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과 도파민 사이

등급과 미션이 채찍질한 아드레날린

by플랑시


이쯤되면 지원서를 쓰기위해 배달을 하는지, 배달을 뛸 명분으로 원서를 써갈기는지도 헷갈리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긁어내리는 스크롤 사이에서 뭐라도 직무가 연관된 느낌이 나는 회사는 AI에게 어떤 회사인지 물어봤다. 녀석의 답변은 유려하게 요약한 웹크롤링이지만 늘 한결같은 뉘앙스였다. 우쭈쭈 해주는 낯간지러운 칭찬이 LLM의 기본세팅인것 같아서 비판적으로 답해달라고 명령을 넣어둔 이후엔, 모든 공고와 회사에 대해서 일단 까고보는 AI가 결과적으로 내 마음을 읽어버린 셈이 되었다.


지도앱에서 사업장 위치를 체크하면서 먹지도 못할 신포도를 뱉듯 alt+F4를 신경질적으로 눌렀다. 이제 믹스커피를 Hot에서 Ice로 바꿔 마시는 계절이다. 이어폰을 끼고 화면을 뚫어져라 째려보고있는데 도서관 직원이 다가와 뭐라 말을 걸고 환기창을 닫았다. 벌써 에어컨을 켜나 보다. 차가운 커피는 벌컥벌컥 마시고 나면 어김없이 배가 꾸루룩 거리고 신호가 와서 화장실로 숨어들었다. 이정도면 화장실을 가기위해 도서관에 출근하는 판세다. 수십년째 유일하게 유지하는 루틴과 리듬은 똥뿐인가, 잘 배출하는 것도 복이라지만 똥만드는 기계라 불려도 이상하지 않은 내 모습이 왜 평화로운지, 팔자가 좋다 싶다.



어느새 완충된 핸드폰을 보면 나가고 싶어서 온몸이 근질거렸다. 아침엔 일어날 때마다 삭신이 얻어맞은 듯 쑤시는데 여기 앉아있으면 다시 컨디션이 살아나니 이러나저러나 도서관이 복지였다. 마음이 쫓기는 와중에도 올해는 종종 감히 독서라는 호사를 누렸다. 종종 노트북을 켜둔채 잠깐 서가를 기웃거리다가 검색해둔 청구기호 옆칸에서 제목에 이끌려 한권을 더 집어버리고 그자리에서 몇장을 넘겼다. 시험기간에는 교과서빼고 다 재밌다던데, 대출해둔 바카라도 다 못읽고 판을 벌리는 ADHD 독서법으로 결국 한권 더 대출했다. 노트북실의 열정을 벗어나 좁은 바카라장사이 틈으로 도망쳤다 나오면 쨍해진 11시반의 햇살이 적응이 되질 않았다. 모자에 선글라스까지 겹쳐썼다.




정신을 차리려면 배달앱을 켜야했다. 지도위 말풍선으로 띄운 단가와 주문량을 보면 늘 같은 3,000원에 오렌지색 “많음” 단계 인데도 긴장감이 들었다. 빨간색의 “매우많음”도 아니고, 미션도 없지만 공회전중인 8기통 엔진만큼 다리가 그르릉댔다. 날이 좋은만큼 라이더는 많고 배달주문은 없으니 조건부 보너스인 “미션”은 좋은 날씨에 반비례 했다. 어차피 오지않을 미션에 대한 타개바카라으로 “등급”을 올리기로 했다. 쿠팡을 먼저 타왔으니 쿠팡위주로 쭉 타면 기본값인 프렌즈에서 그린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그 위부터는 거의 전업러의 영역이었다.


플랫폼은 등급을 몇개로 나눠 충성심있는 라이더를 확보하고 물량을 쳐내는듯 했다. 충분한 건수와 높은 완료율(들어온 콜을 수락하고 수행한 비율)을 달성하면 단가를 몇 %씩 더 주는 개념이었다. 하루 10시간씩 일하는 전업라이더들은 꿀콜을 골라타는 효율과 똥콜도 빼주면서 등급을 높이는 선택사이에서 뭐가 유리한지 실시간으로 비교하고 있었다. 논쟁들을 눈팅하다보니 내 상황엔 레벨업도 해봄직해 보였다. 리워드 등급 달성 기준은 단순한 숫자였다. 2주간 120건, 이번주 20건, 배달완료율 50%이상…안될것도 없네. 종종 평가와 유리되던 회사의 MBO며 KPI보다는 적어도 훨씬 직관적이지 않냐고 자문자답했다. 그럼 그린은 대리단건가?




