땡빚 없는 인생이 가진 특유의 무구함
이 동네로 이사 온 계기도 그 친구였다. 서울 서쪽 출신인 형은 첫 집을 가락동에 샀다. 그리고 둔촌동과 길동주변으로 5호선 라인 어딘가를 뒤적이던 내게 가락동도 보러 와보라고 가격이 나쁘지 않다고 했다. 아마 내 기억이 맞다면 그는 Affordable(감당할 만한) 이란 단어를 썼다.
온라인 게임이 여의도인 그가 뜬금없는 송파구 남부로 온 이유는 와이프의 온라인 게임과 처가였다. 형수는 분당으로 출근했고, 처가는 위례신도시였다. 아이를 낳으면서는 가락동을 세를 주고 장인장모가 계시는 아파트로 세를 얻어 살다가 이번엔 같은 동으로 위례신도시 아파트를 샀다. 남북통일보다 늦게 진행될 것 같던 위례신사선이 다시 예비타당성 조사를 통과하고 현대차 연구소가 복정역 주변에 들어온다면서 위례는 다시 들썩거렸다.
그는 다른 호재보다는 지상으로 다니는 트램에 가장 관심있어 보였다. 보거스처럼 입꼬리를 잔뜩 끌어올리며 소년미가 묻어날 정도로 신나하며 트램 길을 보여줬다. 그는 돈냄새나는 재테크에는 문외한인 것처럼 고고하고 당위로만 세상을 설명하는 성향이 있었지만 늘 적기에 나보다 앞서 따닥따닥 액션을 취했다. 이번에는 가락동 구축 세입자가 누수 같은 컴플레인으로 달달 볶았단다. 불편해서 그 집을 팔아야 하나 했는데, 마침 처가 아래층에 매물이 나왔다고 했다. 그냥 살다보니 결정하게 되는 그런 상황들.
대단한 금수저도 아닌 그냥 맞벌이 부부같지만 그는 늘 행동에 여유가 있었다. 대개의 온라인 게임인들이 돈돈거리는 이야기를 점심시간에 토픽 삼는 와중에도 그는 즐거운 여행지나, 최근에 본 좋은 영화 같은 이야기가 주 관심사였다. 나는 그 이유를 주담대로 지목하고 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자기앞의 대출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서부터 그는 내맘속 은수저 탑티어로 인식되었다. 어쩌다보니 부모님이 그의 명의로 준비해 두신 강서구 집이 재건축이 되면서 신입사원 무렵 그 동네 대장단지가 되었고, 몇년 뒤 그 집을 시드머니 삼아 팔고 가락동 구축을 매수했다. 묵직한 떡잎에서 온 양분이 이사를 갈 때마다 스노우볼 효과를 냈다.
점심약속을 잡을때면 좁은 슬롯인 회사 구내식당이 불편해 나가서 먹자는 그와 여의도 외식물가에 벌벌 떨며 짬밥을 먹자는 나는 늘상 아웅다웅했다. 종국엔 그가 밥을 산다고 하고 내가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는 형국이었다. 표표히 걸어가는 도령과 옆에서 쫑알대는 몸종 컨셉이랄까, 그는 마치 군자의 도리 같은 이야기를 하고 나는 옆에서 거친 비속어와 시정잡배들같은 사내 뒷담화를 맡고 있었다. 나는 종종 그에게 지금 하락장이 형이 강남으로 갈아탈 마지막 기회라고, 강남의 가장 변두리와 애매한 연식과 용적률의 구축이라도 잡으라고 닦달했다. 당시 그의 집 매도호가에 주담대를 풀로 당기면 살 수 있는 아파트를 지도앱을 열어서 보여주거나 호갱노노 후기 링크를 보내기도 했다. 그럴때마다 그는 사람좋은 웃음으로 넘어갔다.
우리가족이 이동네로 이사 온 해, 형네 부부는 우리를 초대해 근사한 식당에서 양고기를 사줬다. 동네의 맛집들을 소개해주며 와인을 따르는 무구한 얼굴들을 보며 나는 생에 가장 큰 부러움에 사로잡혔다. 그렇다면 오래 풍화되고 압착된 지층같은 내 구김살은 어디로부터 왔으며 어떤 열과 오랜 세월의 힘으로도 펼 수 없단 말인가.
