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에게 던진 명분 뒤에 숨긴 절박한 현금흐름
휴직계를 올리고 처음으로 한 일은 수영장 환불이었다. 1년 치를 무이자할부 5개월로 결제해 뒀는데, 환불에서 빠진 금액이 수십만 원이었다. 한 달 전 특가로 1년 연장을 했던 거라 취소할 땐 정상가만큼 차감한다나 뭐라나. 그보다 큰 규모의 계약을 많이 해봤지만 정작 내 일에서 발생할 계약취소의 리스크는 신경도 쓰지 않은 셈이었다. 연말정산을 위해 고정지출도 아내 카드로 다 옮겼다. 그동안 나에게 소비를 몰아주기 했는데 이제는 소득이 없으니 반대로 다 돌렸다. GPT에 물어가며 최적화를 한다는 명목하에 AI와 이런저런 썰을 풀었다. 주담대 우대금리를 위한 최소의 카드실적만 내 카드로 몰고 나머지는 아내카드로. 신용카드/체크카드 사용비중 같은 디테일까지 들어가다 보니 문득 이게 다 뭐하는 짓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절세도 좋지만 몇천원 카드혜택과 소득공제사이에서 유불리에 파고들면서 계산을 돌리는 내가 한없이 저부가가치의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소비를 줄이는 게 우선이었다. 지출분석을 하다 보니 딱히 뭘 쓰고 살지도 않았다 생각했지만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다 쓰고 산 것들이었다. 변동비 줄이기는 악으로 깡으로 하는 영역이라면 고정비는 기회비용이었다. 이걸 하지 않으면 더 많은 돈을 잃는다는 의미의 기회비용. 주담대가 가장 큰 비중이었다. 서울 영끌 3040이라고 기사에서 매일 다루는 그 케이스가 바로 우리집 말하는 거구나. 집이 작아서 끌어당길 영혼이 이 정도 크기임을 다행이라 여겨야 하나, 빚투하는 생활을 멈출 순 없었다. 물에 빠진 상황이라고 가정하면 소비단식은 “잎새 뜨기” 같은 가만히 멈춰서 버티는 소극적인 생존법이었고, 부동산을 포함한 모든 투자는 적극적인 입영(立泳)이었다. 언젠가부터 내 생각 속 세상은 크고 어두운 바다였고, 계속 손발을 부지런히 내젓지 않으면 가라앉는 곳이었다. 영원한 중력에 맞서 발을 딛는 계단이 필요했다. 문제는 언젠가부터 그게 운동기구 천국의 계단(Step mill)과 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는 점. 어딘지도 모를 위로 올라가고 싶었는데 한번 발목을 접질렸더니 자유낙하하는 기분이 썩 유쾌하진 않았다.
휴직중에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육아를 위해 한 육아휴직이니 딴 일을 벌이는 건 원칙적으로 안되니까. 아이를 9시 전에 등원시키고 유치원에서 바로 도서관으로 향했다. 텀블러에 카누를 한 봉지 꽂아서 하루를 시작했다. 습관적으로 내려먹던 사무실의 커피머신이 아쉬운 순간이 아침마다 찾아왔다. 커피도 연봉포함인가. 신혼집 전세를 보러 갔던 노량진의 부동산 아주머니에게 들은 말이 생각났다. 매매가랑 전세가가 붙었으니 93년 준공 17평을 사라고 푸시하던 그분은 일단 사면 스타벅스 먹을 거 이디야먹고, 이디야 먹을 거 맥심먹으면서 살 수 있다 했다. 지난주엔 마트에서 2만 얼마짜리 카누 60개들이 실속팩 하나 담다가 멈칫했다. 뭐라도 해야만 한다는 감각이 선연했다. 육아휴직급여 수령에 문제없는 취업의 기준을 찾았다. 월 150 이하의 일은 흔했지만 주 15시간 이내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코로나19의 여파가 남아있던 5년 전 이맘때 잠깐 해본 적 있는 배달대행 플랫폼을 떠올렸다. 긱(Gig) 노동은 근무시간 바카라정이 모호하기 때문에 짧게 해 볼 수 있었고, 노동을 해도 서류상으론 근로소득이 아닌 사업소득이었다. 금액상한 계산을 굴려보니 대충 맞았다. 그러나 자전거 페달을 굴려가며 150을 버는 게 얼마나 힘든지를 깨닫는 데는 사흘이면 충분했다.
