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이라는 인종

8억짜리 하이패스와 축의금 10만원

by플랑시


한때 대학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부동산쟁이로 통했다. 빨리 첫집을 사고, 이사도 한번 하면서 여기저기 입을 털어서였는지 개인적 연락으로 질문이 종종 들어왔다. 실제론 부동산카페와 블로그에서 글 몇 개 읽고 유명한 유투버 몇 명을 남들보다 조금 더 아는 야트막한 지식수준임에도 괜히 아는척을 했었나, 이런 연락이 들어오면 젠체하고 다녔던 나날에 얼굴이 화끈했다. 여긴 어떨까?라는 식으로 매물을 다이렉트로 보내는 친구도 있었고, 모르는 지역에 대한 한줄평을 요구받은 적도 있었다.




작년 말부터는 가깝고도 먼 친구가 부동산 토픽을 자꾸 던졌다. 나보다 두살 많고 올해 봄에 결혼하는 40대 예비신랑, 연락이 닿는 동기 중에선 거의 마지막 순서였다. 신혼집을 고민하는 그에게 아는 선에서는 성심성의껏 답해야겠다는 생각에 토론과 토의가 이어졌다. 수개월에 걸쳐 드문드문 이어진 대화는 주로 그가 임장을 가거나 매물을 본 날에 몰려있었다. 그의 선택이 옳았나, 그가 점찍어둔 매물들은 호가가 더 날아갔고, 놓칠 때마다 짙은 아쉬움과 다가오는 결혼식에 대한 압박감이 대화창에 전해졌다.

입사동기이기도 해서 십수 년간 얼굴을 봐온 사이라 그의 속사정들을 많이 들어 알고 있었다. 파일럿 이직에 성공하며 했던 퇴사와 유학이 하필 코로나기간을 겪으며 매몰비용화되고, 몇년전 한국을 유난히 시끄럽게 했던 코인 폭락사태를 겪었다. 투자자면서 피해자였던 그의 자산은 0에 수렴했다. 이후 자격증 공부를 하다가 배경 없던 금융계에 취직했다고 소식이 전해졌다. 크고 긴 고통 이후 다시 연락이 닿은 그는 한결 더 성숙해지고 여유로워진 모습으로 나를 놀라게 하곤 했다.


“이 형 철학을 하는구나.”


그렇긴해도 늦은 결혼으로 부동산에 지각비를 많이 내야 하는 상황이 그에게 조급증을 주고 있는 것 같았다. 교회에서 만난 여자친구와 드디어 날짜는 정했는데 다들 그렇듯 아직 집은 못 정한 게 너무 큰 골칫거리였다. 그는 저걸 어떻게 사지 싶은 지역이나 아파트를 토픽으로 던지곤 한창 이야기를 하다가 주거비용을 최소화한 월세 몸테크+금융투자로 널뛰기도 했다. 우리동네 주변 단지들로 시작된 부동산토크가 여기저기로 퍼져나가면서 마포구와 성동구, 광진구를 횡단해 강남구까지 도달했을 때 속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돈도없는게 여기저기 다 별로라고만 하네.’


지역에 대한 선호야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이미 꼬여버린 내 오랜 기억으로부터 숙성된 감정이 그의 평들을 아니꼽게 읽고 있었다. 대학생 시절인가 신입 시절인가 그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강북은 일하러 가는데 아닌가?”




강남에서 자라서 재건축된 강남아파트에 살고 있는 이 총각에겐 학교와 회사가 위치한 강북이 이질적인 외부세계인 것 같았다. 친척이나 지인 중 “강남의 진짜 부자들”을 언급하며 자신은 평범한 사람임을 강조하는 그는 강남키즈 프레임을 늘 거북해했다. 상속자들이 모여살 것만 같은 찐부촌이 아닌 양재천 인근 아파트촌 출신인 그 또한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몸부림치는 평범한 월급쟁이였다. 과소비를 경계하는 수준을 넘어 엄청나게 짠돌이여서 “매울신(辛)”이란 별명으로도 불린 그는 초년생 시절 월급을 꼬박꼬박 저축하고 “엄카”를 틈틈이 쓰면서 꼼꼼한 절세를 했다. 그때부터 배알이 꼴려버린 나는 그의 솔직한 말에도 갖가지 색의 필터를 끼고 있었다.