작년 말엔 이사를 앞두고 그가 조심스레 물었다. 식기세척기와 화장대를 내놓을 텐데 혹시 쓰겠냐는 물음에 아내에게 사진을 보내고 빠른 컨펌. 결혼 10년차에 드디어 아내 손에 물 안묻힌다고 너스레를 떨면서 가사를 크게 줄여줘 “3대 이모님”이라 불린다는 스탠드형 식세기를 받아왔다. 중간급 브랜드의 원목 화장대는 커다란 거울이 달려서 우리 부부가 앞에 서면 한눈에 반신샷이 들어왔다. 그의 아파트 B2 장애인칸에 비상등을 켠 채 주차했다. 카시트를 떼고 뒷자리를 꽉 채워 가구를 넣고 트렁크에 식세기를 넣었다. 6인용인가 스탠드형인 소형 식세기는 생각보다 너무 무거워서 허리디스크가 밀릴 뻔했다. 그럼 이번에 빌트인으로 넣는다는 건 얼마나 큰거지. 1.5km 거리의 우리집으로 와 형과 나의 네 손을 부들거리며 옮겼다. 이번엔 우리집 지상 소방차 칸에 비상등을 켜둔채 낑낑거렸다. 지하주차장에 엘리베이터 연결되는 집이 이렇게 부러울줄이야. 좋은 물건 줘서 고맙다는 우리와 받아줘서 고맙다는 그들이 어떤 의미의 “이웃사촌”이 된 기분이 들면서도, 내 구김살 단층대에 안쪽에선 그와 내가 쩌억 갈라지는 중이었다.
5월에는 그의 새 집 집들이에 초대받았다. 드디어 인테리어 하자 수리를 마쳤다고 했다. 그에게는 요즘 핫한 부동산도 트렌디한 인테리어도 사실 에너지를 갉아먹는 종류의 주제였다. 엄청난 숙제를 끝낸 그의 표정에서 홀가분함이 전해졌다. 우리집 부엌보다 큰 서재에는 재택근무를 자주 하는 형수님을 위한 사무공간이 어두운 색으로 맞춘 나무와 달걀처럼 생긴 푹신한 의자로 완성되어 있었다. 취향을 담는 일도 내겐 왜 사치였을까. 한쪽 벽을 채운 바카라장에는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가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어 눈에 띄었다. 바카라으로 벽을 채워둔 집에 가면 늘 그들의 교양보다 교양을 선택할 수 있는 공간이 더 탐났는데, 칠천인가 들었다는 인테리어를 주도한 형수님의 이 집에 오래 머물겠다는 의지가 전해졌다.
손 큰 부부는 상다리 부러지게 음식을 준비했다. 어린날 기억 속 할머니집의 스텐식기에 담긴 고봉밥과 푸성귀를 연상케 하는 두툼하고 묵직한 다이닝이었다. 우리는 세살배기 그 집 아들에게 줄 티셔츠와 수박을 샀다. 온라인으로 주문한 티셔츠는 비닐포장 안에 가격표가 붙어있어서 떼고 싶었고, 수박은 집앞 깔세 과일가게에서 사서 비닐끈을 얽어 만든 그물망에 담겨있어 포장을 바꾸고 싶었다. 선물을 건네며 짐짓 짜침들은 맘속에 가두어두고, 아내는 집이 멋지다고 마감재의 무늬 같은 인테리어 포인트들을 칭찬했다.
아이들은 큰 터울에도 잘 어울려 놀았다. 아내들은 뉴질랜드 말보로 쇼비뇽 블랑을 마시고, 남편들은 제로 소다를 마셨다. 진출입이 가장 난관이라는 주말 코스트코에서 온 고기와 회는 신선하고 처음 보는 간식들의 포장단위는 모두 커다랬다. 형은 음식을 더 권했다. 십수 년도 전에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가 “더 무라.”라고 하는듯한 표정이었다. 떠들다 보니 해가 넘어가 거실창으로 검푸른 하늘과 넓은 색온도 스펙트럼을 가진 집들의 조명이 눈에 들어왔다. 형수님은 뻥뷰가 아님을 다소간 머쓱해했지만, 시티뷰도 지금 프레임 속에선 그저 아름다웠다.
그도 몇년전 하락장에서 20억 아래로 밀렸던 재건축단지인 올림픽훼밀리나 신축 대단지인 헬리오시티를 생각하다 놓친 적이 있다고 했다. 아쉽지 않냐고 물었을 때 그는 안경너머로 또 웃었던 것 같다. 집안 어른들과의 심도 깊은 대화 끝에 부부는 아파트에 몰빵하는 삶보다 가족과 가까이 살면서 조금 더 여유로운 매일의 생활을 택했다. 얼마나 비싸야 똘똘한 한채인지 숫자가 와닿지 않는 시대에 누군가는 갈아타기를 통한 이동만 꿈꾸고, 첫 단추도 못 채운 사람들은 어딘가에서 텐베거를 찾아 헤맸다.
내가 주담대를 갚는동안 그는 이미 매그니피센트 7 주식을 꽤 모아두었다. 강남영끌을 주입하던 내 떠벌거림이 그에겐 어떤 소음이었을까. 이게 답이라고 이래라저래라 하는 세상에서 방향성을 스스로 정했다는 사실 자체가 양반과 상놈의 토대차이처럼 보였다. 하지만 물적토대 또한 얼마나 무구한가, 이번에 그가 처음으로 일으켰다는 주담대가 몇억인지는 여전히 궁금했고, 앞으로도 물어볼 수 없었다. 그건 너무 짜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