“그래그럼 오늘 쿠팡 쭉 올립니다!”


혼잣말이 는만큼 욕도 늘었다. 수락율을 유지하기위해 두개중 하나는 받으려 했다. 비용측면을 고려할때 플랫폼이 라이더를 개인화해서 관리할리는 없지만 자꾸 내 속이 읽히는 느낌이 들었다. 배달앱 AI는 라이더의 위치, 수락율, 등급, 최근 배달의 연속성같은 활성도를 여러 변수로 두고 우선순위에 따라 배차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물론 플랫폼들은 주문과 배차 방식이 영업비밀일테니 알고리즘을 공개하지는 않고요. 정해진 룰대로 기계가 오더를 내는것 뿐일텐데 묘하게 AI 손바닥안에서 노는 기분이었다. 수락율을 관리하기 위해 시작한 밀당과 수싸움에서 나는 늘 패자였다.


이를테면 이런식이다. 먼저 짜디짠 단가의 2건 짜리 멀티배차가 들어온다.

“어휴 이건 양심도 없냐.”


거절을 누르고 몇 초 뒤, 더 멀고 다음 콜이 붙지 않는 외곽지역의 배달지로 콜이 들어왔다. 이런걸 유배지라 부른다, 그럼 또 거절을 누른다

“아이 시끼정말.”

그리곤 감감무소식. 쿠팡 본사는 요 옆 잠실인데 콜이 저기 함흥에서 들어오나 착각할 정도로 침묵이 흘렀다. 이쯤되면 소위 후달리는 쪽은 당연히 나다. 라이더는 일없는 길위의 시간이 휴식이 아니라 손실이었다. 그리고 몇십초일까 1분일까 알수없는 찰나와 영겁사이의 단절이후 콜이 들어왔다. 애매한 거리와 애매한 단가였다. 앱은 묻는다.


??? : 쫄리면…?


단말마에 가까운 욕을 뱉으며 수락을 눌렀다.




언어생활이 많이 망가지는 대신 훈장으로 그린라벨을 달았다. 태권도장에서 처음 노란띠를 감았던 2학년때 처럼 들떴다. 미션없는 비수기를 전략적으로 방어해낸 내 인내에 박수를 치며 건당 7% 더 붙는 “리워드”에 잠시 취했다. 대략 건당 200원이니 오늘 20건을 끝낸다면 4,000원이 좀 안되는 추가 수입이었다. 며칠간 쿠팡이츠의 가신이 되어 뽈뽈거리며 돌아다닌 끝에 이건 독이 든 성배라는 결론을 내리고 기꺼이 반역자가 되었다. 2주간 120건 기본 조건은 중간에 배민을 조금 섞어타기만 해도 충족되지 않아서 무등급으로 돌아오는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게 왜 진짜야?”


며칠 뒤 “점심 미션”이 돌아왔다. 이것은 새옹지마도 전화위복도 아니고 사필귀정도 아닌데 어쨌든 호재이긴 했다. 떠도는 루머인줄만 알았던 무등급에게 미션을 준다는 말이 사실인가 싶었다. 가끔 들어온 “깜짝 미션”은 지역부터 체크했다. 갑자기 수급이 꼬일 때 쿠팡이 국지성호우처럼 흩뿌리는 방식이라 좋다고 뛰쳐나가서 3건을 채웠는데 미션성공알림이 오지 않았다. 다시 미션내용을 확인해보니 대상지역은 강남쪽과 송파구1 구역까지로 보험약관마냥 작게 써있었다. 나는 송파구3. 시간은 지나버렸다.


이번에는 피크타임에 해당되는 전국구 “정규미션”이었다. 건수-시간-금액을 확인하니 지금 출발하면 무난히 해낼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배달완료율 50%”라는 조항이 있었다. 10건을 시간내에 완료해야하는 미션이라치면 들어온 20건의 콜중 10개를 해내야 한다는 말이었다. 20건중 거절을 11건하면 실패, 받은 10개중 하나라도 취소하면 실패. 머리를 잘 써야 했다. 콜을 받고 수행하는중엔 ‘안전하게’ ‘오롯이’ 배달할수 있게하는 쿠팡측의 배려로 내 미션 진행상황을 어플 화면에서 볼 수 없었다. 지도를 힐끗 내려보고 신호를 올려보며 머릿속으로 수락율과 건수를 외우다 헷갈리기 시작하면 아주 염불을 외웠다.




