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국역의 절망

젠장 오금행 놓쳤다.

by플랑시


내 휴직 이후 아내는 출근시간을 다시 9시로 조정했다. 그동안 9시반 출근 6시반 퇴근을 2년 정도 유지해 왔다. 우리집은 3호선 끝자락에 위치했다. CBD라 불리는 광화문 일대에 위치한 사무실의 특성상 지하철이 촘촘해서 1호선 종각역과 5호선 광화문역 3호선 안국역을 모두 이용할 수 있었던 게 다행이었다. 도어 투 도어로 1시간이 조금 넘게 걸리는 통근시간이었으므로 아내는 어떻게든 8시까지 등원을 마무리해야 했다. 9시반 출근도 눈치가 보이는데, 30분에 땡 하고 들어오면 좀 대한민국 온라인 게임 정서에 안맞으니까 말이다.


나는 6시 50분 통근버스를 타기 위해 매일아침 조용히 도둑출근을 했다. 화장실에서 1.8미터 떨어진 아이방의 위치상 샤워소리에 아들이 깨기도 해서 물을 살살 틀고 머리만 감고 출근한 날도 많았다. 안방 욕실이 달린 화장실 두개 짜리 집에서 살아보는 게 소원이라고 떠들고 다닐 정도로, 방3화2라 불리는 구성의 국평(84m²) 혹은 신축 59m²아파트는 가닿을 수 없는 로망이었다. 친구들은 그럼 서울집 팔고 나가서 살라고 타박하곤 했다.

작년까진 퇴근무렵 주 2회 정도는 받던 아내의 문자가 있었다.


“젠장, 오금행 놓쳤다.”




우리집은 3호선의 원래 종점이었던 수서역 너머 연장구간에 있으니 3호선 하행은 한대는 수서행, 한대는 오금행이었다. 오금행을 놓치면 다음은 수서행이니 약 10분 넘는 시간이 더 늦어져서 아내는 늘 바지런히 안국역 6번 출구까지 달려갔다. 그러고는 땀이 살짝 날 즈음 오금행을 놓치면 분에 차서 평소 쓰지 않는 욕까지 섞으면서 문자를 보냈다. 퇴근시간이 더 빨랐던 나는 사람을 얼마나 욱여넣을 수 있는지 매 열차마다 테스트하는 9호선 급행에서 폰을 가슴앞에 붙인 채 조심히 오라고 답장을 하곤 했다.


아내는 항상 나보다 바빴다. 나도 한다고 티를 내긴 했지만, 유치원 준비물, 내일 입힐 옷, 같은반 친구 생일선물 포장 등 자잘한 아이의 뒷바라지는 아내가 도맡다시피 했다. 나는 늘 아내보다 조금 먼저 도착해서 장인어른의 저녁준비를 도우려고 했다. 장인어른은 그 시간에 아이와 더 놀라며 도움을 마다했었다. 오후 7시 45분 즈음이면 늘 상기된 얼굴로 귀가한 아내와 장인어른과 셋이서 늦은 저녁을 먹고 서둘러 장인을 퇴근시켜 드렸다. 나는 아이를 씻기고 아내는 설거지를 하다 보면 어영부영 9시가 됐고 아이를 재우러 들어가야 했다. 아이는 한 해씩 자랄수록 조금 더 놀고 싶어 했지만 아내는 잠드는 시간은 엄격하게 지키려고 했다. 아내는 손자를 하루동안 너무 오래보는 우리의 부모와 부모를 너무 짧게보는 우리 아들을 위해 그렇게 저녁마다 진땀을 뺐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운이 좋은편인지 고집을 부린 건지 불확실하지만 아이의 성장에 양가의 도움을 꼬박 2년씩 받았다. 아이가 태어난 후 돌이 지날 때까지는 아내가 1년간 육아휴직을 하고, 그다음은 내가 이어받아 1년을 더 어떻게든 키워보려 했었다. 하지만 과장 진급에 떨어지면서 나는 비겁하게 지방에 거주 중인 나의 부모님께 도움을 청했다. 승진 재수를 앞두고 육아휴직을 지를 용기가 도저히 나지 않았다. 부모님은 지방도시의 아파트 전세금을 빼서 우리집 근처로 셋집을 얻어 이주하기로 했다. 문제는 당시 내가 이사를 결정했다는 점이었다.


원래 우리집은 아내의 온라인 게임에서 대중교통으로 10분 남짓한 거리에 있었다. 수년 전 아내가 서울시 지도를 펼치고 우리 둘의 온라인 게임에서의 거리를 반경 몇 킬로로 제한하고 LTV 40% 기준으로 예산에 최대한 맞춰 고른 집이었다. 당시에는 아내의 드라이브에 “아 고점인데....지금 물리면 큰일 나!”라고 일단 반대하다 끌려가듯 샀던 우리의 첫 집. 그런데 아이가 돌을 앞둔 2021년에는 내가 아내의 옷깃을 잡아끌 듯 강하게 설득해서 둘의 온라인 게임과 어떤 접점도 없는 송파구로 이사를 결정했다. 온라인에서 본 짧은 정보와 자극적인 제목의 부동산 서적 몇 권으로 내 불안증이 모멘텀으로 전환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나는 젠체하며 얼마 전 읽은 [강남의 탄생]을 인용했다.


“철도축에서 도로축으로 헤게모니가 넘어간 지 수십 년인데, 서울의 중심은 서울시청이 아니라 강남역이야.”