형수의 온라인 게임위치를 듣고 마포구를 언급한 내게 마포의 언덕배기 지형이나 아직 남아있는 너저분한 느낌의 동네들을 넌지시 꺼낸 그에게 화가 일었다. 어린 날 우리가 같이 술마시고 놀던 그곳, 내 20대를 통째로 품었던 마을들을 그가 비위생적인 무언가로 내려다보는 인상으로 와닿았었다. 그때부터인가 잔뜩 꼬여버린 내 귀는 그의 사적인 느낌마저 서민들의 공적인 분노로 치환하려 했다. 당사자에겐 그저 회유성 어종처럼 고향 근처에 살고 싶은 마음이거나, 원래의 자리에서 밀려나기 싫다는 계급적 공포일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강남출신 신혼부부가 어쩔 수 없이 알아보는 주변지역을 이야기할 땐 나혼자 악에 받쳐서 날 선 말들을 찍어댔다. 내가 점점 열을 올린다 싶으면 그는 다 좋은데 다 너무 비싸다고 한숨으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연초에 어쩌다 강남구로 넘어가 배달을 돌다가 그가 사는 아파트에 이르렀다. 건축비 급등 전 입주한 아파트라 마감자재가 좋나, 사업성 좋은 단지라 고급화를 했나 싶었다. 104동의 웅장한 로비를 보고 홀린듯 사진을 찍고 그에게 전송했다. 반갑게 어쩐일이냐고 묻는 형에게 배달왔다고 하니 자기집 로비라 했다.

‘와씨 제일 큰평수였어!’


엄마집이라고 손사래를 칠 때마다 그러니까 효도하라고 비아냥대던 내가 얼마나 적은지 대리석 발린 곧은 기둥들이 말해주었다. 그는 내 일과를 묻더니 곧 점심을 먹자고 했다. 슬롯생활이라곤 끊겨있는데 깜빡이 없이 들어오는 초대가 더할나위없이 반가웠다. 그날 빠진 점심근무는 야간으로 벌충할 계획이었다. 다음 주에 곧장 그가 일하는 판교로 갔다. 판교역 주변 분위기는 또 생경해서 시골쥐마냥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큰소리로 이름을 부르며 형이 다가왔다. 원래도 큰데 풍채가 더 커졌다. 짧은 점심시간을 고민하던 그는 카지노 건물에 자리한 브루클린버거로 이끌었다. 익히 들어봤지만, 여의도에도 생겼지만 가격때문에 한번도 안 가본 수제버거집이었다. 오늘 왠지 얻어먹을것 같은 느낌이라 메뉴판 맨 위 기본메뉴로 단품만 시켰는데 한입 베어 물자마자 입안으로 퍼지는 육즙과 치즈향에 그냥 큰 거 세트 시킬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몸이 노곤하니 치즈만큼 녹아 패티와 거의 하나가 되고 있을 즈음 그가 신혼집 이야기를 꺼냈다.


