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복 의식

라이더에서 '다정한 아빠'로 돌아가는 30분간의 연극

by플랑시


작은 블럭형 주거지에서 유일한 아파트 놀이터는 동네 어린이들의 허브역할을 했다. 정문 건너편의 어린이집과 큰길 너머의 유치원 아이들이 한데 모여 놀이기구 주변을 자전거로, 킥보드로, 그리고 두 발로 뱅글뱅글 지치지도 않고 달렸다. 준공 30년차 정도의 아파트는 건물의 방향과 수목덕택에 여름철의 긴 오후엔 그늘을 만들어주었지만, 겨울엔 반대로 그늘 때문에 가장 냉골이었다. 101동과 102동 사이의 좁은 길과 쪽문은 버스정류장이 있는 사거리로부터 300m x 300m 정도 되는 네모반듯한 주소지들을 이어주는 지역민이 다같이 쓰는 통로면서, 여의도의 빌딩풍을 연상시키는 바람골이기도 했다.



매일 7시50분에 엄마손에 이끌려 졸린 눈으로 등원하던 아들은 아빠와 준비하는 게 신기한지 “왜 아빠랑 유치원 가는 거야?”라고 물었다. 어물어물 우물쭈물 대충 답을 했는데 그게 7살 아이에게도 납득이 안됐는지 같은 질문을 아침마다 했다.


“아빠는 너랑 더 많이 놀고 싶어서 올해 한 해 동안 회사를 안 가기로 했어. 그래서 하원할 때도 할아버지 안오시고 아빠가 오는 거야. 우리 맨날 재밌게 놀자.”


아이는 해사한 웃음과 개구진 표정 사이의 어딘가로 비언어적 답변을 보냈다. 곰곰이 고민했던 내 나름의 감동멘트로 혼자서 찡한지도 며칠, 8시 50분까지를 목표로 했던 한 시간 여유로워진 등원도 아이에겐 다시 버거워졌다. 나름의 타임라인을 세워서 아침을 먹이고, 옷장을 엎어치듯 뒤적여 옷을 입히고 (내가 계절감이나 색조합을 엉망으로 입히면서 아내가 전날 꺼내두기 시작했다.) 양치 선크림 준비물 파이널체크를 했지만 각 단계별로 조금씩 늘어졌다. 아침마다 아이를 닦달하며 데려가서는 유치원 선생님들께는 괜히 목소리를 깔고 젠틀한 척 인사를 드렸다. 한 번씩 연차를 쓰고 하원을 담당하면 괜히 좋은 아빠가 된 기분인데, 매일 아침 모자를 눌러쓰고 등원을 하니 뭔가 모자란 아빠가 된듯한 부끄러움이 밀려들어 종종걸음으로 유치원을 나왔다. 근처 도서관으로 후다닥 가면 8시 58분. 하나같이 백팩을 메고 커다란 텀블러를 든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줄을 서서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9시 땡 하고 직원들이 북카트를 밀고 나오면 손님들은 일사불란하게 열람실 좌석을 발급하고 각각의 자리로 흩어졌다. 나도 금방 적응했는지 착착 9시에 이 루틴을 시작하면서 괜찮은 사람이 된 기분이 들었다. 노트북을 켜고 크롬에 링크드인/리멤버/원티드/잡코리아/사람인을 띄워두고 Alt+Tab을 눌러가며 샅샅이 뒤졌다. 영화 [어쩔수가없다] 대사를 속으로 되뇌었다. 해고된 유만수(이병헌 역)의 대사는 “나는 3개월 안에 재취업에 성공한다.”였다. 자의는 아니었지만 자발적 유사실업상태인 나는 “나는 3개월 안에 이직에 성공한다.” 가 모토였다.



낚싯대를 가득 드리워놓고 라면을 끓이러 가는 낚시꾼처럼 명확한 의도를 알 수 없는 지원서를 몇 개 밀어 넣고 짐을 싸서 도서관을 나왔다. 꼭 가고싶은 회사라면 아니지만, 잘 몰라도 일단 이름값있다 싶으면 써본 게 대부분이었다. 꾹 참고 배달파트너앱을 열지않고 있었다. 앱 화면에 동네별로 표시되는 콜 많음 정도가 궁금했다. 앱에 접속해 있으면 미션을 안 넣어준다는 말 때문에 참았다. 카더라가 맞는지 열한 시쯤 미션알림이 띠링 들어왔다. '몇 시부터 두시간동안 11건 달성시 19,200원.' 이런식이었다. 기본급과 성과급이 나눠져 있듯이 플랫폼은 낮은 기본단가를 유지하면서 미션이라는 당근으로 라이더 수급을 기민하게 조절했다. 건당 약 1천~2천 원이 늘어나는 효과에 파블로프의 개마냥 군침이 가득 도는 게 플랫폼을 욕하면서도 길들여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스물한 살 이등병시절부터 환복은 빠르다고 자부했다. 만취한 밤의 흔적 비슷하게 옷을 훌렁훌렁 벗고 운동복서랍을 열어 막힘없이 꺼냈다. 겨울용 자전거 기모쫄쫄이에 고기능성 망사 상의이너를 입고 그위로 쫄바지의 부담감을 감춰줄 트레이닝복 바지를 덧입고 플리스도 껴입었다, 마지막으로 땀이나도 보온성이 유지되는 인조충전재의 패딩을 걸치고 바라클라바까지 쓰면 오분 컷.인데 시커먼 옷에 얼굴을 가리니 냉전 이후 헐리웃 영화에 나오는 단역 테러리스트 같은 모습이긴 했다.