비대면 경제가 급성장한 코로나 시국에는 플랫폼들이 배달"알바"로 큰돈을 쉽게 벌 수 있다는 식의 광고와 바이럴마케팅을 했었던 것 같다. 실제로 급증한 수요에 상응해 올라간 수익에 배달기사들이 수입인증 자랑을 하면서 세간의 관심을 끌기도 했었다. 반응은 두 가지 같았다. 배달기사가 월 천? 어딜감히! 혹은 월 천? 나도해볼까? 나는 후자였다. 당근마켓으로 보온기능이 있는 배달용 백팩을 검색하고 잠실 리센츠아파트에서 중년 남성에게 만원주고 사왔다. 그분의 사정이야 알 수가 없지만 으리으리한 아파트에서 나온 아저씨에게 배달가방을 사는 상황이 나름의 충격이었다. ‘저양반은 저걸 왜’ 샀었을까, ‘자녀의 물건’이었을까, 저 사람 ‘자가일가 전세일까’까지 별 잡스럽고 상스런 궁금증이 머리를 관통했다. 온 세상 사람들이 N잡러가 되어야만 할 것 같은 기분. 아내에게 당시 내밀었던 배달의 명분은 부동산 임장이었다.
“송파구에 있는 모든 아파트를 가볼 거야.”
단지 구성도 보고, 지도로는 안 보이는 입지의 디테일도 보고, 재건축진행상황도 다 읽고 오겠다는 포부를 내비치며 똘똘한 한 채로 갈아탈 거란 청운의 망상속에 젖어 아내를 설득했다. 실제로 열심히 돌아다니면서 대부분의 아파트를 가보긴 했다. 그러다가 겨울밤 노면의 블랙아이스를 발견하지 못하고 등짝에 우동을 맨 채로 대차게 구른 밤, 피를 철철 흘리며 집에 들어간 이후로 금지당했었던 일이었다.
이번엔 생계형 소일거리의 흔한 명분인 “운동 삼아”를 들이밀었다. 안전에 대한 두 가지 조건으로 주간에만, 그리고 자전거도로만 살살 다니겠다고 아내를 설득하며 “놀면 뭐 하니?”라는 클리셰 멘트를 얹었다. 아내는 탐탁지 않아 했지만, 내 안달난 얼굴을 읽었는지 조건부로 동의했다.
“돈 벌 생각이면 하지 말고 운동한다 생각할 정도로만 해.”
실제론 돈이 필요했다. 반토막난 수입이지만 아내의 소득으로 생활은 가능했다. 남들보다 상대적으로 작은 원리금과 양가 어른들께 보내드릴 적은 돈을 제하고 생활비를 극단적으로 줄이면 마이너스는 아니었다. 초반 3개월은 육아휴직급여도 제법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몹시도 절박하게 내 계좌를 뭐라도 메워야만 했다. 저축이든 투자든 티끌만 한 돈이라도 없으면 그 이상의 기회를 놓칠 거라는 두려움과 강박이 다시 배달일을 시작해 보는 상황에 묘한 설렘까지 줄 정도로 억셌다. 매일 메일로 오는 불합격 안내와 성에 차지 않는 채용공고 사이에서 배달가방은 실체 있는 경제활동의 상징이었다. 보일러실 구석에 처박아둔 가방을 꺼내 벅벅 닦고, 네온 그린색 반사테이프를 덕지덕지 발랐다.
점피라 불리는 점심피크시간대에 두세시간정도 열심히 동네를 돌자고 쿠팡이츠 배달파트너앱을 다시 깔았다. 꼴에 경력자라 그런지 일을 재개하는 데는 복잡한 절차가 없었다. 쿠팡의 개인정보유출사건으로 인한 탈팡과 불매 운동이 거의 사그라들고 있었다. 온라인은 시끌한데 매출은 리바운드. 쿠팡으로 로켓배송 한번 시켜본 적이 없었는데 쿠팡에게서 일감을 다시 받으며 “내가 쿠팡에게 이겼다!”라고 공염불처럼 정신승리를 했다. 1월 중순, 몇 겹의 옷을 껴입고 가열차게 거리로 나섰다. 많이들 인용하는 타이슨의 명언같이, 누구나처럼 나도 계획이 있었다. 쳐맞기 전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