서울숲 근처로 성수동에 작은 아파트를 샀다고 했다. 작고 낡았음을 강조하는 그의 겸손에도 견적이 그려졌다. 자세히 물어보기는 쫌스러워서 단지는 묻지 않았다. 형 능력 좋다고 엄지를 치켜세우는 동안 표정의 부자연스러움이 드러났는지 그는 조심스레 “가족론(Loan)”을 언급했다. 반년 전 카톡상의 대화를 떠올렸을 때 그의 매수 예산은 12억에서 맥스 15억 정도였다. 그중 가족간 증여세 없이 무이자 차용으로 조달가능한 금액이 8억 6,800만원이었다. 신랑과 신부 두 명에게 양가에서 각각 빌려줄 수 있는 금액은 법정이자 4.6%를 감안 시 연간 이자금액이 1천만원을 넘지 않는 2억 1,700만 원. 거기에 곱하기 4를 한 금액과 계산과정을 그의 설명으로 들었던 기억이 퍼뜩 났다. 배불리 얻어먹은 줄 알았는데 갑자기 든 시장기에 그가 권하는 감자튀김을 포크로 두개씩 찍어버렸다. 마치 계약날 부동산에 앉아 그의 자금조달계획서를 본 것 마냥 남의 일에 위산이 쭉쭉 나왔다. 10년차 우리부부의 고통과 짜침과 운빨을 다 버무려 넣은 우리집이라는 표상은 호갱노노 실거래가 얼마짜리 기표에 갇혀있는데, 숫자로만 단순화한 2차원에서 그가 파란색 하이패스 차선으로 진입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그의 초대로 휴직 후 처음 여의도에 발 디딘 2월의 밤, 입사동기 중 현직자 2명과 휴직자 1명, 퇴사자 1명이 모였다. 40대인 동기들은 능글맞을 대로 닳은 아저씨들이라 오랜만의 만남에도 입담은 잘 터졌다. 제로콜라 네 캔을 놓고 미나리삼겹살을 구우며 긴 저녁자리 후 2차는 없이 헤어졌다. 대화를 이끄는 리더는 결혼준비 어떻게 했냐는 청모다운 토픽으로 질문을 던지며 새 부부의 반지 브랜드와 가방 브랜드, 신혼여행지까지 캐냈다. 반지는 까르띠에였나 쇼메였나, 가방은 어딘지도 모르겠다. 여행 이야기를 하면서 예전엔 그리 아끼더니 시원시원하게 질렀네라며 놀리기도 했다. 우리가 다 20대일때 갔던 유럽여행에서 새신랑 매울신이 너무 싼 숙소를 잡아서 트런들베드에서 자다 카페트 먼지를 옴팡 먹고 투닥거렸던 에피소드를 누가 말하며, 신혼여행인데 호텔 좀 좋은 걸로 잡으라고 타박했다.


돌이켜보면 고등학교때 비해서 대학엔 여유로운 친구들이 더 보였다면, 회사에 오니 입사동기들은 전부 다 부자 같았다. 신입사원 시절, 근사한 라운지바같은데서 동기모임을 하고 불법개조 원룸인 자취방으로 돌아올때면 깔때기 같이 좁혀진 주변에 울적했었다. 신기한 자리가 많았던 그때와 달리 이제는 연락도 만남도 없다. 다들 애키우느라 바빠서 소식은 건너건너로만 아는 정도. 벌어진 격차만큼 역설적으로 차이가 잘 보이지 않았다. 각자의 생으로 멀어졌기 때문에 부럽기에도 벅찼다.


몇 주 뒤엔 대학 선후배를 대상으로 한 청첩장 모임이 있었다. 이번엔 안가기로 했다. 낼 축의금은 뻔한데 밥을 또 얻어먹기가 미안하고 껄끄러웠다. 그리고 십년전 10만원이랑 지금 10만원은 두배는 차이가 날텐데, 그럼 20? 15는 너무 계산적인가. 보고 싶은 사람들은 많지만 아무래도 패스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둘 중엔 대학모임이 내가 빠져도 영향이 덜 한 자리기도 하고. 쌀을 3인분만큼 씻고 단톡방에서 식당이 공유되는 와중에 개인 톡을 남겼다.


“오늘 와이프 야근이래. 애봐야해서 못갈듯 쏘리.”

계절이 완연히 바뀌고 찾은 4월 강남의 교회건물엔 방구깨나 뀌는 기업의 화환이 빼곡했다. 오늘따라 더 말쑥하게 잘생긴 신랑은 언제나처럼 허물없이 반기고 고맙다는 인사를 연거푸 했다. 덥석 쥐는 손이 새삼 엄청나게 컸다. 우리는 픽앤롤을 좋아하던 농구팀 파트너였다. 개떡같이 패스를 넣어도 텁텁 찰떡같이 잡아서 골대에 넣어주던 믿음직한 포워드 친구. 하객이 너무 많아 사진촬영도 여러번 나누어했다. 몇 주 뒤 장문의 문자로도 고마워하는 그의 그릇이 유난히 커 보였던건 간장종지만한 내 소갈딱지의 기저효과였다. 아마도 집들이는 없겠지만 그가 신혼집에 나를 초대한다면 미안한 만큼 좋은 선물을 사가기로 마음먹었다. 마음만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