오후 세시반, 추위에 손발과 핸드폰이 한계까지 다다를 즈음 점심 피크타임도 끝나 콜이 줄어들면서 퇴근이었다. 집은 지대가 높아서 어디서 돌아와도 오르막이라 어깨와 헬멧 위로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15층 어머님이 태호(6세, 영어유치원)의 하원차량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내가 이쁘다고 말했던 페트레이 패딩의 높은 목깃에 얼굴을 반쯤 감추고, 볼캡으로 긴 머리를 덮은 모습. 하마터면 인사를 할 뻔했다.


아이는 나와 달리 놀이터 인싸였다. 아이의 붙임성 덕분에 외향성이 모자란 나도 비슷한 또래 자녀를 키운다는 공통분모하나로 어머님/할머님들 모임에 반발쯤 걸칠 수 있었다. 한 살 동생인 태호는 아들을 잘 따랐다. 놀이터에서 같이 노는 두어 시간 동안 형을 서른두 번은 불렀다. 추위가 기승을 부릴땐 놀이터에서 놀다가 아이가15층 태호네에 가끔 놀러 가기도 했었다. 이사온지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이웃들과 인사를 하고 말을 트는 것도 신기했는데 방문까지 하다니 마치 90년대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게다가 30여 분간 내 시간이 생기는건 덤. 저녁을 준비하고 잠깐 드러누웠다가 빈손으로 가기 미안해서 작은 과일을 한팩 사서 15층으로 올라가곤 했다.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호출하고 동네 부동산 광고가 하단에 달린 거울로 얼굴을 봤다. 아침에 면도를 안 했었구나, 콧물인지 콧김인지 모를 액체가 수염에 고드름처럼 얼어붙어 있었다. 불콰한 낯빛이 낮술 한잔 걸친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내려오던 엘리베이터가 8층에 멈춰있었다. 8층의 상원이(8세, 초등학생)는 아이가 좋아하는 형이었다. 늘 마스크를 쓰는 상원이 엄마는 거기다 더한 모자와 안경 때문에 얼굴은 잘 알아보기 어려웠지만 가장 먼저 놀이터에서 안면을 튼 어머님이었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고 문이 열리기까지 멍때리다가 아차! 하면서 얼른 버프를 끌어올렸다. 그리고 살짝 후측면으로 한 스텝 이동. 오늘도 바버자켓을 입고 마스크를 쓴 상원이엄마는 아이를 데리러 가는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아무도 나를 신경쓰지 않는데 혼자 생쑈를 하고 있었으려나, 은엄폐가 아직은 잘 되고 있었다.



가방 속 치킨냄새를 빼기 위해 배달가방을 현관에 아무렇게나 열어두고 샤워를 했다. 이사올 때 새 보일러를 돈백주고 바꾼건데 왜 온수가 이렇게 안 나오는지 화가 치밀었다. 샤워기를 틀어둔 채 부엌으로 나와 냄비에 물을 부었다. 찬 공기에 절여둔 얼굴이나 손은 미지근한 물에도 뜨거운 물이 닿은 듯 화끈거렸다. 손은 뜨거운데 몸은 추운 부조화라 다리가 덜덜 떨렸다. 궁여지바카라으로 욕조에 쪼그려 앉아 한동안 물을 끼얹으면 체온이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당장의 추위를 극복하니 미뤄뒀던 배고픔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냄비째로 라면을 불어먹으니 뜨끈한 뱃속의 충만감에 일시적으로나마 취했다. 시계는 네시를 향해 느릿느릿하지만 선명히 꾸준하게 나아가고 있었다. 현미반 백미반으로 쌀을 씻어 밥솥에 넣고 최소한으로 맞추려 애쓴 분량의 설거지를 해치웠다. 시간확인 후 옷을 정성껏 골랐다. 매일 아침 “회사용 교복”인 옷으로 대충 주워 입고 나갈 때보다 훨씬 신중하게, 머리도 빗고 톤업 선크림도 바르고 유치원으로 달려갔다.




아이는 숨바꼭질하듯 살금살금 계단을 내려오며 나를 찾았고, 그러면 나도 문틈 뒤로 숨은 척 화답했다. 과장된 몸짓으로 아이와 인사하고 나서는 이내 뻘쭘해져서 선생님께는 각 잡히게 정중한 인사를 건넸다. 쪽문을 지나 아파트로 돌아오면 아이는 가방을 내손에 넘기고 태호와 상원이를 목청껏 부르며 놀이터로 달려갔다. 30분 전 몰래 지나친 엄마들에게 쾌활하지만 경박하지 않은 톤을 유지하려고 애를 쓰며 인사를 건넸다. 놀이터는 연극의 무대였고 그녀들은 상대 역이라기보단 관객에 가까웠다. 아들은 친구들과 함께 도도도 잔발로 달려와서는 괴물놀이를 해달라고 졸라댔다. 추위에 상기된 아이들의 얼굴과 눈망울을 내려다보며 과장된 몸짓으로 양팔을 위로 들고 “괴물이다! 도망가!” 하고 발을 굴렀다. 골바람 사이로 아이들의 비명소리가 흩어졌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30분 동안 순서대로 모든 과업을 마친 상상속의 새로운 나에게 도취된 채 방백을 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어우 날씨가 너무 춥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