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 있는 존재,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망은 꽤 기본적인 것이다. 인정 욕구와도 연결되어 있겠지만, 스스로가 난 꽤 괜찮은 사람이야, 라고 만족해야 남에게서 오는 인정까지 노려볼 수 있기에 쓸모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보았다. 쓸모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건 아닌지 말이다.
하나. 쓸모는 지금의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마흔 살에 박사를 시작할 때, 아무도 이 노력이 유용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시작은 했지만, 도대체 뭘 하고 있나 싶어 막막하고 답답했다. 스스로 결정한 일이긴 했지만, 낮은 에너지와 우울한 상태가 지속됐다. 우연히, 결정적 조언을 받았다.
"그래도 네가 하고 있는 그 연구를, 진지하고 순수하게 해봐라. 어차피 이래도 시간은 가고 저래도 간다."
마흔넷, 애 둘 엄마가 박사 막 땄다고 누가 써줄까, 많은 이들이 우려했다. 그런 시선 속에서도, 쓸데없이 순수하게 파고들었던 매일이 쌓여 좋은 저널에 출판이 되었고, 여러 편이 쌓이니 졸업과 동시에 임용이 되었다. 쓰고 있는 것을 학회에서 정기적으로 발표하고 인용 지수가 높아지니 좋은 공저자들이 생겼고, 그렇게 또 다른 좋은 논문들을 준비하면서 살 수 있게 되었다. 현재의 나는 그저 충실히 살면서, 기회가 왔을 때 알아차리고 붙잡는 일을 할 뿐이다.
쓸모는, 지금의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다.
이 원리는 나 자신의 노력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었다. 다른 사람에게 건넨 마음도 마찬가지였다.
20여 년 전, 집안에서 망나니 취급을 받던 사촌오빠가 갑자기 나에게 전화해서 30만 원을 빌려달라고 했다. 예나 지금이나 30만 원이 작은 돈은 아니라서 3초 정도 망설였다. 당시 나는 삼성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야근비도 한도를 다 채워 받을 정도로 오랜 시간 일하던 때였다. 못 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쳐갔고, 그 돈을 메우려면 몇 시간 야근을 더 해야 하는지도 순간 계산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고 돈을 보내주었다.
그리고 20여 년 후. 한국에 잠깐 갔을 때, 깊은 산속에 있는 엄마 납골당에 가고 싶었다. 지난 여름에 렌트카를 몰고 갔다가 결국 못 찾고 빙글빙글 돌기만 하다가 돌아왔었다. 아빠는 잘 아는 동네라서 감으로 간다고 했고, 전화로 아빠의 설명을 아무리 들어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무조건 제대로 도착하고 싶었다. 그 망나니였던 사촌오빠가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다고 하여 나는 오랜만에 연락하여 내비게이션에 무엇을 검색해야 하냐고 물었다. 그는 선뜻 청주역에서 납골당까지 태워다 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사촌오빠는 추운 겨울 나와 아이들을 픽업하고, 납골당에서 엄마를 만나게 도와주고, 점심을 사주고, 다시 역까지 데려다주었다.
20여 년 전의 나는 절대 몰랐다.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다시 생각해봐도 잘한 일이었다. 다른 사람이 어려울 때 돕는 일. 그 쓸모 역시, 건네는 순간에는 알 수 없다.
둘. 타인은 나의 쓸모를 정할 수 없다.
"넌 네가 원하는 것을 이룰 가능성이 낮아." 이런 식의 말들을 종종 듣고 살아왔다. 때로는 직접적이었고 대부분은 은근했지만, 암묵적이라고 해서 모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 대해 쉽고 빠르게 판단하는 것을 좋아한다. 충분히 자신의 실력을 보여준 적이 없거나, 그럴 기회조차 없었던 것은 중요하지 않다. 전형적인 길을 가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이런 말을 하기가 더 쉬워진다. 이런 말은 진위와 상관없이 그런 말을 하는 사람에게 우월감을 주기 때문에, 나약한 본인을 위해 남에게 이런 말을 하기도 하고, 가끔은 진정 그렇게 믿기 때문에 하기도 한다. 물론 이런 말을 직접적으로 하는 경우는 드물다. 하지만 가만히 들어보면, 네가 생각하는 것은 말도 안 되고 쓸데없거나 허황되니 어차피 안 될 거라는 내용을, 다르게 포장해서 전달하곤 한다.
진짜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는 나의 한계를 정할 자격과 권리가 단 1초도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명확히 아는 일이다.
특히, 유명한, 공부를 많이 한, 지위가 높은 사람이 안 된다고 말하면, 난 안 되겠지. 난 모자라, 난 실패자야, 끝났어, 라고 쉽게 단정 지어버린다. 그 말을 몇 번 듣다 보면, 그 말에 얽매여 점점 모든 사람이 나를 실패자로 본다고 착각하는 때가 오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타인의 말을 듣고, 그 아무것도 아닌 말에 따라 스스로 한계를 지어버리면 안 된다.
그 타인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나의 인생에 진심 어린 관심과 애정을 갖는지가 더 중요하다. 비열하고 무바카라임한 비판주의자들은 내 인생에 일말의 관심도 없다. 게다가, 지혜롭고 성숙한 사람들은 남에게 함부로 훈수를 두지 않는다. 섣부른 희망도 주지 않지만, 근거 없는 비방도 하지 않는다. 본인 스스로의 한계조차 다 깨닫지 못하고 죽는 것이 사람인데, 하물며 타인의 한계를 함부로 재단할 자격이 누구에게 있을까.
그러니, 다른 사람이 나의 한계를 정하게 하지 말자. 희소하지만, 나를 있는 그대로 봐주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의 손을 꽉 붙잡고 놓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은 타인에게 진정 어린 관심을 갖기 힘들다.
그러니 타인이 던지는 수모를, 부러 겪을 필요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