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부부를 지탱해 온 부모의 노년
연초에 놀이터에서 이웃들로부터 가장 많이 들은 질문은 할아버지는 안오시냐는 장인의 근황이었다. 유치원 원장님, 아파트 관리소장님부터 놀이터에서 본 이름모를 아가의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장인께선 저명인사였나보다. 사실 한번 보면 잊히지 않는 룩이다. 훤칠한 키에 군살없는 호리호리한 몸, 그리고 빽빽하고 눈부신 꽉 찬 백발의 긴 머리를 파마까지 하신 스타일이고, 억센 동남방언을 쓰는 하이톤의 할아버지다. 이웃들은 할아버지를 매개 삼아 아이스브레이킹을 시도했고, 나는 장인의 근황을 거쳐 육아휴직을 공표하며 다정한 아빠 양육자 페르소나를 동네에 퍼트리고자 했다. 일종의 소프트랜딩 전략이었다.
2022년 가을 집앞 중국집 2층에서 아이의 두 돌 파티를 하던 날, 아버지는 장인께 2024년부터 주간 양육자 역할 이양을 넌지시 떠봤다. 권한 조금 + 바카라임 가득의 하드워크. 최근 멜론 차트를 시끄럽게 틀어둔 메가커피에 옹기종기 앉아서 진행된 대담에 장인과 장모는 확답이 없었다. 사시가 되도록 양쪽으로 눈을 굴리던 나는 심장박동이 급격히 올랐다.
‘협상 결렬인가?’
아내의 복직당시 부모님께 먼저 손을 벌린 이유는 장인장모가 아직 일을 하고있기 때문이었다. 환갑 넘은 두 커플은 출신지역과 나이대가 닮았다. 가장 큰 차이점은 58년 개띠 커플은 조기에 은퇴된 프리랜서, 60년 돼지띠 커플은 퇴직 이후에도 촉탁직과 특수고용직으로 일을 이어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장인은 환갑즈음 정년퇴직을 하면서 은발의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가톨릭 신자들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인 산티아고 순례자의 길을 걷고싶어 아내에게 스페인어 초급바카라을 빌렸다. 그러다 갑자기 원래 근무하던 기업의 물류쪽 하청업체에 파트타이머로 취업했다. 4대보험은 다 안되는 듯했지만 경력과 네트워크를 쓸 수 있는 자리인게 다행이었다. [임계장 이야기]에 나오는 그런 노인일자리는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장모께선 특수고용직인 학습지회사의 지점장으로 은퇴후 얼마간 쉬다가 다시 뭔가 영업을 시작했다. 상품의 종목을 가리지 않는 것이 다단계인가 걱정되었지만 경제활동에 감놔라배놔라 할 수 없는 사위는 앞에선 허허실실 웃으며 뒤에선 아내를 달달 볶았다.
결론적으로 집안의 네 어른은 경제적으로 은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날의 짧은 긴장 이후로 약 1년 뒤, 육아의 R&R은 거부할 수 없는 중력으로 처가로 이전되었다. 장인어른께선 매일 새벽 곤지암 인근의 물류센터로 출근하고, 점심때쯤 퇴근해서 서울로 2차출근을 했다. 그리고 8시 넘어선 경기도의 집까지 주 5일 하루 95km를 운전했다. 해병대출신의 지리산 종주를 하는 성당 족구팀 공격수라고 해도, 그도 환갑보다 칠순이 가까운 나이임을 감안하면 피곤하고 위험한 동선이었다. 나름 치운다고 정리하고 출근해도 엉망인 집을 보이는게 부끄럽기도 잠시, 익숙함에 무뎌져 우리는 매일 아침 튀어나갔고, 오후에 도착한 장인어른은 우렁각시처럼 딸의 집을 치우고 닦아두었다. 나는 뭐라도 해야 한다는 마음에 부지런히 냉장고를 채우려 새벽배송을 부지런히 시켰지만 장인어른은 동네 마트를 부지런히 다니며 그날의 저녁을 구상했고, 딴짓하는 아이를 달래서 먹이고 우리의 저녁까지 준비했다. 장모님은 사시사철 김치와 반찬을 담가서 보냈다. 2년 동안 장인어른은 두 번의 교통사고를 겪었다. 과실은 100:0과 0:100 양극단, 한 번은 아이 미술학원을 서둘러 보내다 이중주차가 심각한 지하주차장에서 주차된 차를 긁었고, 한 번은 귀갓길에 신호위반 차량에 차가 반파될 정도로 사고를 당했다.
