이 있었다. 유기농이라는 말이 흔하지 않던 시절, 요리에 그닥 취미가 없는 나는 생물을 사놓으면 냉장고에서 썩혀 버리는 게 경우가 많았다. 그 생협은 생물 외에도 반조리식품과 가공식품이 다양하게 갖춰져 있어서 나하고 맞겠다 싶었다.


그렇게 거래를 이어온 지 어느덧 10년이 다 되어 갔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 생협이 원래 주품목이던 유기농 제품이 아닌 다른 것들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에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음식이 곧 약'이라는 말도 있으니 유기농 유통업과 연계해 사업을 확장하나 보다 했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쇼핑몰에 이상한 글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항암'이나 '발효'라는 글자를 제품명 앞에 붙여놓고 가격을 올려 팔기 시작한 것이다. 유기농 식품 자체가 이미 건강한 먹거리인데, 굳이 자극적인 단어를 붙여 비싸게 파는 까닭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심지어 발효와 아무 상관없어 보이는 식품에까지 '발효'라는 딱지를 붙였다. 그때부터였다. '아, 여기가 좀 이상해지고 있구나' 느껴진 것은.


10년 동안 쌓인 정이 있어 탈퇴를 망설이던 무렵, 생협은 본격적으로 잿밥에 더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치유센터를 명목으로 호텔 사업까지 벌이더니, 급기야 사업 확장을 위한 투자금을 받는다는 공지가 떴다. 100억 원의 투자금을 모으며 연 7% 이상의 금리를 보장한다는 내용이었다. 요동치는 요즈음 경제 상황에, 이 정도 규모의 사업체가 7% 이자로 100억을 유치한다니. 문제가 터질 게 눈에 선했다.


미련 없이 탈퇴를 신청하고 그동안 모아둔 출자금 50만 원 정도를 환불받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들은 약관을 핑계로 6개월 뒤에나 지급이 가능하다고 했다. 쎄했다. 환불금을 6개월 뒤에 준다니. 씁쓸한 마음으로 달력에 표시를 해두고 6개월을 기다렸다. 그러나 약속 당일, 2주 뒤에 주겠다는 문자가 왔다. 그리고 2주가 지난 당일, 또 다시 장문의 문자가 날아왔다. 사업체에 문제가 생겨 돈을 언제 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미안하지만 최우선으로 변제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상황은 처참했다. 오랫동안 그 생협에 두부를 공급하던 납품업체는 수억 원이 넘는 대금을 받지 못하고, 7% 이자라는 말에 억대의 돈을 맡긴 사람들도 투자금을 돌려받지 못하고 있다는 글이 온라인에 가득했다. 나처럼 출자금을 떼인 조합원은 헤아릴 수도 없었다. 연관 검색어에는 이미 '부도'라는 단어가 선명하게 떠 있었다.


못 받은 출자금은 정신건강을 위해 잊어버리기로 했다. 하지만 문득문득 그 시절이 떠오른다. 붙이면 그럴싸해 보일 자리에 맥락 없이 '항암'과 '발효'를 갖다 붙이며 물건을 팔던 그 시기 말이다. 잿밥에 정신이 팔려 본질을 잃어버렸던 그때부터, 이미 그곳은 내부에서부터 무너져 내리고 있었던 건지 모른다.


10년을 이용하던 업체의 흥망성쇠를 밖에서 바라보는 기분이 남다르다. 내가 20년 동안 다녔던 전 온라인 게임 역시 정확히 같은 궤적을 그렸기 때문이다. 입사할 당시만 해도 전 온라인 게임은 업계에서도, 회사 자체로도 최상위 클래스였다. 그러나 20년의 세월 동안 흥망성쇠를 거듭하더니, 내가 퇴직할 무렵에는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지경까지 떨어졌다.


회사가 무너져 갈 때는 어김없이 망하는 조직 특유의 조짐이 있었다. 한참 잘 나가며 매출이 하늘을 찌를 때, 시대의 변화에 맞춰 새로운 영역으로 사업을 확장할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회사는 그 기회를 차버렸다. 기존 영역에서 나오는 수익이 영원할 것이라 믿었던 탓이다.


이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던 매출이 하향 곡선을 그릴 때도 "올해만 이럴 거야, 내년엔 괜찮아지겠지"라며 상황을 안일하게 넘겼다. 그렇게 두 번째 기회마저 놓쳤다. 해마다 매출이 20%씩 곤두박질치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영원한 것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이미 회복 불가능한 상태였다. 내부에서는 분열이 일어났고, 말만 무성한 사공들만 넘쳐날 뿐 바카라임지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안타깝지만 예견된 비극이었다.


이 두 가지 케이스를 직면하고 나니, 결코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생협과 옛 온라인 게임의 쇠락을 내 인생에 대입해 볼 필요가 있겠다고 느꼈다.


오십 대 중반. 이제 남은 시간은 그저 조용조용 살아가는 일만 남은 것 같아 보여도, 생각보다 살아갈 날은 많이 남아있고 나는 여전히 젊다. 나중에 더 나이가 들어 "그때 그걸 해볼 걸", 혹은 "그때 왜 그렇게 스스로를 볶아대며 살았을까" 하고 후회하고 싶지 않다.


평범한 사람이기에 매번 갈대처럼 흔들리지만, 흔들리면서도 나를 잘 살펴야겠다. '근사하게 보여야지', '이 나이에 초라해 보이면 안 되는데', '남들에게 내가 어떻게 보일까' 같은, 내 삶과 아무 상관없는 '항암'이나 '발효' 같은 껍데기로 내 인생을 채우고 있는 건 아닌지.


퇴직 후의 일상 역시 내가 진정 좋아하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들로 채워야지. "오십대라면 마땅히 이런 모습으로 살아야지" 하는 슬롯의 기준과 잣대에 나를 억지로 맞추려 애쓰지 않으려 한다. 맥락 없는 과욕과 허세를 덜어내고 온전히 내 삶을 살아낼 수 있도록 늘 정신을 차리고 살아야겠다.


나는 나의 일상이 그저 마음 편안하고 잔잔하면 족한 사람이다. 이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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