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오전, 그녀는 평소보다 일찍 문화센터로 향했다. 오늘은 학기 마지막 발표회 날이었다. 가방 속에는 몇 주에 걸쳐 완성한 부엌 창가 그림이 들어 있었다.
전시장 한쪽 벽에 그림을 걸어두고, 그녀는 액자 위치를 몇 번이고 매만졌다. 강사가 뒤에서 “잘 어울리네요” 하고 웃었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아들이었다.
“어, 왜.” “엄마, 할머니가... 지금 구급차예요.” 아들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액자에서 손을 뗐다. “어느 병원이야. 지금 갈게.”
놀란 강사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녀가 더듬더듬 사정을 설명하자, 강사는 두말없이 차 열쇠를 챙겼다. “제가 모셔다 드릴게 요. 버스 기다리실 시간 없잖아요.” 그녀는 벽에 걸린 그림을 한 번 돌아보고는, 앞치마도 벗지 못한 채 조수석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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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안에서 그녀는 창밖만 바라보았다. 며칠 사이 부엌에서 본 장면들이 차례로 떠올랐다. 김치통 뚜껑을 열지 못해 애쓰던 시어머니의 손, 소파에서 파스를 붙이며 “나이 들면 다 그런 거야” 하고 웃던 얼굴. 그때 한 번만 더 물어볼걸. 그 생각이 뒤늦게 밀려왔다.
“다 왔어요.” 강사의 목소리에 그녀는 정신을 차렸다.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못 한 채, 그녀는 병원 입구를 향해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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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에게서 상황을 전해 듣는 동안, 그녀는 앞치마 끈만 만지작거렸다. 한 지붕 아래 살면서도, 요즘 시어머니의 낯빛이 어땠는지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요 몇 달, 저녁마다 그녀의 머릿속은 그림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시어머니는 늘 그녀의 등을 떠밀어주던 사람이었다. 나가라고, 네 할 거 하라고. 그 말을 너무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던 걸까. 그녀는 대답을 찾지 못한 채 복도 바닥의 타일 무늬만 눈으로 좇았다.
딸이 도착했다. 한동안 말이 없던 딸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근데 언제부터 그렇게 안 좋으셨대?” “며칠 전부터 기운이 좀 없어 보이시긴 했는데...” “근데 왜 병원엘 안 데려갔어.” 딸의 말에 가슴 한구석이 시렸다.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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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를 기다리는 복도는 냉방이 셌다. 얇은 앞치마 차림의 그녀는 팔짱을 낀 채 몸을 웅크렸다. 남편이 그 모습을 보더니, 말없이 자기 점퍼를 벗어 그녀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그녀는 잠깐 멈칫했다. 요즘 둘 사이에는 묻지 않고 넘어가는 일이 더 많았다. 그런데 어깨에 얹힌 손길은 조금도 낯설지 않았다. 점퍼에는 아직 남편의 체온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점퍼 앞자락을 여미며 남편을 올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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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회를 마치고, 그녀는 남편과 복도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당신도 좀 쉬어.” 남편이 먼저 말했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나 좀 자.” 그렇게 받으며 옅게 웃었다. 며칠 만에 둘이 나눈, 가장 편한 말이었다.
잠시 뒤 그녀가 물었다. “당신 요즘도 낚시 가?” 왜 하필 그 말이 나왔는지 그녀도 알 수 없었다. “어, 뭐.” 남편은 짧게 답했다. 그녀는 더 묻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남편도 그녀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앞치마 자락에 물감 자국이 군데군데 묻어 있었지만, 남편의 눈은 거기까지 오지 않았다. 서로 묻지 않는 게, 오늘만큼은 편했다.
가족들은 병실을 지킬 순서를 정했다. 첫날밤은 아들이 맡기로 했다. 집에 들어가 좀 쉬라는 남편의 말에도, 그녀는 병원에 남겠다고 했다. 넷이 한자리에서 무언가를 함께 정한 건 참 오랜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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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보호자 대기실 간이 의자에 앉아 그녀는 강사에게 문자를 보냈다. “당분간 수업은 못 나갈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전송 버튼 위에서 손끝이 잠깐 머뭇거렸다. 몇 달 만에 겨우 되찾은 시간이었다. 그녀는 전송 버튼을 눌렀다.
곧 답장이 왔다. “괜찮아요, 어머님 잘 돌보고 오세요. 자리는 비워둘게요. 그림은 제가 잘 보관해 둘게요.” 그녀는 그 문자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오늘 아침 액자 위치를 매만지던 일이 먼 옛날 일처럼 느껴졌다. 발표회가 어떻게 끝났는지, 누가 그 그림 앞에 서 보았는지, 그녀는 묻지 않았다. 생각만큼 서운하지는 않았다.
맞은편 의자에는 딸이 앉아 있었다. 핸드폰을 무릎에 올려둔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낮에 뾰족하던 목소리는 어디로 갔는지, 웅크린 모습이 어릴 적 그대로였다. 그녀는 어깨에 걸치고 있던 남편의 점퍼를 벗어 딸의 무릎에 덮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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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녘, 아들이 잠깐 바람을 쐬러 나간 사이 그녀는 병실에 들어가 시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산소마스크 너머로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지만, 그녀는 그 손을 쥔 채 침대 곁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잡은 손은 생각보다 작았다. 이 손이 오랫동안 이 집 부엌을 지켜왔다. 그녀가 처음 이 집에 들어왔을 때도 그랬다. 친정어머니를 일찍 여읜 그녀는 김치 하나 제대로 담글 줄 몰랐다. 시어머니는 나무라는 대신 옆에 서서 소금을 한 줌 덜어주곤 했다. “처음엔 다 그래.” 그 말투는 늘 무던했다.
앞치마 끈을 뒤로 돌려 매느라 버둥거리고 있으면, 시어머니는 말없이 다가와 끈을 묶어주었다. 늦게 들어온 날이면 밥솥 안에 그녀 몫의 밥이 따로 덜어져 있었다. 그런 것들에 고맙다는 말을 그녀는 한 번도 제대로 해본 적이 없었다. 엄마가 살아 있었다면 이런 느낌이었을까. 그런 생각이 든 적은 몇 번 있었다.
시어머니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도 떠올랐다. “너도 네 할 거 해야지.”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놓이면서도 어딘가 미안했었다. 그녀는 제 허리에 묶인 앞치마 끈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쥐고 있던 시어머니의 손을 가만히 쓸어보았다.
창밖이 서서히 밝아왔다. 이 집 부엌은 당분간 자기 손으로 꾸려가야 할 것이었다. 각오랄 것까지는 없었다. 그저 그렇게 되는 게 당연했다. 그녀는 시어머니의 손을 놓지 않은 채, 아들이 돌아올 때까지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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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 되어 딸에게 잠시 병실을 맡기고, 그녀는 옷을 갈아입으러 집에 들렀다. 부엌에 들어서니 시어머니가 늘 앉던 의자와 가지런히 줄 선 양념통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습관처럼 냉장고를 열어 저녁 찬거리를 살피다가 손을 멈췄다. 이 냉장고를 채우는 건 늘 시어머니였다.
싱크대 위에는 시어머니가 며칠 전 담가둔 김치통이 놓여 있었다. 그녀는 뚜껑에 손을 얹은 채, 한참을 그 앞에 서 있었다.
결국 뚜껑은 열지 않았다.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았다. 그녀는 옷만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그 김치통을 열어야 할 날이 생각보다 빨리 올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병원으로 돌아가는 내내 떨어지지 않았다.