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운 사람
사람은 누구나 타인에게 보여주고 싶은 모습이 있다.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고, 괜찮은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으며, 자신의 부족함이나 부끄러운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을 수도 있다.
그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문제는 그 마음이 지나칠 정도로 깊이 자리 잡았을 때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 내 삶에 특별한 관심조차 없는 사람들에게까지 자신의 모습을 포장한다.
어떤 이들은 두 번 다시 만나지 않을 수도 있는 사람에게 자신의 부족함을 들키지 않고, 완벽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하며, 그들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평가할지 지나치게 의식하며 행동한다.
정작 그 사람들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깊이 알려고 하지 않을 수도 있고, 내가 가진 부족함에 관심조차 없을 수 있다.
그런데도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두려워한다.
왜일까.
어쩌면 실제로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이 타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그래서 타인의 눈에는 자신의 부족한 모습이 아닌, 조금 더 나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닐까.
타인에게 어떻게 보이는지가 자신의 가치처럼 느껴지고, 좋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잃는 것이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래서 자신의 약한 모습이나 부족한 모습을 철저히 감춘다.
밖에서는 최대한 좋은 모습을 보여주려고 한다.
친절하고, 다정하고, 배려심 있고, 바카라임감 있는 사람처럼 보이려고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모습을 지키기 위해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는 다른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문제는 타인의 시선이 지나치게 중요해져 자신의 진짜 모습을 철저히 숨기고, 그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상처를 줄 때 시작된다.
어느 부부를 생각해 보자.
한 배우자는 집에서는 무심하다.
배우자의 말에 관심을 보이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사람에게 필요한 배려에도 무덤덤하다.
그런데 밖으로 나가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배우자를 세심하게 챙기고, 다정하게 말을 건네며, 가정에서도 자신은 자상한 배우자로 생활하고 있는 듯한 모습을 연출한다.
아마도 자신이 무심한 배우자라는 사실을 타인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것일 것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실제로 어떤 배우자로 살아가고 있는가 보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어떤 배우자로 보이는가인지도 모른다.
이런 모습을 반복해서 경험하는 상대 배우자는 단순히 서운한 것만이 아니다.
모멸감을 느낄 수 있다.
‘저 사람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나에게 저렇게 잘하는 것처럼 행동하면서, 왜 정작 내 앞에서는 이렇게 무심하게 나를 대하는 걸까?’
‘사람들에게 좋은 배우자로 보이는 것은 중요하면서, 정작 상대 배우자는 어떻게 느끼는지는 중요하지 않은 것일까?’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마음속에 더 깊은 상처가 남는다.
‘나는 그래도 되는 사람이구나.’
사람은 가까운 사람에게 반복적으로 무시당하고 소홀히 대우받으면 자신의 가치까지 의심하게 될 수 있다.
특히 상대가 타인에게는 충분히 다정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때 그 상처는 더욱 커진다.
잘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만 함부로 대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밖에서는 좋은 사람이어야 하지만 집에서는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가까운 사람이라는 이유로 함부로 대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는 자신의 모습을 숨기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더 솔직할 수는 있지만, 그 솔직함이 무례함이나 무관심을 의미해서는 안 된다.
편안함과 함부로 대하는 것은 다르다.
가까움과 무례함도 다르다.
집에서는 본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하지만, 본모습을 보여준다는 이유로 상대의 존엄까지 훼손해서는 안 된다.
보통 가까운 사람에게 이런 행동을 당하면 한 번쯤은 이해하고 넘어가기도 한다.
‘우리는 가까운 사이니까 내가 이해해야지.’
‘가족이니까 이 정도는 넘어갈 수 있지.’
가까운 사이이기 때문에 서로의 부족한 모습을 이해하고 받아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반복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처음에는 내가 이해해 준 일이 어느 순간부터 상대에게는 나를 그렇게 대해도 되는 일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는 상대에게 그래도 되는 사람이 되어버릴 수 있다.
상대가 나를 함부로 대하는 것을 내가 이해해 주는 것과, 상대가 나를 함부로 대해도 되는 사람으로 여기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가까운 관계일수록 더 많이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그 이해가 상대의 무례함을 계속 허용하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
더욱이 타인의 시선 때문에 자신의 진짜 모습을 숨기고, 그 감정과 불편함을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쏟아내는 것은 건강한 관계라고 보기 어렵다.
타인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가까운 사람을 희생시키는 순간, 그 사람은 자신의 이미지를 지키는 대신 가장 가까운 사람의 신뢰를 잃게 된다.
사람의 진짜 모습은 타인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타인이 보지 않는 곳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가에서 드러난다.
낯선 사람에게 친절한 것은 슬롯적인 예의일 수 있다.
하지만 자신에게 편하고 가까운 사람에게도 존중과 배려를 잃지 않는 것은 그 사람의 인격에 가깝다.
타인의 칭찬을 받기 위해 좋은 사람의 모습을 연기할 수는 있다.
그러나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남겨진 상처까지 타인에게 좋은 사람의 모습으로 지울 수는 없다.
결국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가 아니라, ‘나와 가장 가까이 살아가는 사람이 나와 함께 있을 때 어떤 사람으로 느끼는가 ‘이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자상한 사람으로 기억되면서 정작 자신의 곁에 있는 사람에게는 외롭고 초라한 감정을 남긴다면, 그 사람의 좋은 이미지는 누구를 위한 것인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특히 이렇게 행동하는 사람은 스스로 자신이 이런 행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자신의 행동을 인식하지 못한다고 해서 상대가 받은 아픔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행동이 상대에게 어떤 상처를 주고 있는지 알게 된 뒤에도 그 행동이 쉽게 고쳐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자신의 행동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느냐가 아니라, 자신의 행동이 가까운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돌아보고 바꾸려는 태도다.
그렇게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타인의 평가에 맡기게 되고, 그 평가를 지키기 위해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자신의 감정과 불편함을 떠넘기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진정한 성숙은 타인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이는 데 있지 않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도 바카라임 있게 자신의 감정을 다루며, 아무도 보지 않는 순간에도 상대의 존엄을 지켜주는 데 있다.
좋은 사람으로 보이는 것보다 좋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어렵다.
그리고 그 차이는 언제나 가장 가까운 사람이 먼저 알아본다.
타인의 시선은 멀리서 나를 바라보지만, 가까운 사람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매일 경험한다.
그러므로 사람을 볼 때 그가 세상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보이는지만 볼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어떤 사람이 되어주는지를 보아야 한다.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은 결국 자신의 삶의 평가 기준을 타인에게 넘겨주게 된다.
그러니 내 곁에는 타인의 평가를 삶의 기준으로 삼지 않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을 두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