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친절하지 않은 시스템이 사람을 예민하게 만든다

byDataSopher

키오스크가 세 번 내 말을 못 알아들었을 때 성격이 나빠진다.


카드를 꽂으라고 해서 꽂았더니 빼라고 하고 뺐더니 다시 결제하라고 한다. 뒤에는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다. 화면은 갑자기 처음으로 돌아간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사람이 기계 앞에서 한숨을 쉬고, 버튼을 세게 누르고, 옆 사람의 작은 움직임에도 신경질이 난다.


우리는 이런 사람을 보고 말한다.

“왜 이렇게 예민해?”

무인 키오스크 앞의 곤혹스러운 여성.png

정말 사람이 예민해진 걸까.

시스템이 사람을 예민하게 만들고 있는 걸까.


병원 앱을 열어본다. 로그인을 한다. 본인인증을 한다. 다시 로그인을 요구한다. 진료과를 고른다. 의사를 선택한다. 예약 가능한 날짜가 없다. 전화하라고 한다.


전화를 건다.

“상담원 연결은 0번입니다.”

0번을 누른다.


“홈페이지에서 더 빠르게 처리하실 수 있습니다.”

다시 홈페이지로 돌아간다.


이쯤 되면 나는 병원 시스템을 공략하는 게이머가 된다.


은행도 비슷하다. 회사의 경비처리 시스템도 그렇다. 보험 청구도, 주차 정산도, 구독 서비스 해지도 그렇다.


우리가 원하는 건 단순하다.


예약하고 싶다.

돈을 보내고 싶다.

환불받고 싶다.

취소하고 싶다.


그런데 시스템은 단순한 목적 사이에 계속 작은 장애물을 심어놓는다.

문제는 장애물 하나하나는 별것 아니라는 데 있다.


인증 한 번.

클릭 두 번.

문서 한 장.

대기 5분.


기업은 쉽게 말한다.

“그 정도는 사용자가 할 수 있잖아요.”

맞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버튼 하나만 누르며 사는 존재가 아니다.


아침에 지하철을 놓쳤고, 회사에서는 메신저 알림이 쌓였고, 점심시간에 보험회사에 전화를 걸었고, 퇴근길에는 주차비를 정산해야 한다.


인간의 인내심은 서비스마다 새로 충전되지 않는다.

이 사실을 시스템은 잊는다.


행정학에서는 이런 비용을 ‘행정부담(administrative burden)’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Pamela Herd와 Donald Moynihan은 사람이 제도와 서비스를 이용할 때 치르는 비용을 크게 학습비용, 준수비용, 심리적 비용으로 구분한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아내는 데 머리를 써야 하고,

서류와 절차를 통과하는 데 시간을 써야 하고,

스트레스와 수치심까지 감당해야 한다.


서비스는 무료일지 몰라도 사람은 자기 시간과 감정으로 사용료를 낸다.

나는 이걸 ‘감정세’라고 부르고 싶다.

하루 종일 보이지 않는 감정세를 낸다.


찾기 어려운 메뉴.

뜻을 알 수 없는 오류 메시지.

다섯 단계의 인증.

취소보다 가입이 훨씬 쉬운 화면.

상담원에게 연결되지 않는 고객센터.


각각은 사소하다.

사소한 마찰이 하루에 스무 번 반복되면 사소하지 않다.


오래전 인간-컴퓨터 상호작용 연구에서도 사용자가 기술을 목표 달성의 방해물로 인식할 때 좌절감이 발생하며, 문제가 해결되는 데 걸리는 시간과 잃어버린 시간이 커질수록 좌절 역시 커지는 것으로 관찰됐다.


최근 연구는 더 나아간다.


2025년 발표된 인터페이스 연구에서는 구독 해지를 여러 단계로 만들거나, 취소 버튼을 숨기거나, 애매한 표현을 사용하는 설계가 사용자의 인지적 부담과 탐색 노력을 높이는 현상이 EEG와 시선추적에서도 관찰됐다.


그러니까 우리가 화면 앞에서 짜증을 내는 현상을 전부 성격 문제로 돌리기는 어렵다. 시스템의 불친절이 다른 인간에게 전달된다는 점이다.


앱이 화나게 만들었는데 상담원이 욕을 먹는다.

회사의 복잡한 환불정바카라이 문제인데 매장 직원이 공격을 받는다.

병원 예약 시스템이 실패했는데 접수창구 직원과 환자가 싸운다.


시스템은 감정이 없다.

자신이 만들어낸 분노를 받지 않는다.

마지막에 서 있는 사람이 받는다.