그러고는 당시 시끄러운 삼성역일대 개발에 꽂혀서 ‘부의 동진론’ 같은 말로 아내를 설득했다. 지금의 시장상황에서 어떻게든 강남 쪽으로 바짝 붙어서 갈아타야 한다고 아내를 졸라서 겨우 낮잠에 든 아기를 차에 태우고 임장을 돌기도 했다. 강남은 도저히 비벼볼 수가 없으니 점점 동쪽으로 이동하다가 최선보단 차악처럼 고른 집이었다.


그해 여름 나는 주말마다 강동구와 송파구 일대를 따릉이로 누비며 집을 보러 다녔고, 아내는 돌쟁이를 돌보느라 이사 갈 집은 보지도 못한 채 아기띠를 맨 채 계약서를 쓰러 따라왔다. 나는 이 동네를 ‘똘똘한 한채’라 불리는 강남/서초의 집으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라고 여기고 있었다.




2년마다 전세 이사만 5번 했던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에서 노년을 맞이하던 부모님은 망설임 없이 알겠다며 14년 만에 다시 서울로 왔다. 친구도 없고, 말투도 다른 서울이지만 가장 큰 문제는 주거의 질이 크게 무너졌다는 점이었다. 지방 광역시의 국평아파트 전세보증금으로도 우리 동네에서는 소형 아파트 전세도 무리였다. 3억 언저리면 그래도 강북에선 구축 아파트전세는 노려봄직 했는데, 한강을 건너오니 택도 없었다. 월세를 내가 좀 내겠다 해도 부모님은 극구 반대였다. 잠깐 살건데 집을 줄이면 되지, 왜 돈을 내냐고 성화였다. 나는 우리집을 구하러 다닌 지 반년만에, 집 주변의 빌라 전세를 찾느라 분주했다. 직방과 다방의 매물을 캡처해 부모님께 보내고 약속을 잡아 퇴근길에 매물을 보고나선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기는 주차가 실제로는 안된다고 하네요, 여기는 계단이 너무 많네요. 서너 번째가 넘어가면서는 내 설명은 자꾸 길어지고 아버지의 대답은 점점 짧아졌다.


“우린 다 괜찮다. 엥간하면 하자.”


엘리베이터가 있는 신축빌라는 대부분 월세만 가능했다. 마음에 드는 집을 겨우 찾아 가계약금을 쏘려다가 반려동물을 키운다는 말에 뺀찌를 먹고는 송리단길에서 “이 동네 개들은 다 자가야?”라고 혼잣말을 했다.
결과는 엘리베이터가 없는 방 두개의 북향 빌라, 헬리오시티라는 신축대단지 길건너라 대비가 더 극명해 보였다. 부모님은 수십년 결혼생활에서 쌓인 짐들을 대충 종이상자에 다 밀봉하고 연고 없는 지역에서 누수와 외풍을 말없이 견뎠다. 아내는 시부모에 대한 마음의 짐 때문인지 점심시간 외엔 문자를 확인하지 못할 정도로 바쁘게 일했고, 꾸역꾸역 정시퇴근을 해냈다. 정작 나는 부모님을 레버리지삼아 거래처니 부서니 태연하게 소맥을 말아댔다.

“오늘 부장이 벙개쳤어. 팀 후배들 다 튀어서 나라도 가야할듯.” (16:14)
“ㅇㅋ. 젠장 수서행이다.” (18:08)

첫잔을 꺾다가 안국역에서 보낸 아내의 답장을 받곤 했다. 이사도 오기전에 미리 신청해 둔 어린이집은 한참 동안 대기하고 나서야 합격했다. 출생률 0.6의 도시라기엔 박터지는 경쟁이었다. 어린이집에서 아이는 세상의 모든 전염병을 만나며 면역체계를 쌓는지 격주로 아팠다. 아직 코로나 유행이 끝나지 않은 시기라 갑자기 응급실을 갔다가 입원했을 땐 온 가족이 교대하면서 연차를 짤라먹어가며 비상시국을 지나기도 했다. 기관 첫해는 원래 그런다더나? 만약 부모님께 양육을 손벌리지 않았다면 아찔한 날들이 많았다.




그 사이 부모님 슬하 마지막 사랑둥이었던 열세살 말티즈가 서울에서 세상을 떠났고, 33만킬로를 달린 03년식 산타페를 폐차했다. 기저귀를 차고 엉금엉금 기던 아이는 우리나이로 네 살이 되었다. 2년 전세계약을 마치고 부모님이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던 겨울날, 아내는 빌라 복도 철문뒤에 숨어 벌게진 눈으로 멈추지 못하고 눈물을 떨궜다. 나는 선글라스를 쓴 채로 아이를 안고 계단을 내려갔다. 아직 반쯤은 아가였던 아이는 헤어짐의 의미를 모르고 어서 킥보드를 타러 가자고 성화였다.

아이는 이제 큰 병치레도 없을정도로 튼튼하게 자라고 있다. 올해 일곱살이니 이젠 아가 느낌은 온데간데 없고 어린이 테가 물씬 난다. 조부모의 노화와 비례해서 성장한거라 생각하면 조금 서글픈것 같기도 하고, 풍화되는 세월만큼 어떤 가치가 새로 생겨난 건지는 모르겠다. 2+2년 전세계약처럼 양가를 동원하고 이제야 조부모들의 시간을 아빠로 대체했다. 소득을 토막내는 대신 시간을 조금 얻고 부채감을 한 스푼 떠낸 정도일까. 올해도 벌써 절반이다.


여전히 아내는 승강장에서 짧은 문자를 남긴다. “수서행이네.”라고. 그러고보니 요즘 “젠장”은 사라진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