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신 시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서운했던 일로 점철되어 있다.
시어머님 생신날, 시댁 가스레인지 앞에서 미역국에 넣을 꽁꽁 언 소고기를 잘라내기 위해 오래 서 있었다. 주먹만 한 덩어리가 얼어서 끓여도 쉽게 분리되지 않아서 좀 녹으면 잘라내고, 또 녹으면 잘라내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걸 보고 남편이 시어머니랑 얘기하기 싫어서 부엌에서 음식하는 척한다고 나에게 화를 냈고,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날 이전에도, 그날 이후에도, 집에 돌아가는 길의 노을이 그토록 슬픈 빛깔로 물들어 보인 날은 없었다. 신혼 때, 회사 일이 너무나 바빠서 시어머니 전화를 못 받고 며칠간 전화도 다시 못했는데, 시어머니가 남편에게 전화가 없다며 서운하다고 눈물로 읍소를 하여 남편이 나에게 화를 냈고, 그래서 크게 싸우기도 했다. 이런 크고 작은 일들이 수시로 반복되고, 싸움으로 번지고, 그러다 보니 점점 더 멀어졌다. 일일이 기록하기 어려울 정도로 크고 작은 일들이 있었고, 회복 불가능이라 생각했었다.
시어머니 임종 후 수 년이 지난 어느 날, 내가 작성했던 시어머니에 대한 긍정적인 기록을 우연히 발견했다.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졌기에, 남이 쓴 것 같이 낯설었다. 어렴풋한 기억에, 아이들에게 균형 있게 알려주기 위해 썼던 것이었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그날은 아직도 생생하다. 폐암 투병을 하다가 가셨는데, 퉁퉁 부은 얼굴과 몸. 뭐라도 말씀을 하셔야 할 것 같은데, 굳게 다문 입. 이제는 더 이상 갈등할 시간조차 남겨져 있지 않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임종을 지킨 건 처음이었는데, 무상함, 미련과 회한. 이 모든 감정이 목적지 없이 떠다녔다.
나쁜 일들이 계속 일어나면 악순환이라고 한다. 돈 없이 시작한 결혼 생활은 수년간 나를 좀먹었다. 백 원 단위를 아껴야 하는 팍팍한 삶은 여유 없는 감정과 생각으로 바로 연결되기 일쑤였다. 내가 한 결정이었지만 이러한 삶에 종종, 아니 거의 매일 화가 났다. 시어머니는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어서 미안했겠지만, 그러면서도 목숨 걸고 키운 아들 장가보냈는데, 며느리가 홀대하는 것 같아 서운하셨던 것 같다. 사람이 돈만으로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닌 것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쪼들리며 살던 나는 타인의 장점을 크게 보기엔 너무 작은 사람이었다.
1937년생이었던 시어머니는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유복한 생활을 영위하셨다고 한다. 사업이 어려워졌고, 시아버지는 충격으로 돌아가시고, 가세는 급격히 기울었다. 시어머니는 친척 집에 얹혀살면서 자식들(남편과 시누이)을 키우셨다. 당시 남편은 중학교 3학년이었다고 한다. 남편을 잃은 슬픔에 빠질 새도 없이, 아비 잃은 자식들을 잘 키우기 위해 시어머니는 온 삶을 희생했다. 그 많던 자산을 한순간에 다 잃고 빚만 남은 상태에서, 자기 자신을 잃지 않고 주변 사람들에게 인심을 잃지 않으면서 자식을 올바르게 키우는 일. 생각만 해도 아찔한 일을 시어머니는 겪어냈다.
시어머니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이었다. 맞장구도 잘 쳐주시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먼저 도와주시겠다고 하셨고, 생일부터 각종 대소사까지 꼼꼼하게 챙기셨다. 고민 있는 사람들은 시어머니를 찾았다. 전화기는 자주 울렸고, 집에는 간식거리가 끊이질 않았다. 이전 손님이 사들고 온 간식과 이번 손님이 선물한 간식이 한데 어우러졌던 것이고, 이웃이 좀 더 만들어서 나눠준 주전부리도 넘쳐났다. 2002년 월드컵 때 우리나라 축구 대표팀이 4강 진출을 했고, 전 국민이 거리로 나와서 응원을 하고 축하를 했던 시기가 있었다. 시어머니는 그때를 "광복 이후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기뻐하던 때"라고 했는데, 광복과 2002년 월드컵을 다 경험한 사람의 말이라 오래 기억에 남았던 표현이었다. 그렇게, 어려운 경제적 상황에서도 따뜻하게 살던 분이었다.
시어머니에게는 물질적으로 해준 것이 없다는 미안함과, 시어머니로서의 자부심이 함께 있었다. 당시에는 그것까지 살필 여유는 없었다. 당시 나는 높은 대출금을 갚아 나가면서, 술 마시면 연락이 안 되고 고주망태가 되어 있는 남편이 살아서 집에 돌아오는지 안테나를 켜고 있어야 했다. 큰 아이는 아토피로 고통받고 있었는데, 자고 일어나면 베갯잇과 이불에 피가 묻어나는 날이 빈번했다. 그렇게 아이를 데리고 집앞 병원부터 종합병원까지 뛰어다니며 치료받게 했고, 감초물 달여서 목욕을 시켰으며, 특정 식재료는 피해서 밥을 먹이고, 상황에 따른 각각의 연고를 발라줘야 했다. 게다가 야근과 주말 근무가 만연했던 시절, 대기업 특유의 각 잡힌 온라인 게임 생활까지 더해져 온 몸과 마음은 각성 상태였다. 젊은 시절의 나는, 승진을 위해 매일 출퇴근하면서 아이가 건강하게 크는 것에 온통 정신이 팔려 있었지만, 남편은 홀어머니에게 더 신경이 쓰였을 것이고 답답했을 것이다.
시어머니와 잘 지내는 며느리들도 있고, 고부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는 남편들도 세상에 존재한다고 듣긴 했다. 좋은 사례에 속하지 못했고, 그런 상태에서 끝이 났다. 다양한 후회도 했었다. 이 모든 일의 근원이 없었어야 했다는 의미없는 생각부터 그때 이렇게 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작은 행동에 대한 후회까지. 뻔한 말이지만 부질없는 그 잡념과 후회로 흘려버린 시간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헤아릴 수도 없다.
하지만,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 잘 살아야 한다. 오늘 이 순간 따뜻한 대화를 더 많이 하고, 후회는 묻어두고, 어제보다 오늘 더 즐겁게 사는 것에 집중하며 사는 편이 낫다.
노년 내과 의사 가마타 미노루는 "인생 8할은 잊어도 좋다"고 했다. 특히, 버림받은 기억, 증오와 원한, 미움과 집착은 빨리 잊을수록 좋다고 한다. 좋은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조차 잊고 그저 햇볕을 쬐고 몸을 움직여 걷고 나면 저절로 좋은 사람이 되어 있을 거라고 한다. 수년간 쌓은 원망에 다소 허탈한 마무리라고 생각될 수도 있다. 하지만, 잊고, 잘 먹고, 오늘을 잘 사는 것 말고 달리 더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