미국의 2025 National Customer Rage Study에서는 조사 응답자의 77%가 최근 1년간 제품이나 서비스 문제를 경험했다고 답했고, 문제를 경험한 사람 가운데 64%가 분노를 느꼈다고 보고됐다.


미국 소비자를 대상으로 한 조사이므로 한국 슬롯에 그대로 대입할 수는 없다. 서비스 실패가 얼마나 쉽게 감정의 문제로 전환되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신호다.


혹시 어떤 시스템은 일부러 불친절한 것은 아닐까.


가입은 버튼 하나인데 해지는 메뉴를 다섯 번 들어가야 한다.

무료체험은 눈에 크게 보이는데 자동결제 조건은 작다.

‘동의’는 화려한 버튼이고 ‘거절’은 회색 글씨다.


이쯤 되면 불편함은 버그가 아니다.

비즈니스 모델이다.


‘다크패턴’이라는 말이 등장했다. 사용자가 원하는 선택보다 기업에 유리한 선택을 하도록 인터페이스를 설계하는 방식이다.


2026년 발표된 실험 연구에서는 거짓 희소성, 몰래 장바구니에 넣기, 거절하는 사람에게 죄바카라감을 주는 표현 등에 노출된 소비자에게서 배신감과 부정적 구전, 보복 의도가 증가했다.


한국에서도 이미 제도가 움직였다.


공정거래위원회는 2025년 2월 14일부터 전자상거래법 개정을 통해 6개 유형의 온라인 다크패턴을 규율하기 시작했다. 화면 디자인의 취향 문제가 아니라 소비자의 선택권을 훼손할 수 있는 문제로 본 것이다.


다크패턴보다 더 넓은 문제를 생각해보고 싶다.

모든 불친절한 시스템이 악의적으로 설계된 것은 아니다.

흔한 원인은 아무도 사용자의 하루 전체를 보지 않는 것이다.


개발자는 기능을 본다.

기획자는 전환율을 본다.

보안팀은 사고 가능성을 본다.

법무팀은 바카라임을 본다.

경영진은 비용을 본다.


마지막에 남는 사람이 있다.


사용자다.


각 부서는 자신의 위험을 조금씩 줄였는데 그 모든 불편이 한 사람의 화면에 합쳐진다. 조직에는 합리적이었던 결정들이 인간에게 도착하면 비합리적인 경험이 된다.


지금 시대의 중요한 문제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감정조절 교육을 하고, 친절 교육을 하고, 분노를 관리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사람이 계속 화나는 환경을 만들어놓고 사람에게만 침착해지라고 요구하는 것은 이상하다.


OECD 역시 최근 행정 절차의 불필요한 마찰을 ‘sludge’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며 디지털화 자체가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잘못 설계하면 기존 마찰을 굳힐 수 있다고 지적한다.


버튼 하나를 줄이는 일은 그래서 생각보다 정치적인 일이다.

사람의 시간을 돌려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설명을 한 문장 쉽게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사람의 인지능력을 존중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실패했을 때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대신 무엇이 잘못됐고 무엇을 하면 되는지 알려주는 것도 친절이다.


인간에게 문제 해결 비용을 떠넘기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좋은 시스템을 판단하는 기준도 달라져야 한다.


얼마나 많은 기능을 가지고 있는가보다,

사용자가 얼마나 적게 긴장해도 되는가.


얼마나 빠른가보다,

실수했을 때 얼마나 쉽게 돌아올 수 있는가.


얼마나 자동화됐는가보다,

막혔을 때 인간에게 얼마나 빨리 닿을 수 있는가.


좋은 시스템은 인간을 시험하지 않는다.


사용설명서를 외우게 하지 않고,

자신이 바보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만들지 않고,

실수 한 번으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시키지 않는다.


무엇보다 사용자의 인내심을 무한한 자원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이제 친절을 사람의 성격만을 설명하는 단어로 쓰고 싶지 않다.


친절한 회사가 있고,

친절한 정바카라이 있고,

친절한 인터페이스가 있으며,

친절한 행정이 있다.


친절은 웃으며 말하는 태도 이전에 구조다.


사람이 쉽게 화내는 슬롯를 걱정한다면 사람이 하루 종일 통과해야 하는 시스템부터 살펴봐야 한다.


우리가 예민해진 이유 중 일부는 마음이 약해져서가 아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너무 많은 버튼을 누르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좋은 기술의 가장 높은 단계는 따로 있다.

사람이 화낼 일을 하나씩 없애주는 기술.


그런 기술을 ‘친절하다’고 부르고 싶다.

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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