자칭 자취요리왕 출신이라고 호기롭게 시작한 내 음식은 ‘냉장고를 부탁해’를 표방한, 혹은 빙자한 냉장고 파먹기였다. 매일 이어지는 끼니 차리기는 메뉴 자체의 완성도도 문제지만 다양한 구성을 짜는 과정이 지난하게 어려웠다. 요리보다 힘든건 아이 밥먹이기. 자신의 딸과 아들에이어 육아 3회 차인 장인어른은 아이의 마음이 다치지 않게 대하는 법과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법도 나보다 두 수는 위에 있었다. 우리는 약간의 금액 자동이체로 네 명의 노인에 대한 미안함을 네 해 동안 탕감하고 지냈다. 대안이 없다는 핑계가 너무 달콤했다.
낙동강 하류 어느 시골의 농가 넷째 아들인 장인어른은 농사를 말 그대로 사랑했다. 경기도 신도시의 향우회에서 알게된 어느 부호가 소유한 산자락의 농장에서 밭 한쪽을 받아 십수년째 관리해오면서 밤이고 주말이고 무언가를 길러냈다. 자녀에 이어 손주까지 먹일 양파며 당근이며 감자며 오이며 가지를 길러냈다. 우리 아이가 좋아한다고 재작년엔 수박을 시작하더니 올해는 딸기도 시도하는 열정이 흩어지지 않았다. 처음으로 주중에 시간이 생긴 장인어른은 오후마다 밭에 가서 사부작사부작 일을 찾았다. 알고보니 할 일이 그리도 많았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사실 ‘포도밭사장님’이라 불리는 장인어른의 유일한 라인인 어르신은 농장주 회장님의 친척이고 마름에 불과했다. 자신의 별장을 좀더 프라이빗하게 쓰고싶은 지주의 요청에 장인어른은 농장 안에서의 경작을 포기했다. 고맙게도 그분께는 남는땅이 더 있었고, 기존 밭 대신에 철문 밖 주차장 부지 옆 약 20평 정도되는 땅을 쓸 수 있게 됐다.
봄비가 한바탕 내린뒤 햇살이 뜨거워지기 시작한 주말아침, 새 밭 옆에 주차하고 트렁크에서 등산화와 다이소 작업장갑을 사뭇 비장미있게 꺼냈다. 고추나 토마토가 있으면 따기라도 하겠구만, 여기서 뭘 해야 할지 몰라 비장한 표정만 풀지않고 있었다.
“아버님 이건 밭이 아니라 그냥 땅인데요?”
패기만 있고 요령과 일머리가 없는 사위는 밭일에선 늘 전력외였다. 뭔가를 망치지나 않으면 다행이라 아서라며 늘 ‘하라’보다 ‘하지 마라’가 많은 아버님이 오늘은 말없이 쇠스랑과 삽을 가져왔다. 아이는 민들레 홀씨를 꺾고 불고 닿지 않는 벚나무 가지를 향해 쉴 새 없이 점프를 해댔다.
"몇 달 노니까 지겹진 않으냐?"
목뒤로 땀이 삐질 났다. 이직은 언제하냔 말인가. 침착하게 넉살 좋게 받았다.
"저는 너무 체질이라 좋은데요..."
"그래 이번기회에 건강도 챙기고 제대로 쉬어라."
우리의 새 밭에는 담배꽁초와 테이크아웃 잔, 과자봉지들이 수북했다. 울타리가 버젓이 있는데도 지나가는 사람들이 던져 놓는다고 할배는 거친말을 쏟아냈다. 건네받은 밀짚모자를 쓰고 삽질을 시작했다. 아버님이 쇠스랑으로 돌을 긁어내면 옆에 달려가서 삽으로 퍼서 바퀴하나짜리 수레에 실어담는 단순작업이었다. 단순작업이 몸을 망가뜨리는건 엄청난 반복행동 때문인가, 길게 탔던 금요일 배달 때문인지 허리를 숙일 때마다 햄스트링이 땡겨왔다. 작업중 큰 돌이 나오면 삽을 팍팍 밟아가며 떠냈다. 헬스 몇년했다고 깝죽거리기엔 손수레는 너무 무겁고 균형도 잡히지 않았다.
