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명하기 어려운 일

by유림

외국인으로 살다 보면 가끔 어려운 일을 겪는다.


더운 여름날, 엑상프로방스 TGV역에서 파리로 돌아가는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후 2시 18분 출발 예정이던 열차는 마르세유에서 발생한 기술적 문제로 연착된다고 했다.

50분 후 출발한다던 계획는 1시간 20분이 되고, 다시 1시간 50분이 되었다.


기차를 그리 자주 타는 것도 아닌데 벌써 몇 번째 연착인지 모르겠다. 처음 겪었을 때는 전광판 앞에서 노심초사하며 계속 시간을 확인했지만, 이제는 적당히 편한 곳을 찾아 앉아 출발 시간이 가까워질 때까지 기다린다.

더 빠른 열차가 있으면 다행이겠지만,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할 테니 그마저도 쉽지 않다.


프랑스의 공공시설에는 에어컨이 없는 곳이 많다. 한여름 한낮에 열차까지 지연되니, 역은 말 그대로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단 한 곳, 빵집에만 에어컨이 있었다.

예상대로 그곳은 조금이라도 시원하게 견디려는 사람들로 만석이었다. 아무도 일어날 기미가 없었다.

그러다 아주 운 좋게 자리가 났다.


밖에서 땀을 흘리며 기다리고 있던 큰아들과 아들 친구에게 시원한 것이라도 먹이고 싶었다. 자리를 잡아놓고 여기로 오라고 전화를 한 뒤 1분 거리에 있는 두 아이를 기다렸다.


그때 뒤에 앉아 있던 한 여자가 갑자기 나에게 영어를 할 줄 아느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하자, 옆에 네댓 살에서 일곱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 서너 명이 앉을 자리를 찾고 있는데 내가 맡아둔 자리를 그 아이들에게 양보하면 어떻겠느냐고 했다.


나는, 내 아이들이 오고 있다고 대답했다.

여자는 알겠다고 했고, 그렇게 끝나는 줄 알았다.


잠시 뒤 열다섯 살인 큰아들과 친구가 들어왔다.

그러자 그 여자가 다시 나를 보며 말했다.


“당신 아이들은 10대인데, 더 어린 아이들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게 어떻겠어요?”

순간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나는 짧게 말했다.

“No.”

그리고 더는 상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기분은 계속 나빴고, 왜 나한테 그런 얘기를 했는지 묻고 싶기도 했다. 그 여자는 본인의 일행들과 뒤에서 무어라 험담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자리를 양보하고 싶다면 본인이 하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왜 하필 나였을까.


무엇보다 자신이 도덕적이고 공정한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희생을 요구하는 태도가 이해되지 않았다.

내가 만만해 보여서였을까.

이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인종차별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금발의 프랑스인이었어도 그 사람은 먼저 자리에 앉은 나에게 제3자를 위해 자리를 내놓으라고 했을까.

잘 모르겠다.


정말 그녀에게 빵집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아이들을 앉히는 것이 중요했다면 다른 사람에게도 부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은 단지 나에게만 두 번 말했을 뿐이다.


그렇다고 이것을 인종차별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이 상황만 놓고 보면 가장 쉬운 설명이긴 하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서울에서 살 때도 나는 여러 종류의 차별을 경험했다.

여자라서,
예쁜 얼굴이 아니라서,
마른 체형이 아니라서.

사람이 차별받는 이유는 놀랄 만큼 다양하다. 때로는 눈에 보이지만, 자주 눈에 보이지 않는 이유가 있었다.


물론 이런 예시를 인종차별 같은 치졸하고, 역사적이고 구조적인 폭력과 같은 선상에 놓을 수는 없다.

다만 한 가지는 비슷하다.


부당한 일을 겪었을 때 우리는 가장 설명하기 쉬운 이유를 찾아 그 일을 이해하려 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 하는 것이 항상 옳을까.

분노할 대상이 명확해지기 때문에, 인종차별이라고 설명하면 차라리 마음은 편하다.


하지만, 나는 아마 영원히 이유를 알지 못할 것이다.

그 여자가 내가 동양 여자라서 그랬는지,
만만해 보여서 그랬는지,
그저 본인이 유난히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었는지 알 길이 없다.


어쩌면 이것이 차별이 가진 가장 비겁한 속성 중 하나인지도 모른다.


차별은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 실제로 겪어보지 않으면 그 결을 정확히 알기 어렵다.


당하는 사람은 온몸으로 어떤 불쾌함을 느낀다. 허나, 공감을 받으려면 맥락과 그때 그 상황을 세세하게 설명해야 할 때가 있다. 이렇게 설명을 하다보면 당한 이에게 자격지심이 있었던 건지, 차별이라고 못박을 수 있는 건지 헷갈릴 때도 있다.


그럼에도 한 가지는 분명했다.

그 순간 내가 “아니”라고 말하고 거기서 멈춘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더 싸우지도 않았고, 내가 왜 이 자리를 지켜도 되는지 길게 설명하지도 않았다.

이유가 인종이었든,
내가 만만해 보여서였든,
그저 그 여자가 무례했든,

사실 크게 중요하지 않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의 의도가 아니라 내 행동이었다.

부당하다고 느낀 순간에 물러서지 않았다는 것.

그것이면 충분했다.


모든 일을 끝까지 설명하려 들지 않아도 괜찮다.

어차피 모든 일의 이유를 알아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있다.

내가 불편하다고 느낀 순간 그 감각을 함부로 무시하지 않는 것.
필요할 때는 짧게 “아니”라고 말하는 것.

그리고 내가 받았던 부당함을 다른 누군가에게 그대로 돌려주지 않는 것.

아이들이 훗날 비슷한 순간을 마주하게 된다면 그렇게 말해주고 싶다.


모든 사람을 설득하지 않아도 되고,
모든 부당함을 증명해낼 필요도 없다고.


이유를 다 알지 못해도,

때로는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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