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보다 하루 종일 바빴던 사람이 밤에 더 허무할 때가 있다.
아침부터 회의가 있었다. 메신저에 답했고 밀린 메일을 처리했고 점심을 먹으며 유튜브를 봤다. 오후에는 보고서를 고쳤고 퇴근길에는 카톡을 확인했다. 집에 와서는 배달 앱을 열고 씻으면서 쇼츠를 넘겼다.
분명 하루를 꽉 채웠다.
침대에 누우면 이상한 질문이 찾아온다.
“그래서 오늘 나는 뭘 했지?”
기억나는 것이 별로 없다.
나는 요즘 사람들의 '시간 실종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시간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시간 안에서 ‘나’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바쁜 사람을 충실하게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바쁨과 충실함은 전혀 다른 개념이다.
Microsoft가 공개한 업무 데이터를 보면 알림이 특히 많은 상위 이용자군에서는 핵심 근무시간 동안 평균 2분마다 회의·메일·채팅 같은 방해가 발생했다. 하루 전체로 계산하면 275개의 신호에 이른다. 회의의 60%는 예정되지 않은 즉흥 회의였다.
문제는 일이 많다는 것만이 아니다.
한 가지 일을 ‘내가 하고 있다’고 느끼기도 전에 다음 일이 침입한다는 것이다.
메일을 쓰다 메신저를 보고 메신저에 답하다 회의에 들어가고 회의 중 문서를 수정한다. 몸은 하루를 살지만 정신은 수십 개의 탭 사이를 이동한다.
2025년 IT 종사자들을 분석한 연구에서도 멀티태스킹이 많을수록 직무 스트레스가 높고 업무 웰빙은 낮아지는 관계가 관찰됐다. 흥미로운 것은 자율성이 높을수록 부정적 관계가 완화됐다는 점이다.
중요한 단어는 자율성이다.
사람은 시간이 많다고 살아 있다고 느끼는 것이 아니다.
내 시간이 내 선택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고 느낄 때 살아 있다고 느낀다.
어떤 일을 할지, 어떤 순서로 할지, 언제 멈출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감각이다. 실제 연구에서도 직무 자율성은 통제감과 긍정적 정서, 일의 의미와 연결되며 온라인 게임 내 웰빙과 양의 관계를 보였다.
현대인의 피로를 과로라고만 생각하지 않는다.
‘선택하지 못한 시간의 과잉’에 가깝다.
한국 슬롯에서는 이 문제가 더 낯설지 않다.
OECD가 2026년 공개한 한국 웰빙 분석을 보면 한국 노동자의 연간 노동시간은 2023년 기준 1872시간으로 OECD 평균보다 약 200시간 길었다. 주당 50시간 이상 장시간 일한 노동자 비율도 17%로 OECD 평균 9.8%보다 높았다.
우리는 오래 일하는 문화에서 벗어나려 하면서도 빈 시간을 견디지 못하는 문화를 만들고 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20초도 스마트폰을 본다.
음식이 나오는 5분도 무엇인가를 소비한다.
산바카라하면서 팟캐스트를 듣고 운동하면서 영상을 보고 쉬면서도 생산성 콘텐츠를 본다.
삶의 모든 틈을 효율로 메워버렸다.
효율적으로 살고 있는데 삶은 기억나지 않는다.
‘살아 있다는 느낌’은 거창한 행복에서 오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퇴근길에 우연히 본 노을,
카페에서 멍하니 보낸 20분,
친구와 목적 없이 나눈 대화,
읽다가 한 문장에서 오래 멈춘 순간.
성과표에는 기록되지 않지만 순간들이 우리의 하루에 문장부호를 찍는다.
문장부호가 없는 글은 읽을 수 없듯,
쉼표가 없는 인생도 기억하기 어렵다.
요즘 나는 시간을 더 잘 관리하는 것보다 한 가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내 하루에서 내가 결정한 시간이 얼마나 있었는가.
일정을 하나 더 넣는 대신 하나를 지워보는 것.
이동시간에 이어폰을 빼보는 것.
알림을 확인하기 전에 생각 하나를 끝까지 가져가 보는 것.
게으름이 아니다.
내 시간의 주권을 되찾는 일이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시간이 아닐지도 모른다.
아침부터 밤까지 수없이 많은 일을 해냈는데도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면, 삶이 비어 있어서가 아니다. 너무 많은 것이 들어와서 내가 들어갈 자리가 없어진 것이다.
오늘 하루 한 칸만 비워두자. 빈칸에서 의외로 오래 만나지 못했던 사람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 자신이.
참고한 자료
OECD, Inclusive and Sustainable Well-being in Korea, 2026 — 한국 노동시간 및 여가·웰빙 지표.
Microsoft WorkLab, Breaking down the infinite workday, 2025 — 업무 중 알림·회의·메시지 패턴 분석.
Frontiers in Psychology, 2025 — 멀티태스킹, 직무 스트레스, 자율성과 온라인 게임 웰빙의 관계.
Frontiers in Psychology, 2024 — 직무 자율성·통제감·긍정적 정서와 업무 웰빙 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