“아버님 이건 땅이 아니라 그냥 돌인데요?”
손수레가 다다른 벚나무 아래는 마이산 탑사의 일부를 정교하게 잘라내서 이식해 놓은 모양의 돌탑이 있었다. 큰 돌부터 둥글게 쌓아 올린 직경 1미터 남짓의 둥근 돌탑은 반쯤 완성이었고, 이걸 다 쌓으면 저 땅이 그럴듯한 밭이 될 것 같았다. 아버님은 구한말 유카탄 반도에 떨어진 조선인들같이 황무지를 밭으로 만들고 있었다. 오더대로 큰 돌을 집어 탑을 쌓았다. 돌을 이상한데 놓으면 한소리 듣고 아버님이 다시 쌓기를 반복. 그래도 오늘은 처음으로 칭찬을 들었다. 어리바리한 농사일보단 단순 삽질이 내 달란트의 영역이었다. 백발의 싸부에게 이제 하산해도 된다는 명을 받은 [취권]의 성룡처럼 히죽히죽 웃음이 났다.
그다음 주엔 경운기 대가리에 회전금속날이 달린 농기계로 다 골랐다고 생각했던 땅을 다시 갈아엎고 고랑마다 비닐을 덮었다. 예닐곱개의 고랑 끝엔 여전히 쓰레기가 버려졌지만, 이전보다는 확연히 줄어들었다. 저 끝 자투리땅도 굳이 한줄 더 이랑을 만들어놨다. 아버님께선 붉은 얼굴로 여긴 뭐를 심고 여는 뭘 하고 하고 올해의 사업구상을 펼치다가 다시 뚜벅뚜벅 걸어가 삽으로 물골을 보완하며 말했다.
“우리는 잘 안풀려서 아직 이래 왔다갔다 일하지만, 너그들은 얼른 잘 모아서 빨리 공기 좋은데 가서 이렇게 농사지으면서 재밌게 살아라.”
졸업 후 무일푼으로 상경해 남태령을 걸어서 넘으며 가족의 터를 정한 그는 정도전 혹은 무학대사라면 이럴까 싶은 표정으로 그 순간을 자주 회상했다. 평촌 신도시 착공 전이었다. 수십년만에 완전히 자리잡은 그곳을 종종 살기좋은 땅이라고 언급하던 그에게 땅은 터전 이상의 애착이었다. 지금 내나이쯤 호기롭게 시작했다가 IMF 무렵 무너졌던 사업과 불안정했던 몇몇의 온라인 게임, 정년이후의 바쁜 삶까지 그는 이젠 습관까지 쉼에 인색한 할배였다. 나는 아직도 나보다 체력이 좋은 아버님이 든든했고 동시에 늘 마른장작처럼 태우고 있는 가동률 100%의 생명력이 어느순간 파사삭 하면서 사그라들까 두려웠다.
잠깐 바람이 일었다. 말없이 나란히 서서 빈 밭을 함께 바라보았다. 작은 밭뙈기지만 물과 햇빛과 시간과 노력이 길러준 작물들은 그에겐 정직함 혹은 그이상의 보상이고, 그걸로 가족을 먹인다는 사실이 아버님의 이상향이었나 보다. 땅에 대한 경배로 김을 매던 박경리 선생처럼 올해 아버님의 매일은 허리굽는 땅에 대한 큰절 같았다. 전원생활이 내 추구미는 절대 아니지만, 평화는 필요했다. 내 불안을 덮어주며 행복을 빌어주는 아버님의 한마디에 선글라스 안으로 또 시야가 뭉글몽글했다. 좀 이상하긴 했는데 벌써 테스토스테론수치에 이상이 있나, 마흔에 갱년기가 올수도 있나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