“자, 자, 이거 이제 세 건 더 빼야하는데, 지금 네 개 깠으니? 앞으로 반이상은 받자. 해보자.”


풀가동중인 두뇌에 과부하가 걸리지 않도록 쉴새없이 나불대는 입은 일종의 쿨러역할을 했다. 나는 품삯을

파는 입장이지만, 회사시절을 생각하며 콜을 고르는 바이어라고 가정했다.
미션이 들어왔다는 사실 자체가 배달 수요대비 라이더 공급이 부족한 Buyer’s Market이니 오늘은 내가 우위다 라고 믿었다. 이미 해놓은 완료건수와 지금까지의 수락율을 오감에 지친 머리에 상기 시켰다. 시계를 보고 이제부터 콜을 적당히 골라받아도 크게 불리하지 않다, 예상대로 플랫폼은 똥콜을 밀어넣었다. 하나 또 까고 잠시 또 콜락.


‘야씨 너는 내가 뭐라고 이렇게 진심으로 붙는거니.’


15분쯤 남았을때 무난한 콜이 들어왔다. 앱 화면 중앙의 식당이름 너머로 “AlphaGo resigns”라고 써있을 것만 같다. 나의 승리다 라고 자축하며 식당문을 열어제꼈는데 헬멧쓴 아저씨가 세명 서있었다.


“안녕하세요 쿠팡입니.. 아 식당이 터졌네.”


주문이 밀려 조리대기가 길어지는 상황이었다. 앱에 떠있는 조리완료시간은 일분 지났고 14:53 숫자가 계속 점멸중이었다. 배달수요가 터져서 생긴 미션의 본질은 엄밀히는 Seller’s Market인가, 근데 저 셀러는 왜 지금 노예선 바닥에서 채찍 맞아가며 노젓는 표정을 짓고있을까, 주방너머로 불길이 살짝 보일때마다 열기도 전해졌다. 어떤 마켓이든 오늘의 승자는 쿠팡같았다. 내 앞 기사 한명은 봉지를 낚아채서 나갔고 한명은 콜 취소를 눌렀는지 그냥 나갔다. 한명만 더 빼면 내차례, 어쩌면 내콜이 저사람보다 더 빨리 나올수도 있다. 제발, 제발. 자기충족적 예언이 실현되는 자기개발서처럼 진짜 내거 먼저 나왔다. 에스컬레이터를 뛰어올라 배달지로 향했다. 기다리면서 공동현관 비번도 다 외워뒀다. 막힘없이 누르고 들어가며 헬멧위로 빨간 로마기병대 크레스트(Crest)가 솟아날 기세로 ‘왔노라. 보았노라.’ 생각했는데, 엘리베이터 두대 다 이제 막 2층으로 3층으로 올라가는 숫자만 보였다. 그보다 이미 시간이 지났다. 미션 마감인 59분에서 넘어간 시계는 정각을 띄웠다.

‘졌노라.’

엘리베이터에 가방을 내려다놓고 AI가 기깔나게 만든 증권사 광고나 구경했다. 광고판에서 람보르기니가 반도체로 만든 고가도로 타고 달리더니 갑자기 비행기로 변신해서 제트를 분사하며 떡상했다. 천천히 걸어가 문앞에 하얀봉지를 내리고 사진을 찍으니 핸드폰에서 C가 새겨진 로마 금화가 수십개 튀어올랐다.


[미션성공! 19,600원 보너스]


이상해서 배달 커뮤니티를 검색했다. 미션시간이 배달완료시간이 아니라 수락시간 기준임을 이 일 시작한지 몇달만에 알았다. 드디어 “이겼노라.” 하지만 도파민은 마지막 식당에 이미 터트리고 두고왔다.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5월은 공휴일이 많으니 휴원일도 많아 수입이 줄어들 예정이었다. 배민 한두개만 더 탈까했지만 이번엔 다리보다도 심장보다도 뇌가 지쳤다. 내일은 몇 건 덜해도 되겠다는 안도감만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