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오늘의 민주주의를 지키는 일
기억은 오늘의 민주주의를 지키는 일
오월이 오면 바람에도 기억이 실려 오는 것 같습니다.
꽃은 피고 계절은 환해지지만, 어떤 이름들은 여전히 마음 한가운데에서 조용히 울립니다.
1980년 5월의 광주는 한 도시의 비극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국가 권력이 시민의 생명과 존엄을 짓밟을 때 민주주의가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보여 준 역사였습니다. 동시에 벼랑 끝에 몰린 시민들이 서로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눈부신 공동체를 만들어 낼 수 있는지를 보여 준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그날을 오늘 ‘5·18 민주화운동’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그 일곱 글자 안에는 아직 다 말하지 못한 울음이 있습니다.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평생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다 목이 쉰 가족들,
침묵을 강요당한 시민들,
그리고 거짓의 시간을 견디며 진실을 놓지 않았던 사람들의 세월이 그 안에 들어 있습니다.
광주는 과거에 끝난 사건이 아닙니다.
광주는 오늘도 우리에게 묻습니다.
국가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권력은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가?
시민은 이웃의 고통 앞에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조사 기준에 따라 피해 규모의 집계는 다르게 제시되어 왔지만,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와 인근 지역에서 희생된 민간인 사망자를 166명으로 확인했고, 행방불명과 부상 피해 역시 국가 바카라임의 문제로 다시 짚었습니다. 숫자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숫자만으로는 한 사람의 생을 다 말할 수 없습니다. 한 명의 죽음 뒤에는 한 가정의 무너짐이 있고, 한 명의 행방불명 뒤에는 평생 기다림으로 늙어 간 가족의 시간이 있습니다.
비극의 시작을 이해하려면 조금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1979년 10월, 오랜 독재의 시대가 갑작스럽게 끝났을 때 사람들은 민주주의의 봄을 기대했습니다. 학생들은 자유를 외쳤고, 시민들은 감시와 억압이 사라진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우리는 그 짧고 뜨거웠던 시간을 ‘서울의 봄’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봄은 너무 일찍 꺾였습니다.
1979년 12월 12일, 신군부 세력은 군사반란으로 군권을 장악했습니다. 그리고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은 전국으로 확대되었습니다. 국회는 무력 앞에 멈추었고, 정치인과 학생들은 끌려갔으며, 민주주의를 향한 목소리는 다시 ‘혼란’과 ‘불온’이라는 이름으로 억눌렸습니다.
그때 광주가 침묵하지 않았습니다.
5월 18일 아침,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 선 학생들은 계엄 해제를 요구했습니다. 처음에는 학생들의 시위였습니다. 그러나 계엄군의 폭력은 시민들의 눈앞에서 너무도 잔혹하게 펼쳐졌습니다. 곤봉이 휘둘러지고, 피 흘리는 젊은이들이 쓰러졌습니다. 시민들은 보았습니다. 그것은 질서 유지를 위한 진압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을 꺾기 위한 폭력이었습니다.
폭력은 학생에게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길을 걷던 시민이 맞았고, 말하지 못하고 항변하지 못한 약자도 폭력 앞에 쓰러졌습니다. 그때 광주의 시민들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택시기사들은 다친 시민을 태웠고, 버스 기사들은 거대한 차체로 군의 폭력 앞을 막아섰습니다. 누군가는 부상자를 옮겼고, 누군가는 피 묻은 거리를 지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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