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은 가장 긴 전쟁이었다
전쟁은 영웅보다 더 많은 안드로마케를 남긴다
텔레비전을 켜면 오늘도 전쟁 소식이 들려온다.
폭격으로 무너진 건물, 아이를 품에 안고 피난길에 오르는 어머니, 남편의 생사를 알지 못한 채 하염없이 기다리는 아내. 나라와 시대는 달라도 전쟁이 남기는 풍경은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
올해는 6·25전쟁 발발 75주년이다.
전쟁을 직접 겪은 세대는 점점 줄어들고 있지만, 그 전쟁이 남긴 상처는 아직도 우리 슬롯와 가족들의 기억 속에 살아 있다. 아버지를 잃은 아이들, 남편을 기다리던 아내들, 가족과 생이별한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일리아스』를 읽다가 문득 그들이 떠올랐다.
트로이에도 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안드로마케.
트로이 최고의 장수 헥토르의 아내이자 어린 아들 아스티아낙스의 어머니였다.
『일리아스』 제6권에서 안드로마케는 전장으로 나가려는 헥토르를 붙잡는다. 그녀는 이미 아버지와 일곱 형제를 전쟁으로 잃었다. 이제 남편마저 잃게 될까 두려웠다.
그녀는 헥토르에게 말한다.
"당신은 제게 아버지이시고, 어머니이시며, 형제이시고, 다정한 남편이십니다."
그 절박한 말은 한 여인의 고백을 넘어, 전쟁 속에서 가족을 지키고 싶은 모든 사람의 마음처럼 들린다.
그러나 헥토르는 돌아선다.
그는 영웅이었고, 자신의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얼마 뒤 제22권에서 그는 아킬레우스의 손에 죽고, 제24권에서 안드로마케는 남편의 시신 앞에서 통곡한다.
나는 그 장면을 읽으며 깨달았다.
『일리아스』는 영웅들의 전쟁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실은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했다는 것을.
우리는 흔히 전쟁을 영웅의 이름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자리에는 영웅보다 훨씬 많은 안드로마케가 남는다.
6·25전쟁에도 그랬고, 오늘도 세계 곳곳의 분쟁 지역에서는 또 다른 안드로마케들이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전쟁은 시대를 바꾸고 국경을 바꾸지만, 사람의 마음은 바꾸지 못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
아이만은 안전하게 지키고 싶은 마음.
가족이 함께 저녁 식탁에 둘러앉는 평범한 하루를 꿈꾸는 마음.
그 마음은 3천 년 전 트로이에서도, 75년 전 한반도에서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다르지 않다.
그래서 나는 아킬레우스보다 안드로마케가 더 기억에 남는다.
영웅은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만, 안드로마케는 사람들의 마음에 남는다
어쩌면 『일리아스』는 가장 위대한 영웅 서사시가 아니라, 전쟁 속에서도 끝내 사랑을 놓지 않았던 사람들의 이야기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