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첩방에서
육첩방에서
고압高壓은 얼음을 녹인다
얼어붙은 창문의 도툴한 반사광에
뒷통수를 대어 누른다
머리칼이 얼음을 녹이고 유리를 파고든다
단면을 따라 절개되는 나의 뇌腦
뇌간을 파고든 말끔한 알콜액으로
이마까지, 눈까지, 코까지, 입까지
철근이 박힐 때 까지 숨을 내어쉬고 기댄다
종아리 위로 취객이 하나 엎어진다
동정심이나 측은지심이나 뭐든
본래 뇌가 위치해 있던 살점에
자상刺傷만 남긴 채 시원하다
탁자 위로 만개 해 우뚝 선 술병들에 금이 간다
술병은 늘 시끄럽다
시끄러운 나는 아름답다
빈부의 격차가 권력의 격차
권력의 격차가 미추美醜의 격차가 된 나라
육첩방은 남의 나라
여기는 나의 나라
시가 이렇게 쉽게 쓰여지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머리를 든다
술은 술에게 비튼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축축한 악수
고압은 얼음을 녹인다.
압력은 손에서 오지 않는다. 배치에서 온다. 바카라상, 번호, 출석부, 종소리, 시간표, 수행평가 양식, 과목 선택표, 나이스 입력창, 마감일, 대학의 평가요소, 학원의 합격 사례, 부모의 카지노톡, 상담실의 형광펜, 프린터에서 막 나온 성적표가 서로 물린다.
압력은 얼굴이 없다.
바카라상은 악하지 않다. 나이스도 악하지 않다. 학업역량, 진로역량, 공동체역량이라는 말도 악하지 않다. 모두 옳다. 지나치게 옳다. 이무기는 틀린 말 속에서 자라지 않는다. 이무기는 옳은 말 속에서 자란다. 성장. 잠재력. 탐구. 성실성. 협업. 진로. 자기주도성. 발전가능성. 말들이 서로 엉겨 아이의 목을 감을 때, 비늘이 보인다.
아이는 뜨거워서 움직이지 않는다. 눌려서 움직인다.
얼어붙은 창문에 뒷통수를 댄다. 창문은 바깥을 보여준다. 대학, 직업, 계층, 집, 부모의 안도, 교사의 평가, 또래의 시선. 그러나 열리지 않는다. 아이는 통과하지 못한다. 머리를 댄다. 오래 누른다. 얼음이 녹는다. 유리가 젖는다. 머리칼이 유리 안쪽으로 스민다.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다. 투명한 벽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학교가 작동한다. 학교는 아이를 배열한다. 앉히고, 세우고, 부르고, 기다리게 하고, 말하게 하고, 침묵하게 하고, 제출하게 하고, 수정하게 하고, 기록되게 한다. 발표는 또렷하게. 질문은 흐름 안에서. 조별활동은 협력적으로. 수행평가는 진로와 연결되게. 탐구보고서는 동기와 과정과 결과가 보이게. 진로활동은 관심의 확장이 드러나게. 봉사활동은 나눔과 배려가 보이게. 행동특성 및 종합의견은 개인의 우수성이 보이게. 아이는 기록될 수 있는 방식으로 사는 법을 배운다.
주체는 출발점이 아니다. 주체는 결과다. 아이는 내가 선택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과목 선택표가 먼저 말한다. 학교 교육과정 편성표가 먼저 말한다. 대학의 권장과목이 먼저 말한다. 내신 산출 방식이 먼저 말한다. 수강자 수가 먼저 말한다. 성취도별 분포비율이 먼저 말한다. 세특 가능성이 먼저 말한다. 합격 데이터가 먼저 말한다. 부모의 불안이 먼저 말한다. 나이스의 빈칸이 먼저 말한다. 아이는 그 사이에서 고른다. 고른 뒤에 말한다. 내가 선택했다고. 이무기는 선택을 빼앗지 않는다. 선택지가 놓이는 판을 먼저 만든다. 빈칸은 자유로워 보인다. 그러나 빈칸은 명령한다. 너 자신을 이 형식으로 설명하라. 탐구 동기. 탐구 과정. 탐구 결과. 느낀 점. 추후 탐구 계획. 나는 누구인가. 오래된 질문은 수행평가 양식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제출 기한을 갖는다. 나이스의 몸은 조용하다. 커서가 깜빡인다. 입력창이 열린다. 글자 수가 남는다. 교사는 아이를 쓴다. 그러나 교사만 쓰는 것은 아니다. 학생, 수업, 수행평가, 동아리 기록, 진로활동 기록, 기재요령, 금지어, 글자 수, 마감일, 교무실의 피로, 대학의 평가요소, 작년 합격자의 문장, 관리자의 점검, 나이스 입력창이 함께 쓴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